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밀 같은 사람...아무데서나 자랄 수 없어"

[서평] 캐런 헤스의 <모래 폭풍이 지날 때>를 읽고

등록 2005.10.25 17:35수정 2005.10.26 09: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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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겉표지 ⓒ 생각과느낌

때는 1934년, 주인공 빌리 조가 13살이 되던 해의 1월부터 이듬해 12월까지의 일기로 된 이야기이다. 빌리 조가 사는 곳은 미국의 중남부 초원지대인 오클라호마 주로 작품의 시대적 배경은 제1차 세계 대전이 끝난 후 미국에 불어 닥친 대공황 시기이다. 루스벨트 대통령이 뉴딜정책으로 경제를 재건하기 전, 계속되는 가뭄에다 초원을 밀재배지로 무분별하게 개간하여 발생하는 모래폭풍의 고통까지 가중되었던 시기였다.

오로지 밀농사만을 고집하는 무뚝뚝한 아버지와 늦동이 동생을 임신한 엄마, 한창 감수성이 예민한 사춘기 소녀의 미묘한 심경의 변화들이 담담한 문체의 행간에서도 느껴지며 재미를 더한다.


지은이 캐런 헤스는 쓸쓸하고 냉혹한 현실을 감동적으로 그려내는 솜씨 있는 작가로 인정받고 있으며 <돌고래의 노래>, <리프카의 편지> 등의 작품이 있다.

빌리 조의 아빠 베이어드는 환경의 변화를 받아들이지 않고 오로지 밀농사만을 고집하는 전형적인 농부이고, 엄마 폴리는 빌리 조가 학년 전체에서 1등을 했다는 기쁜 소식을 전해도 마치 빨래줄에 걸린 면보자기에게 말하듯 ‘잘 해낼 줄 알았다’고 끝내는 성마른 성격이지만, 피아노를 연주할 때는 눈이 부실 정도로 멋있는 사람으로 변한다.

비는 내리지 않고 계속되는 모래 폭풍의 고통에 이웃들은 하나 둘 짐을 싸서 서부로 이주하는 어수선한 가운데 빌리 조에게 불행이 닥친다.

아빠가 부엌의 화덕 옆에 가져다 놓은 등유 양동이를 물로 착각한 엄마가 커피주전자에 붓다가 불이 나고, 아빠를 부르러 엄마 뒤를 따라 나가다가 얼른 불붙은 양동이를 집밖으로 버려야 한다는 생각에 다시 부엌으로 가 불붙은 양동이를 현관 밖으로 집어 던지는데, 하필이면 그때 집안으로 들어오던 엄마는 한순간에 불기둥이 되어 버린다.

엄마는 온몸에 중화상을 입고 신음하다 동생을 낳고는 숨을 거두고, 동생마저 바로 엄마 뒤를 따른다. 빌리 조는 손가락 뼈가 훤하게 드러나도록 심한 손의 화상으로 그렇게 좋아하던 피아노 건반을 덮어버릴 수밖에 없었다.


여전히 계속되는 가뭄으로 농사가 엉망이 되자 아빠는 땅을 파는 인부로 취직하고, 새로운 직장을 구하기 위해 야간학교에 다닌다. 점점 말이 없어지는 아빠가 낯설게 느껴지고 사고의 후유증으로 심한 우울에 빠진 빌리 조는 떠나고 싶다는 갈망이 점점 강해져, 어느 날 한밤중에 서부로 향하는 기차를 타게 된다.

황량한 벌판을 덜컹거리며 끝없이 달리는 기차에서 빌리 조는 아내와 세 아들을 친척집에 맡기고 떠나온 아저씨를 만나게 된다. 죽음과 같은 그림자가 눈동자에 짙게 드리워진 아저씨에게 빌리 조는 비스킷을 나누어 준다. 가족을 두고 떠나온 아저씨의 이야기를 듣고 엄마의 죽음과 아빠에 대한 이야기를 들려주면서 서서히 상처가 치유되고 비로소 빌리 조는 아빠의 사랑을 깨닫게 된다.


"아빠는 / 잔디 같은 사람이야 / 흔들림이 없고 / 조용하고 / 깊이 뿌리를 내리지.
삶을 계속하기 위해 / 아빠와 나 그리고 가까이 있는 사람을 지탱하기 위해 / 힘을 비축해 두는 사람이야.
아빠는 / 뿌리를 내리고 있었던 거야 / 내 변덕과 버르장머리에도 흔들리지 않고.
아빠의 슬픔과 내 슬픔이 / 두 배로 내리눌러도 / 아빠는 가정을 지켰어"


빌리 조는 집으로 다시 돌아간다. 역으로 마중 나온 아빠에게 모래폭풍을 벗어나기 위해 떠났지만, 마음속에 있는 중요한 것들을 떠날 수 없었다고 이야기한다.

아빠는 잔디와 같은 사람이지만, 빌리 조는 밀 같은 사람이기에 이곳에서만 자랄 수 있다는 걸 알게 되었다는 것을. 빌리 조는 화상과 엄마의 슬픈 기억으로 중단했던 피아노를 다시 시작한다. 아빠는 정부에서 비상구호기금을 대출해주어 다시 희망을 가지고 농사를 시작하고, 야간학교의 선생이었던 루이즈와 약혼한다.

마지막 일기 ‘길을 찾다’에서 드디어 빌리 조는 희망과 미래를 찾는다.

"돌이켜 보면, 힘들었던 이유는 / 돈이나 / 가뭄 / 모래 때문은 아니었어.
힘을 잃고 / 희망을 잃고 / 꿈을 잃었기 때문이었어.
... / 내가 깨달았듯이, 사람들은 한자리에 / 머물러 / 계속 성장할 수 있을 거야."

덧붙이는 글 | 제  목 : <모래 폭풍이 지날 때>
지은이 : 캐런 헤스 저, 부희령 역
출판사 : 생각과 느낌

덧붙이는 글 제  목 : <모래 폭풍이 지날 때>
지은이 : 캐런 헤스 저, 부희령 역
출판사 : 생각과 느낌

모래 폭풍이 지날 때

캐런 헤스 지음, 부희령 옮김,
생각과느낌, 20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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