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름날 호숫가와 가을의 공원

뉴질랜드 여행기(19) 공원을 거닐며 노독을 풀다

등록 2005.10.19 11:44수정 2005.10.19 13: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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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행이 단지 빡빡한 일정을 소화해내는 강행군의 연속이라면 그 즐거움은 분명 반감되고 말 것이다. 그럴 경우, 흥미로운 볼거리와 신나는 체험을 아무리 많이 눈앞에 두고 있더라도 시간에 쫓겨 충분히 보고 즐기지 못할 것이기 때문이다. 충분한 휴식과 여유 있는 일정은 기억에 오래 남는 즐거운 여행을 위한 필수 조건이다.

여행길 휴식, 공원 산책


하지만 모처럼 떠난 여행길에서 휴식을 취하고 여유를 부린답시고 숙소에 마냥 머물러 있을 수는 없는 노릇이다. 그렇다고 아무런 목적지도 정하지 않고 무작정 낯선 거리로 나서서 이리 기웃 저리 기웃거리기도 마땅치 않은 경우가 많다. 그랬다가는 복잡한 대도시에서는 길을 잃어버리고 헤매느라고 오히려 더욱 피곤해지기 십상이다.

이럴 때 공원 산책만큼 좋은 것이 없다. 특히 뉴질랜드에는 대도시는 말할 것도 없고 아주 작은 마을에조차도 공원 한두 개쯤은 반드시 있기 마련이어서 공원 산책은 여행 중에 손쉽게 즐길 수 있는 휴식의 방법이 된다. 한가롭게 공원을 거닐다보면 오랜 운전과 관광명소 순례로 지친 몸과 마음이 가볍게 풀어진다.

더군다나 뉴질랜드의 공원들은 대개 입장료가 없으며 어디를 가나 갖가지 꽃들로 장식한 화단과 넓고 푸른 잔디밭 그리고 울창한 나무들로 잘 가꾸어져 있어서 공원 산책은 단순한 휴식을 넘어서는 몹시도 즐거운 경험이 되기도 한다. 그래서 잘 가꾸어진 공원들은 아예 빼놓을 수 없는 관광명소가 되기까지 한다.

뉴질랜드 북섬의 남서부 해안을 구석구석 돌아보는 이번 여행길에서, 7박 8일이라는 다소 빡빡한 일정 속에서도 내가 지치지 않고 여유를 지닐 수 있었던 것도 이렇게 여행 중에 틈틈이 즐긴 공원 산책에 힘입은 바 크다.

그 중에서 가장 기억에 남는 두 곳을 지금 떠올리자니 문득 박인환이 쓴 시에 곡을 붙인 아름다운 노래 '세월이 가면'이 생각난다. '여름날의 호숫가 가을의 공원, 그 벤치 위에 나뭇잎은 떨어지고'라는 노랫말처럼, 그 두 공원에서 우리는 아름다운 호수와 가을빛이 한창인 단풍과 가로등 옆 벤치에 쌓인 낙엽들을 만났기 때문이다.


여름날의 호숫가, 왕가누이의 버지니아 호수 공원

여행 4일째 되는 날, 팡가누이 강을 옆에 끼고 험한 비포장도로를 잔뜩 긴장하면서 달려 도착한 아담한 도시 왕가누이에서 전망대와 미술관, 시내 도심 거리를 오후 내내 걸으면서 구경하고 나자 피로가 몰려왔다.


그러나 예약해 놓은 모텔로 직행하기에는 조금 이른 시간이어서 우리는 도시의 북쪽 외곽에 자리잡고 있는 버지니아 호수(Virginia Lake) 공원을 다녀오기로 했다. 호수 가운데 설치해 놓은 분수가 솟구쳐 오르는 모습을 밤에는 화려한 조명으로 비추기 때문에 몹시 볼만하다고 여행안내서에 적혀 있었기 때문이었다.

a 왕가누이의 버지니아 호수 공원 내에 있는 '윈터 가든'에는 꽃들이 한창이었다

왕가누이의 버지니아 호수 공원 내에 있는 '윈터 가든'에는 꽃들이 한창이었다 ⓒ 정철용

버지니아 호수 공원의 산책로로 들어서기 전에 우리는 주차장 바로 옆에 있는 윈터 가든(winter garden, 유리로 만든 온실 안에 주로 열대 식물들과 꽃들을 전시해 놓은 실내정원)에 먼저 들렀다. 문 닫을 시간인 5시가 거의 다 되어서인지 우리 말고는 아무도 없었다.

윈터 가든 내부의 곳곳에 놓여 있는 다양한 정원 장식물과 이색적인 조각 작품들에 힘입어, 활짝 피어난 갖가지 꽃들의 표정이 더욱 풍부하게 다가왔다. 그 꽃들 사이를 거닐고 있자니 하루 동안 쌓인 피로가 반쯤 풀리는 듯했다.

a 아내와 딸아이는 몰려드는 오리 떼에게 식빵을 뜯어 먹이를 주었다

아내와 딸아이는 몰려드는 오리 떼에게 식빵을 뜯어 먹이를 주었다 ⓒ 정철용

윈터 가든을 나와서 버지니아 호숫가를 한 바퀴 빙 돌아가는 산책로에 들어서자 마치 기다리고 있었다는 듯이 오리 떼가 우리에게 몰려들었다. 자주 경험했던 일이라 아내와 딸아이는 당황하지 않고 준비해 간 식빵을 조금씩 뜯어서 던져주었다.

아내와 딸아이는 계속 쫓아오는 오리들을 어쩌지 못해 뒤처지고 어느덧 나는 혼자서 산책로를 걷고 있었다. 가을인데도 아직 싱싱한 초록의 잎사귀들을 지닌 나무들이 어두워지는 호수의 수면 위에 선명하게 떠오른 자신의 모습을 마주한 채 깊은 명상에 빠져 있었다.

a 여름 나무는 수면에 비친 자신의 모습을 바라보며 깊은 명상에 잠겨 있었다

여름 나무는 수면에 비친 자신의 모습을 바라보며 깊은 명상에 잠겨 있었다 ⓒ 정철용

그 모습을 바라보며 천천히 걸으면서 나 역시 모처럼 나 혼자만의 시간을 만끽했다. 마주치는 사람들이 미소와 함께 건네는 다정한 인사와 귀소하는 새들의 평화로운 울음소리만 가끔씩 끼어드는 저녁 어스름의 고즈넉한 침묵 속을 나는 혼자서 거닐었다.

a 저녁 어스름이 내려 앉고 있는 호숫가의 고즈넉한 침묵 속을 혼자서 거닐었다

저녁 어스름이 내려 앉고 있는 호숫가의 고즈넉한 침묵 속을 혼자서 거닐었다 ⓒ 정철용

30여 분 정도 걸어서 호수를 한 바퀴 돌아 출발지점에 가까워지자, 멀리 아내와 딸아이의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오리들에게 붙들려 호숫가 산책하는 것은 포기하고 나를 기다렸다고 한다. 땅거미가 이미 호수의 수면까지 내렸고 우리는 호수 가운데에 있는 분수를 비춰줄 조명이 켜지기만을 기다렸다.

6시를 조금 넘기자 드디어 분수가 높게 솟구치고 있는 가운데 조명이 환하게 밝혀졌다. 그 모습을 보고 엄마아빠 손잡고 산책 나온 몇몇 꼬마들이 탄성을 질렀지만 나는 별로 큰 감흥을 얻지 못했다. 물에 비친 자신의 모습을 물끄러미 들여다보던 나무의 그림자가 더 오랫동안 내 마음에 남았다.

a 짙어진 어둠 속에 잠긴 호수의 가운데에서 솟구치는 분수를 조명은 환하게 밝혀주었다

짙어진 어둠 속에 잠긴 호수의 가운데에서 솟구치는 분수를 조명은 환하게 밝혀주었다 ⓒ 정철용

가을의 공원, 마스터톤의 퀸 엘리자베스 2세 공원

왕가누이의 버지니아 호수 공원에서는 만나지 못했던 가을을 우리는 마스터톤(Masterton)의 퀸 엘리자베스 2세 공원(Queen Elizabeth II Park)에서 만날 수 있었다. 이번 여행의 반환점인 웰링턴을 돌아 다시 오클랜드를 향하여 북상하던 여행 7일째의 날이었다.

마스터톤은 이렇다할 볼거리가 전혀 없는 평범하고 한가로운 농촌 지역의 작은 도시에 불과하지만 나는 운전에 지쳐 잠깐 그곳에서 쉬었다 가기로 했다. 하지만 그 '잠깐'은 1시간을 넘길 정도로 지체되고 말았다. 마스터톤의 퀸 엘리자베스 2세 공원에서 우리가 마주친 가을 풍경 탓이었다.

a 마스터톤의 퀸 엘리자베스 2세 공원에서 마주친 가을빛이 우리의 발길을 오래 붙잡았다

마스터톤의 퀸 엘리자베스 2세 공원에서 마주친 가을빛이 우리의 발길을 오래 붙잡았다 ⓒ 정철용

화려한 색상의 꽃보다 곱게 물든 단풍잎을 훨씬 더 좋아하는 아내는 모처럼 만나는 고운 단풍에서 눈을 떼지 못했다. 뉴질랜드로 이민 와서 오클랜드에 살면서 아내가 가장 그리워했던 것 중의 하나가 바로 단풍이었으니 오죽했겠는가!

오클랜드는 겨울에도 영하로 내려가는 법이 없고 눈 한 송이 내리지 않을 정도로 따뜻한 해양성 기후여서 그런지, 가을에도 좀처럼 단풍이 들지 않는다. 그러다 보니, 그 동안 몇 차례 이곳에서 가을을 맞았어도 가을빛 흠씬 묻어나는 곱게 물든 단풍잎을 아내는 한번도 구경해 보지 못했던 것이다.

a 가로등이 있는 호숫가 옆 벤치 위에 떨어지는 낙엽처럼 나도 내 피곤한 몸을 잠시 내려놓았다

가로등이 있는 호숫가 옆 벤치 위에 떨어지는 낙엽처럼 나도 내 피곤한 몸을 잠시 내려놓았다 ⓒ 정철용

아내가 연신 감탄사를 발하면서 딸아이와 함께 공원의 이곳저곳을 거닐며 단풍든 나뭇잎들을 올려다보고 단풍에 지쳐 떨어진 낙엽들을 내려다보는 사이에 나는 작은 호숫가에 마련된 벤치 위에 앉아서 가을빛을 즐겼다.

맑은 햇빛 속에서 가을이 익어가고 있었다. 싱싱한 초록에서 불타는 듯한 빨강으로 그리고 다시 아련한 노랑으로 건너가는 저 색채의 향연에는 아내와 내가 두고 온 고국의 산하가 숨어 있었다. 우리의 기억 속에 간직되어 있는 그 찬란한 가을빛이 지금 여기 낯선 나라 낯선 땅에서 이렇게 폭발하고 있구나!

a 우리 기억 속의 가을은 호수에 가로놓여 있는 아름다운 다리를 건너서 이곳까지 온 것 같았다

우리 기억 속의 가을은 호수에 가로놓여 있는 아름다운 다리를 건너서 이곳까지 온 것 같았다 ⓒ 정철용

호수에 가로놓여 있는 다리를 건너온 아내의 얼굴이 맑아져 있다. 안 보이는 곳에서 오래 참았던 눈물이라도 흘리고 왔나보다. 너무 오래 지체했다. 우리는 아쉬운 발걸음을 옮겨야 했다. 그 무거운 발걸음을 아이들의 발랄한 목소리가 잡아끌었다.

나무로 견고하게 만든 어린이 놀이터가 눈에 띄었다. 성채처럼 쌓아올린 그 놀이터의 나무 벽에는 '키즈 오운 플레이그라운드(Kids Own Playground)'라고 적혀 있었다. 놀이터야 어디서나 아이들을 위한 시설인데, 새삼스럽게 '어린이 전용 놀이터'라니!

a 공원을 걸어나오는 길에 마주친 어린이 놀이터는 나무로 만든 견고한 성채처럼 보였다

공원을 걸어나오는 길에 마주친 어린이 놀이터는 나무로 만든 견고한 성채처럼 보였다 ⓒ 정철용

그러나 그게 아니었다. 가까이 다가가서야 나는 그 뜻을 제대로 파악할 수 있었다. 울타리와 미끄럼틀과 난간과 계단을 만드는데 사용된 하나 하나의 나무판마다 이름들이 새겨져 있었다. 놀이터 앞에 세워진 안내판을 읽어보니 그 마을의 아이들 이름들이라고 한다.

그들은 조금씩 아껴 모은 자신의 돈을 자신들이 신나게 뛰어 놀 어린이 놀이터를 만드는데 기꺼이 기부금으로 낸 것이었다. 그러니 말 그대로 아이들이 이 놀이터를 소유하고 있는(Kids Own Playground) 셈이다.

a 나무판 하나하나마다 기부금을 낸 아이들의 이름이 적혀 있었다

나무판 하나하나마다 기부금을 낸 아이들의 이름이 적혀 있었다 ⓒ 정철용

아이들의 이 자랑스러운 놀이터가 모처럼 만난 단풍을 두고 떠나야 하는 우리의 발걸음을 가볍게 해주었다. 가을빛이 찬란한 마스터톤의 퀸 엘리자베스 2세 공원에 떨어지고 있는 아이들의 해맑은 웃음소리는 은행잎보다 더 환한 황금빛이었다.

덧붙이는 글 | 지난 해 4월 뉴질랜드 북섬의 남서부 해안을 돌아보고 쓴 여행기입니다. 다음 글은 '등대에는 등대지기가 살지 않는다'로 이어집니다.

덧붙이는 글 지난 해 4월 뉴질랜드 북섬의 남서부 해안을 돌아보고 쓴 여행기입니다. 다음 글은 '등대에는 등대지기가 살지 않는다'로 이어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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