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we가 stranger 데스까?"

한국인이든 일본인이든, 중요한 것은 '정'이랍니다

등록 2005.10.22 10:02수정 2005.10.22 16: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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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효연

홍콩에 정착한 지 벌써 반 년이 지났습니다. 좌충우돌 부딪치며 하루하루 바쁘게 살다보니 시간 가는 것도 잊고 살아온 듯합니다. 홍콩에 오기 전 크게 우려했던 것과는 달리, 적당한 해방감과 낯선 생활이 주는 신선함 등이 삶에 활력소가 되면서 생각보다 외국생활에 재미를 느끼면서 잘 살아온 것도 같구요. 하지만 문득 문득 외롭다고 느껴질 때가 있습니다.

술 한 잔 마시면서 추억을 얘기하고 싶을 때, 재잘재잘 '한국어'로 마음껏 수다 떨고 싶을 때, 홍콩에서는 흔히 먹을 수 없는 한국 음식을 먹고 싶을 때 특히나 외롭습니다. 그러나 역시 가장 서글플 때는 아플 때입니다.

홍콩에 온 지 얼마 되지 않아 지독한 감기 몸살로 꼼짝을 못할 정도로 아픈 적이 있었습니다. 남편도 해외 출장 중이라서 꼼짝 없이 혼자 앓아야 하는 상황이었지요.


가뜩이나 비싼 홍콩의 병원비(한 번 진료에 2만5000원 가량)를 아끼느라 버티고 버티다가 결국 병원에 가게 되었습니다. 서툰 영어로 손짓 발짓 해 가면서 의사에게 증상을 호소하고 며칠 분 약을 받아 터덜터덜 집으로 오는 길에 왜 그렇게 눈물이 왈칵 나던지요.

'오늘 저녁 아이 저녁은 어떻게 차려주나? 내일 아침은 어떻게 하나?' 일가친척이나 친구라도 있으면 좀 부탁을 하련만 아는 사람이라고는 아이 유치원에서 만난, 당시로서는 별로 친분이 없는 일본 아줌마 몇 명이 고작이었으니까요.

집에 돌아와 도저히 저녁밥을 지을 기력이 나지 않아 그냥 아이와 식빵 한 조각으로 저녁을 해결하려던 즈음 전화벨이 울리더군요. 아파트 옆 동에 사는 메구미씨였습니다. 안나(딸)와 같은 유치원에 다니는 자녀를 둔 일본 엄마들 가운데 비교적 친하게 지내는 아줌마입니다.

아침에 유치원에 아이를 데려다주면서 잠시 인사를 나누던 중 제가 몸이 아프단 것을 알게 되었는데, 아픈 기색이 역력한 저를 보고 아마도 걱정을 많이 한 모양이었습니다. 식사를 어떻게 했느냐고 묻더니 굳이 괜찮다고 하는데도 딸아이와 제 걱정을 하면서 간단하게 저녁 식사를 차려 가져다준다는 겁니다.

몇 번을 사양했지만 지나친 사양도 예의는 아닌 것 같아 주섬주섬 옷을 챙겨 입고 아파트 현관으로 내려갔더니 쇼핑백 가득하게 '한 상'을 차려왔더군요. 사실 대단한 메뉴는 없었습니다. 그냥 평범한 일본의 가정식 상차림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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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효연

감자와 야채를 간장에 넣어 조린 반찬, 일본 된장에 미역을 넣어 끓인 된장미역국, 프라이팬에 볶은 어묵, 옥수수와 야채 버터 볶음, 여기에 피로회복에 좋다면서 우메보시(일식 매실 절임) 한 조각까지 넣었구요. 디저트로 사과 한 알까지 챙겨 넣는 세심한 마음 씀씀이를 보여주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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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효연

처음에 보따리를 풀어보고는 입맛이 확 돌면서 갑자기 식욕이 당겨 그냥 먹어치우려다가 친구의 정성과 배려가 너무 고마워서 오랫동안 기념으로 남겨두려고 배고프다는 아이를 달래가며 한 장 한 장 사진을 찍어 두었습니다. 배부르게 잘 먹은 것은 물론이구요.


정말 아쉬운 것은, 쇼핑백을 건네받으며 "진심으로 고맙다. 정말 나중에 신세를 꼭 갚겠다. 당신은 참 좋은 사람이다" 이런 말로 고마운 마음을 전하고 싶었지만 도무지 말이 통해야 말이죠. 연신 허리를 굽혀 인사하며 입을 떼어보았자 나오는 말이라고는 '땡큐, 아리가도 고자이마스'가 고작인걸요. 그 때 만큼이나 제 빈약한 어학실력이 창피하고 후회된 적도 없을 겁니다.

"눈물이 날 정도로 감동받은 내 마음을 저 이에게 보여주려면 어떤 말이 좋을까?" 내심 고민하다가 퍼뜩 든 생각에, 집으로 돌아가는 메구미씨를 쫓아가 건넨 말은 바로 이것이었습니다.

언제나 그랬듯이 그날도 짧은 영어와 더 짧은 일본어를 섞을 수밖에 없었습니다. (이것은 영어를 잘 못하는 그녀와 일본어를 전혀 못하는 제가 의사 소통을 하는 방법입니다.)
"we가(が) stranger 데스까(ですか)?"(우리가 남이가?)

그날 그녀는 제가 몇 번 설명을 해 주어도 눈만 껌뻑거릴 뿐 저 말의 뜻을 이해하지 못하는 듯했습니다. 저도 더 이상 설명하려고 애쓰지도 않았구요. 그래도 상관없었어요. 그저 행복했고 그냥 따뜻한 마음이었으니까요.

국가와 인종을 떠나서, 일본인이든 한국인이든, 역시 사람 사이의 가장 중요한 것은 '정(情)과 진심(眞心)'이란 것을 다시금 느낀 날이었습니다.

덧붙이는 글 | '멋대로 요리' 이효연의 홍콩 이야기 http://blog.empas.com/happymc

 몇 달 지난 지금도 솔직히 그녀와 저의 어학실력은 별로 진전이 없습니다. 하지만 그 사이 쌓인 우정은 얼마나 도타와졌는지 모릅니다. 사람 살면서 '말'이 전부가 아니란 것을 새삼 느끼는 요즘입니다.

덧붙이는 글 '멋대로 요리' 이효연의 홍콩 이야기 http://blog.empas.com/happymc

 몇 달 지난 지금도 솔직히 그녀와 저의 어학실력은 별로 진전이 없습니다. 하지만 그 사이 쌓인 우정은 얼마나 도타와졌는지 모릅니다. 사람 살면서 '말'이 전부가 아니란 것을 새삼 느끼는 요즘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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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때는 방송에 홀릭했던 공중파 아나운서. 지금은 클래식 콘서트가 있는 와인 바 주인. 작은 실내악 콘서트, 와인 클래스, 소셜 다이닝 등 일 만드는 재미로 살고 있어요. 직접 만든 요리에 어울리는 와인을 고르고 피아노와 베이스 듀오 연주를 하며 고객과 공감과 소통의 시간을 가질 때의 행복이 정말 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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