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때는 깃발이 가장 부러웠어요"

[이사람] 장연희 나라사랑청년회 회장

등록 2005.10.31 19:27수정 2005.11.01 11: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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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는 청년회에 은혜를 입었다고 생각해요."


장연희씨는 청년회에 들어와서 받은 사랑과 믿음이 자신을 키워준 거름이기에 보답하는 마음으로 살고 있다. 그래서일까. 그는 바쁜 것이 마음이 편하고, 가끔 힘든 일이 생겨도 '내가 할 일이 생겼구나'하는 마음에 설레기까지 한단다.

녹음기에 말소리 못지 않게 웃음소리를 녹음시키던 장연희씨. 그는 사람이 자신의 현실과 세상을 어떤 눈으로 바라보는지에 따라 웃음과 눈물이 결정된다는 것을 보여주는 사람이다.

10년간 그의 삶을 한마디로 정리하면 '꿈을 실천하는 억척녀'라고 해야겠다. 전남 진도의 가난한 시골마을에서 2남 4녀 중 위로 오빠, 아래로 남동생 사이에 태어난 그는 어려운 집안형편 때문에 하고 싶은 공부를 포기해야 했다.

자신이 뱃속에 있을 때부터 병환을 앓으시던 아버지 대신 집안을 책임져야 했던 어머니는 장연희씨까지 공부시키기에는 버거웠다. 국어선생님의 꿈을 포기하고 들어간 실업계 고등학교에서 국어, 영어가 아니라 주산, 부기를 배워야 했던 현실이 절망스럽기까지 했던 그는 2학년 3월에 과감히 자퇴를 결정했다.

"꿈이 없었어요. 이대로는 안 되겠다는 생각이 들더라구요. 3개월에 걸쳐 부모님과 선생님을 설득하고 봄에 서울로 올라갔어요."


단돈 10만원을 들고 일가친척 하나 없는 서울로 올라온 그를 향해 사람들은 '일주일도 못 견디고 내려올 것'이라고 했지만 어머니는 '독하게 살아야 한다'며 그를 다독였다. 서울생활이 힘들 때마다 버스 타는 곳까지 따라나서 어깨를 두드려주던 어머니의 기억을 떠올리며 눈물을 삼켰다.

방 보증금 100만원을 벌기 위해 5개월간 동사무소에서 주는 점심 한 끼로 하루를 견디기도 했다. '허기'로 허둥지둥 밥을 먹던 그때 습관이 아직도 남아 지금도 밥을 빨리 먹는다는 장연희씨. 돌덩어리도 씹을 18살에게 하루 한 끼는 참기 힘든 일이었음이 틀림없다.


늘 채워지지 않던 허기였지만 그는 절망하거나 고개 숙이지 않았다. 허기를 채울 다른 먹거리를 찾아냈기 때문이다. 배고프고 외롭던 서울 생활의 버팀목이 되어준 곳은 '서점'이었다. 힘들 때면 찾아가던 서점에서 만난 김남주 시인의 시집. 그는 김남주 시인이 보여준 새로운 세상에 무섭도록 심취해 갔다.

"제가 알고 있는 세상이 전부가 아니라는 것을 그때 알았어요. 김남주 시인의 책 뒤에 소개된 책들을 다 사서 읽고 또 그 책들에 소개된 책들을 읽고…. 그렇게 새로운 세상을 알아갔고 외로움을 이겨갔죠."

신문에서 박종철 열사의 추모제가 있다, 혹은 무슨 집회가 열린다 하는 소식을 접하면 혼자 찾아가보곤 했던 그에게 가장 부러웠던 것은 '깃발'이었단다. 항상 혼자였던 그에게 깃발은 '함께'를 상징했기 때문이다. 대학에 들어가면 꼭 깃발 아래 서보겠다는 희망을 품었지만 그것도 쉽지 않았다. 억척스럽게 2년을 보내고 서울예전 문예창작학과에 입학했지만 변함없는 생활고로 저녁이면 아르바이트로 학비와 생활비를 벌어야 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새로운 세상을 향해 펄럭이는 깃발과 함께 있고 싶은' 그의 희망은 또 다른 길로 그를 안내하기도 했다.

"주점에서 아르바이트를 했는데 그때 나라사랑청년회 분들을 알게 되었어요. 일주일에 두세 번씩은 오는데 올 때마다 반갑게 인사하고 언제나 진지하게 토론하던 모습에서 '아, 참 애국적으로 사는 분들이구나'하는 생각을 하게 됐죠."

대학을 졸업하는 22살 되던 1999년 9월 1일 장연희씨는 나라사랑청년회에 가입했다. 누구보다 자기 삶에 열심이던 그였지만 그토록 하고 싶었던 일이어서인지 청년회에서 그는 정말 대단했다. 어린 나이여서 남다른 어여쁨을 받았다고 쑥스러워하지만 누구나가 '정말 열심히 하는 회원입니다'하고 추천할 정도로 그는 청년회 생활에 '에누리'가 없었다.

a 나랑사랑청년회 회원들과 함께. 맨 왼쪽이 장연희씨.

나랑사랑청년회 회원들과 함께. 맨 왼쪽이 장연희씨. ⓒ 박준영

그렇게 6년을 처음처럼 보낸 그는 이제 나라사랑청년회를 책임지는 회장이다. 28살이라면 '세대교체'라고 할 정도로 젊은 회장이다. 높아지는 정세의 요구, 하지만 일꾼이 부족한 현황에서 맡게 된 회장이기에 더욱 막중한 책임감을 느낀다.

사랑모임(청년회 소모임)에 참가해 회원들과 함께하고 싶은 마음은 굴뚝같지만 회장이다 보니 여기저기 회의에 쫓기다 보면 시간이 부족해 안타까운 마음 가득하고, 월차 한번 내려면 잘릴 각오를 해야 하는 근로조건 때문에 괴로워하는 회원들을 보면 마음이 아프고, 사업이 정세의 요구에 맞게 좀더 새롭게 참신하게 계획되지 않을 때 답답하긴 하지만 그래도 장연희씨는 청년회가 있어 행복하고 기쁘단다.

이제 '청년회가 삶'이 되어버렸다는 그에게 청년회는 '작은 돌멩이에 불과하던 자신을 보석으로 가꿔준' 곳이고 청년회가 있어 서울이 또 하나의 고향이 되었단다.

"통일된 조국을 청년회에서 맞이하고 싶습니다."

그가 청년회에 들어오면서 한 말이다. 그런데 그는 지금 자신의 바람이 실현되는 것을 목격하고 있다. 추상적으로만 그리웠던 북과 해외 동포들이 이제는 북의 누구, 해외의 누구를 향한 구체적인 그리움이 되었고 미선이 효순이, 전쟁반대 서명판 앞에 줄을 서는 시민들을 만나게 된 현실이 눈앞에 펼쳐진 것이다.

자신을 끊임없이 믿어줬던 청년회 선배들의 믿음이 자신을 변하게 했다는 그는 자신 또한 비판보다는 믿음을 앞세우는 청년회 일꾼이 될 결심이다. 18살 힘든 시절, 책이 기댈 어깨가 되어주고 새 세상을 알려준 것처럼 '누군가의 가슴에 따뜻함과 힘을 주는 글을 쓰고 싶은' 장연희씨는 지금도 새 세상으로 향하는 길에서 기꺼이 동반자가 되어준 청년회에서 자신 또한 주저하는 후배들의 동반자가 되기 위해 지금도 열심히 자신을 가꾸고 있다.

덧붙이는 글 | 이 글은 자주민보에도 게재되었습니다.

덧붙이는 글 이 글은 자주민보에도 게재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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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권자전국회의에서 파트로 힘을 보태고 있는 세 아이 엄마입니다. 북한산을 옆에, 도봉산을 뒤에 두고 사니 좋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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