흑도 청도 아닌 묘한 때깔, 그건 바로 유청색

'한광석 전통 염색전'을 둘러 보고

등록 2005.10.18 16:26수정 2005.10.18 16: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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희지만 불투명한 무명에 쪽이 올라앉으면 어느 순간에 옷감이 투명해진다. 거기서 말리고 담그기를 거듭하면 투명하던 쪽빛 무명은 어느새 하늘도 되고 바다도 된다. 거듭하기도 지쳐 질리고 물리도록 무명에 쪽이 앉으면 물 깊이보다 푸름이 더 깊어 버린 인당수 물이 그러랴 싶도록 검디 푸른 쪽빛은 아예 시퍼런 한이 된다.

a 하늘, 바다가 되고 한(恨)이 된 쪽염 모시의 그라데이션. 오른쪽은 이번에 처음 공개하는 색으로 짙은 쪽염에 황련을 덧앉힌 유청색(柳靑色) 모시.

하늘, 바다가 되고 한(恨)이 된 쪽염 모시의 그라데이션. 오른쪽은 이번에 처음 공개하는 색으로 짙은 쪽염에 황련을 덧앉힌 유청색(柳靑色) 모시. ⓒ 한광석

밭 둔덕 쪽풀을 "한여름 더위에 썩다가 지치도록" 발효 시켜야 얻는 시리게 맑고 푸른 그 색은 마땅히 표현할 말이 없어서 그냥 풀 이름을 따라 쪽빛이라고 부른다. 서양 말은 그 색을 '인디고 블루'라고 천박스럽게밖에는 쓸 도리가 없다.


쪽에 미친 한광석(48·전남 벌교읍 지곡리)씨가 여름 내내 쪽물을 휘둘러 "발바닥이 자그로와(간질거려)"지도록 징헌 작업을 했던 "자석(자식) 같은" 쪽빛 옷감을 들고 간만에 서울 나들이를 했다.

이태호(명지대) 교수가 찾아내고 화랑 학고재가 멍석을 깔아 줘 그의 쪽빛이 새삼스레 서울에 알려지던 이십여 년 전만 해도, 화학 염료의 얕은 현란함에 밀린 쪽을 비롯한 자연 염료 염색은 천연 염색이 아니라 천덕꾸러기 염색이었다. 그는 잊혀져가던 투명한 하늘을 우리에게 소름끼치는 푸르름의 잔치판으로 알려 줬다.

쪽빛은 화학 염료처럼 천에 강제로 색을 먹이지 않고 천의 결을 따라 자분자분 색을 들어앉힌다. 색이 현란하면 그 색에 현혹되어 옷감은 안 보이는데 그의 쪽빛 옷감은 진하든 연하든 올도 보이고 색도 보인다. 자연의 색은 눈을 거스르지 않기 때문이다.

기자는 전시장의 천들을 희한하게 바라보고 한광석은 그런 기자를 희한한 눈으로 바라본다. 결코 희한하지 않은 그의 일상인 쪽을 희한하게 바라보는 세상이 그에겐 희한할 터이다.

세상과 겉도는 듯한 그의 말과 그의 생각은 쪽염의 경지가 어디부터인지를 대충 짐작케 한다. "(쪽옷감에서) 돈이 보이면 그 때부터 색이 안 보인다"는 그의 말은, 천연 염색입네 하면서도 실제는 자연의 정성이 아닌 자연을 가장한 허위의 인공색을 자연에 보태서 보다 많은 이윤을 남기려는 많은 천연염색 표방자들에게 따가운 질책이 될 것이다.


a 디지털 눈을 가진 디카는 녹의홍상의 녹색을 읽어낼 재주가 없다. 유청색은 가서 보는 수밖에 없다.

디지털 눈을 가진 디카는 녹의홍상의 녹색을 읽어낼 재주가 없다. 유청색은 가서 보는 수밖에 없다. ⓒ 한광석

전시장에서 검도록 짙은, 처음 보는 녹색의 모시를 한 필 발견하고 자연광 아래서 색을 보기 위해 화랑 밖으로 들고 나갔다가 말을 잊었다. 이번에 그가 처음 선보이는 색으로 흑도 청도 아닌 묘한 때깔의 그 빛은 유청색이라 했다. 아하... 기록으로 읽기만 하던 그 색을 직접 눈으로 읽으려니 당연히 생소했던 것이고 유청이 곱게 앉은 그 모시는 모시가 아니라 세상 밖의 옷감이었다.

삭다가 지쳐 버린 쪽물을 들이고 말리고 또 들이기를 거듭해 천이 검푸르러진 위에 조심스레 황련을 올린 그 유청색은 우리가 글로만 아는 '녹의홍상'의 원형이라고 한다. 제색 과정을 공개해도 되느냐는 질문에 간단하게 "알려 줘도 못허요"한다. 어쩐지 초록 저고리에 붉은 치마의 녹의홍상 배색이 영 못마땅해서 선조들의 색 감각 수준을 늘 탓하곤 했었는데, 여태 보던 포목집의 녹의홍상은 죄다 가짜였다.


유청색의 옷감을 홍화물이 깊고 붉게 앉은 천 위에 대고 머리 속 바느질로 초록 저고리와 붉은 치마를 지어 보며 여태껏 멸시했던 조상님들의 색 감각에 사죄 또 사죄를 했다. 괜히 생긴 녹의에 홍상이 아니었던 것. 익을 대로 익은 8월의 버들색이라 하여 유청(柳靑)이니, 새악시의 색이요 귀인의 색이요 청순고결의 색으로 유달리 초록 계열을 귀히 여긴 조상님들의 초록 애정이 새롭다.

97년 학고재 전시 이후 8년만의 바깥 나들이인 이번 전시는 압구정동 '디아모레 갤러리'에서 11월 20일까지 계속된다. 무명과 모시를 주제로 쪽 외에 홍화, 소목, 황련, 백련을 입힌 삼십여 필의 눈 편안한 자연색의 잔치가 관람객을 맞는다.

덧붙이는 글 | 전시 문의 02-3448-5631

덧붙이는 글 전시 문의 02-3448-56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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