철길을 따라 초가을을 만나다

경북 북부 지역의 간이역들을 찾아서 (2)

등록 2005.10.21 14:39수정 2005.10.21 14: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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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천기점 108.2km를 알리는 이정표 뒤로, 옛 반구역 터가 보인다. ⓒ 정국진

나무는 느리다. 지금쯤이면 찬 새벽 공기를 배겨내지 못하고 색을 바꿔야 맞다. 벼는 빠르다. 색을 바꾼 것은 물론이거나와 여름의 빳빳한 직선이 유려한 각을 이룬 지 오래다. 하늘로 뻗다가 지면을 향해 꺾인 곡선은 바람에 그 움직임을 맡긴다.

경북 북부 지역에서 몇 안 되는 들판을 지나 만난 옛 반구역 터에서, 노랑 파랑 이정표 뒤로 느린 나무와 빠른 벼 들판을 바라보았다. 느린 나무라지만, 지금 찾아간다면 색을 바꿨을 일이다. 반구역이 아니라도, 느린 나무들이 하루하루 슬몃슬몃 멋쩍게 색을 바꿔가는 과정을 바라보는 것은 또 다른 즐거움이다.

승문역을 지키는 권재익 할아버지

옛 승문역 역사로 진입하기 위해서는 계단을 올라야 한다. 주변에는 꽃밭이 아름답게 잘 가꿔져 있다. 폐역된 곳이라지만, 누군가가 꾸준히 이곳을 돌보고 있구나 싶다. 아니나 다를까, ‘철도별장’이라는 이름을 단 작은 집이 나타난다. 지붕은 슬레이트이지만, 안쪽은 옛 우리네 살던 그대로다.

앞마당은 낡은 TV와 항아리로 장식되어 있다. 집을 지키는 나무도 잘 가꾸어져 있다. 국기 게양대처럼 생긴 긴 나무기둥 세 개도 앞에 버티어 있다. '기찻길 옆 오막살이, 아기 아기 잘도 잔다' 딱 그 가사 그대로다. 문패는 이 집의 주인을 ‘권재익’이라고 적고 있었다. 주인 계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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옛 승문역 터 옆에, '철도별장'이란 이름이 붙은 집이 있다. '철도별장' 앞은 이렇게 잘 가꾸어져 있다. 승문역이 있었을 때에는 가게로 쓰였던 곳이다. ⓒ 정국진

‘철도별장’이란다. 철도공사 직원 중 한 분이 뜻한 바 있어 별장 삼아 지은 것으로 생각했지만, 나타난 주인은 할아버지다. 권재익 할아버지(78), 열차가 서지 않은 지 삼십여년이 지난 승문역이 이렇게 숨 쉴 수 있는 것은 4년째 이곳을 지키신 할아버지의 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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옛 승문역을 지키는 '철도별장' 주인, 권재익 할아버지(78). "사람 좋은 할아버지의 웃음 속에, 60년대 활기찼을 승문역이 보인다." ⓒ 동호회 열차사랑 '열차지기'

"저번에도 울산에서 대학생들이 와서 인터뷰해주고 그랬었지, 한 번 더 해줄까?"
"지금은 이래도, 이쪽엔 집이 100여 채 넘게 있었지. 여긴 참 외진 곳이라서 교통수단이 전혀 없어서 열차를 세워달라고 간청을 해서 겨우 열차가 여기 멈출 수 있게 되었지."
"저기에 감나무가 많았어. 마을 사람들이 장에 팔러 나가려고 이 역에서 기차를 많이 탔단 말야. 그런데 여기서 나는 감은 워낙 맛이 좋다는 소문이 난거야. 저 멀리 동해에서까지 열차를 타고 이 역까지 와서 감을 사가곤 했어. 많으면 120명 가까이 내렸었지. 그러니까 여기 근처에 좌판이 생기고, 가게도 두 개나 있었어. 하나는 헐렸고, 나머지 하나가 바로 이 집이지. 그때 여기 이쪽이 가게였고, 이쪽은 주막이었고, 저쪽은 부엌…"

처가가 이쪽에 있었다니 여기에서의 추억은 오죽하시겠는가. 사람 좋은 할아버지의 웃음 속에, 60년대 활기찼을 승문역이 보인다. 40여년 전 당신이 열차를 타고 승문역에 내리면, 지금은 창고로 쓰이는 옛 승문역사 안에서 당신을 기다리는 아내를 보면서 바로 그렇게 웃음지었을 터이다. 그리고 당신은, 지금은 당신의 홀로집이 되어버린 그곳에서 당신의 아내와 술 한 잔 했을는지도 모르고.

40년 후, 지금의 당신은 승문역 폐역 후 버려진 이 집을 철도별장이라 이름지었다. 당신은 이쪽에는 봉숭아를, 저쪽에는 무궁화를, 그리고 또 다른 꽃을 가꾼다. 낡은 TV와 항아리를 예쁘게 쌓아올린 것도 당신이다. 여기를 가꾸면서 생긴 돌로 탑을 만들었다. 길 아래쪽에서 여기까지 오르는 계단을 직접 만들고 그 수까지 알고 계신다. 또 당신은 국기 게양대에 태극기와 새마을기를 단다. 그리고 남은 한 곳에는, 딸이 살고 있는 미국의 성조기를 단다. 자식사랑이다.

당신은 지금, 역시 당신이 가꾼 벤치에 앉아서, 뉘엿뉘엿 서쪽을 향하는 햇빛을 반사시키는 서천을 바라본다. 외로움 속에도 당신을 지키는 힘이 바로 낭만(浪漫)이다. 나는 그 낭만이, 내가 다시 이곳을 다시 찾을 때까지 당신을 계속해서 지켜주기를 바라며 승문역을 떠나야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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옛 승문역 역사는, 지금 창고로 쓰이고 있다. ⓒ 정국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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옛 승문역 터에 있는 플랫폼 위에 사마귀 한 마리가 앉았다. 사마귀가 앉아 있는 여기를, 불과 몇십년 전에는 사람들이 오르고 내릴 때 디뎠을 것이다. ⓒ 정국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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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수역과 평은역 역사(驛舍). 역사에 바싹 붙어 선 역목(驛木), 50년대에 만들어진 역사까지, 쌍둥이 같은 모습을 보인다. ⓒ 정국진

쌍둥이역, 평은역과 문수역

평은역은 문수역과 판박이다. 열차가 하루 상하행 각각 두 편씩 네 편이 멈춘다는 것, 하지만 그나마도 면 소재지에서 약간 거리가 있어 하루에 여기를 찾는 여객은 한두 명에 불과하다는 것이 그렇다. 하지만 그럼에도 이 역들이 승문역처럼 폐역되지 않을 수 있는 이유는, 화물열차로 벌어들이는 수입이 짭짤하기 때문이다. 그것조차 없다면? 여튼간, 두 역의 공통점은 또 있다. 역사에 바싹 붙어 선 역목(驛木), 50년대에 만들어진 역사까지.

청량리에서 출발했으니 부전역까지는 아직 절반이나 남은 열차가 평은역에 멈추지 않고 그냥 지나간다. 뒤로 석산(石山)의 속살이 보인다. 그리고 열차와 석산의 사이에, 왜소한 평은역이 위태로워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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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량리에서 출발했으니 부전역까지는 아직 절반이나 남은 열차가 평은역에 멈추지 않고 그냥 지나간다. 뒤로 석산(石山)의 속살이 보인다. 그리고 열차와 석산의 사이에, 왜소한 평은역이 위태로워 보인다." ⓒ 정국진

이러한 예감은 괜한 것이 아니었다. 평은역 앞을 흐르는 내성천은 승문역 앞을 흘렀던 서천과 만나 보문역과 미산역에서 보았던 내성천을 이룬다. 역시 여기도 수량은 많지 않은데, 54년 이 지역에 엄청난 홍수가 닥친 모양이다. 한국전쟁의 상흔이 채 가시지 않은 때의 일이다. 물은 평은역도 덮쳤다. 그리고 또 50여년이 지난 지금, 물이 또 평은역을 덮칠지도 모른다. 이번에는 자연이 아니라 인간에 의해서다. 수자원공사는, 여기서 멀지 않은 용혈리라는 곳에 ‘송리원댐’을 지을 예정이다. 댐을 짓게 되면 사라질 평은역과 채석장, 이곳의 풍경들, 그리고 이곳의 풍경을 배경삼아 살아가는 사람들…

그것을 아는지 모르는지 평은역은 평화롭다. 낡은 철제 구조물 안에 집을 지은 벌들도, 61년 12월 31일 이후 이 역의 일부가 되어버린 재물조사필도, 수동식 선로전환기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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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1년 12월 31일 이후 평은역의 일부가 되어, 40여년간 쭈욱 이곳을 버틴 '재물조사필'. ⓒ 정국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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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은역 어딘가에 아무렇게나 버려진 철 구조물도, 벌들에게는 소중한 보금자리가 될 수 있다. ⓒ 정국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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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은역에서 채석장으로 향하는 철길에 낡은 수동식 선로전환기가 보인다. ⓒ 정국진

간이역에 바치는 헌사

사라질지도 모르는 평은역은 오늘 내가 머물렀던 곳들을 상징한다. 늦여름과 초가을의 사이, 나는 낙동강의 상류를 끼고 지나는 옛 역들을 찾았다. 풍경이 있었고, 사람이 있었다. 사람들의 이야기가 있었다.

옛 간이역들은 KTX의 패배자다. KTX는 빠른 속도로 흘러가는 21세기 각박한 현대 사회이다. 느린 속도의 옛 간이역들이 이겨낼 수가 없다. 하지만 간이역이 없었다면, 간이역에서 열차를 오르내리던 사람들이 없었다면 KTX도 없었다.

나는 이렇게 그곳의 자연과 함께하던 간이역에, 그곳의 사람들과 함께 하던 간이역에, 20세기의 대한민국과 함께하던 간이역에 심심한 헌사를 바친다.

 

덧붙이는 글 | 열차사랑(http://ilovetrain.com) 동호회의 모임을 통해 10월 8일 다녀온 곳들입니다. 같은 누리집의 [회원답사기]에 정모후기 형식으로 연재하였으며, 싸이월드 페이퍼 '몽상(夢想)하는 리얼리스트의 인。문。학 이야기'(http://paper.cyworld.com/realistbydream)에도 올릴 예정입니다. 

10월 여행 이벤트 기사입니다.

덧붙이는 글 열차사랑(http://ilovetrain.com) 동호회의 모임을 통해 10월 8일 다녀온 곳들입니다. 같은 누리집의 [회원답사기]에 정모후기 형식으로 연재하였으며, 싸이월드 페이퍼 '몽상(夢想)하는 리얼리스트의 인。문。학 이야기'(http://paper.cyworld.com/realistbydream)에도 올릴 예정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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