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무현 대통령은 지난 30일 청와대 출입기자단과 함께 북악산 정상에 올라 기자들과 간담회를 열었다. 노 대통령은 이 자리에서 "내년 1~2월께 국정운영구상과 내 진로에 대해 밝히겠다"고 말해, 다양한 정치적 해석을 낳고 있다.연합뉴스 백승렬
노무현 대통령이 또 '깜짝 카드'를 준비하고 있는 걸까? 언론의 오늘 촉각은 모두 여기에 맞춰졌다. 노 대통령이 어제 청와대 출입기자들과의 오찬간담회에서 "내년 초에 내 진로를 밝히겠다"고 언급했기 때문이다.
청와대는 부인하고 있다. 김만수 대변인은 "한국의 내일에 대한 얘기를 어떻게 풀어가고 해결할 것인가를 염두에 둔 것"이라고 선을 그었다.
청와대가 설명한 바는 '국가의 진로'이지 "내 진로"가 아니다. 그래서 얼핏 들어선 연결이 안 되는 것 같지만 꼭 그렇지도 않다.
노 대통령은 어제 산에 올라 "캐나다의 멀로니 총리는 당을 몰락시켰지만 나라를 구했다"고 말했다. 미래의 국가과제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정파의 이해를 떠나야 한다는 말이다.
그래서 언론은 '탈당 후 거국내각' 카드를 점치고 있다. <경향신문>은 노 대통령이 열린우리당 지도부 사퇴 소식을 전해들은 뒤 "내가 원래 혼자서 정치를 해왔다. 탈당해서 거국내각을 만들면 된다"고 말했다고 보도했다. "여권의 한 핵심관계자"의 입을 빌린 보도다.
사실일까? 그리 녹록해 보이지 않는다. 전혀 상반된 발언과 보도도 쏟아지고 있다. 노 대통령은 이해찬 총리와는 같이 일하겠다고 밝혔다. 천정배 법무장관의 유임도 기정사실처럼 보도되고 있다. 이 두 사람은 한나라당과 척을 지고 있는 사람들이다.
게다가 <동아일보>는 10·26재선거에서 낙선한 이강철·이상수씨가 입각할 것이란 보도도 내놨다. 노 대통령의 장관 기용방식을 봐선 꽤 설득력 있는 분석이다.
이런 사례들은 한나라당의 거국내각 참여를 가로막는 요소들이다. 자신들을 '차떼기 당'이라고 대놓고 비난하는 총리와 함께 거국내각을 구성한다는 것은 한나라당으로선 상상하기 어렵다.
'탈당 후 거국내각' 카드를 점치는 언론
그뿐이 아니다. 노 대통령은 "내 진로"를 표명하는 시점으로 내년 초부터 2월 25일 사이를 꼽았다. 이 시점은 지방선거를 목전에 둔 시점이다. 양강 구도를 형성한 박근혜 대표와 이명박 서울 시장으로선 대선의 교두보인 지방선거에서 자파 인사를 최대한 공천하기 위해 물밑 암투를 치열하게 벌일 수밖에 없는 시기다.
이런 상황에서 한나라당이 거국내각에 선뜻 응할까? 그렇지 않을 가능성이 현재로선 더 높다.
그래서일까? '탈당 후 거국내각' 카드를 가장 강도 높게 보도한 <경향신문>이 점친 거국내각 방안은 '소연정-민주연정'이다. 며칠 전 <경향신문>이 보도했다가 청와대가 부인한 적이 있는 카드다.
그런데도 <경향신문>은 왜 '소연정-민주연정'에 대한 시선을 거두지 않는 걸까? 노 대통령이 '거국내각'을 염두에 두고 있다면 현실적으로 모색할 수 있는 유일한 방안이기 때문이다.
민주당과 민주노동당을 거국내각에 끌어들일 수 있는 카드는 있다. 바로 선거구제 개편이다. 미세한 차이는 있지만 소선거구제를 어떤 식으로든 중대선거구제로 개편하고, 정당명부제를 도입해야 한다는 데 대해서는 여권과 민주-민노당의 입장은 같다.
선거구제 개편은 분명 민주-민노당을 추동할 수 있는 가장 유효한 수단이지만, 만병통치약이 될 수는 없다. 민주-민노당이 쉬 움직일 수 없는 요소도 많다.
10·26 재선거 후 민노당은 노동자층의 지지를 재결집해야 하는 과제를 안게 됐다. 민노당 스스로 인정했듯이 비정규직 문제나 노동계 비리 문제 등에서 노동자들의 '감동'을 자아내는 데 한계가 있었기 때문이다.
민노당이 노동자층의 이반 현상을 극복하기 위해선 노동계 최대 현안인 비정규직법, 노사관계 로드맵 등에서 선명투쟁을 하는 모습을 보여야 한다.
하지만 노 대통령은 어제 이런 말을 남겼다. "가장 선도적으로 노조를 하는 회사에 가보면 정규·비정규직이 식사도 다른 데서 하고 샤워도 다른 데서 한다."
노동운동의 '귀족화'를 비판해온 이전의 발언과 같은 맥락의 말이다. 그래서 양대 노총과 각을 세워온 노동정책을 바꿀 의사는 없어 보인다.
이런 상황에서 민노당이 거국내각 구성에 동의할까? 물론 타협의 징후가 없는 건 아니다. 이해찬 총리가 양대 노총 위원장을 만나 노정관계 복원 방안을 논의한 일이 있다. '국민통합 연석회의' 제안 직전의 일이다. 참여정부가 '새로운 모색'에 나선 것으로 이해할 수도 있는 장면이다.
그러나 양대 노총은 '국민통합 연석회의' 참여를 사실상 거부한 상태다. '새로운 모색'이 현재로선 '일방적 구애'를 벗어나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민주당도 노 대통령이 내미는 손을 덥썩 잡을 이유가 별로 없다. 민주당을 깨고 열린우리당을 창당한 경험은 잊는다 치자. 호남지역에서 열린우리당에 빼앗겼던 '지지율 1위'를 최근 되찾은 상태다. 이 여세를 내년 지방선거로 이어가 대선의 발판을 마련해야 한다. 그러기 위해선 열린우리당과의 '한판 싸움'은 불가피하다.
과연 탈당의 당위성이 있을까
선거구제 개편의 '후광'은 3년 뒤의 일이지만 지방선거는 정치적 지분 크기를 좌우하는 당장의 일이다. 게다가 그 사이에 대선이 있고, 이때 정계가 어떻게 개편될지는 아무도 모른다. 장기투자를 하기엔 당장의 지출 요인이 너무 크다.
정치공학적 측면에서 볼 때 '탈당 후 거국내각', 특히 '소연정-민주연정' 카드는 성사 여부를 점칠 수 없는 안개 속의 카드다. 그렇기에 지금 시점에서 '~이다'는 고사하고 '~일 수도 있다'는 전망마저 신중을 기해야 할 판이다. 관련해서 청와대는 이미 '소연정-민주연정'카드를 검토한 적이 없다고 공식 부인한 바도 있다.
그리고 또 하나. 이런 공학적 분석보다 우선해야 할 당위적 지적이 있다. '거국내각' 이전에 '탈당'의 당위성이 있는가를 따져야 한다.
민주정치는 정당정치요, 정당정치는 책임정치라는 정치원론에 입각할 때 노 대통령의 탈당은 정당성을 가질 수 없다. 게다가 민주당을 깨고 열린우리당을 창당한 주역이 다시 열린우리당을 박차는 행위를 이해할 국민이 얼마나 있을지도 따져야 한다. 입장이 다르고 가는 방향이 다르다고 그때마다 당을 깬다면, 노 대통령은 이전에 '구국'을 외치면서 당을 깼던 여러 '선배 정치인'들과 '동급'이 될 수도 있다.
공자님 말씀이지만 때론 공자의 가르침이 재조명되는 일도 있는 법이다.
저작권자(c) 오마이뉴스(시민기자),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
오탈자 신고
기사를 스크랩했습니다.
스크랩 페이지로 이동 하시겠습니까?
연도별 콘텐츠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