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름다운 사람들과 함께한 아름다운 가을잔치

경기도 가평 개곡분교 권영환 선생님께

등록 2005.11.01 15:30수정 2005.11.01 16: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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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 서예가 권영환 선생님이 쓰신 한글체

서예가 권영환 선생님이 쓰신 한글체 ⓒ 김선호

선생님, 고생 많으셨습니다. 3일 동안(10월 28일 ~ 30일) 아침부터 밤까지 행사일정을 치르시느라 힘이 드시진 않으셨는지요? 그래도 작년에 뵈었을 때보다 올해 훨씬 더 건강해보여서 다행이었습니다. '문닫은 학교' 개곡분교의 자취 대신 '아름다움 만들기'라는 공간으로 새롭게 태어난 개곡분교를 꼭 1년반 만에 찾았습니다. '아름다움 만들기'라는 문패가 한때 아이들의 배움터였던 곳에 대한 최대한의 예의처럼 보였던 것은 어디까지나 선생님의 세심한 배려가 있었기에 가능했을 거라 생각합니다.

지금도 믿기지 않는 일은, 글씨를 쓰는 사람에게 치명적인 오른팔을 잃은 후, 또 온전치 않은 왼손으로 글씨를 쓰기까지 어떤 세월이 있었을까 하는 점입니다. 그 신고의 세월을 아무리 헤아려 보아도 믿기지가 않건만 선생님은 그간에도 아름다운 우리 글자체를 작품으로 남겨 놓았더군요.


a 천연염색으로 물들인 이혜화님의 작품들

천연염색으로 물들인 이혜화님의 작품들 ⓒ 김선호

이번엔 지난번에 놓친 오른손이 온전했을 때 쓰신 작품을 보았는데 어쩐지 저에겐 왼손으로 쓰신 요즈음 글씨들이 훨씬 마음에 들었습니다. 그 가지런한 글씨를 불편한 왼손으로 쓰시고 계실 선생님을 생각하면서 스스로 게을러지려는 마음에 채찍을 가합니다.

선생님, 이번이 두번째 가을 잔치였다지요? 개곡분교 주변 마을주민분들과 함께 씨앗을 뿌리고 친환경농사를 지으셔서 수확한 것들을 함께 나누는 소중한 자리에 초대해 주셔서 정말 감사드립니다. 정성들여 땅을 일구시고 자연에 감사한 마음으로 수확한 것들로 차린 잔치마당은 참으로 풍요로웠습니다. 직접 떡메를 쳐서 만든 인절미며, 마을 어른들이 만든 손두부와 싱싱함이 그대로 느껴지던 갓 담은 김치, 잔치를 위해 마을 분들과 잡은 돼지고기 편육에 따끈한 팥죽 한 그릇까지. 하나하나 정성과 사랑이 담긴 음식들은 고향의 맛을 충분히 느끼게 해 주었습니다.

a 널을 뛰고 있는 아이들

널을 뛰고 있는 아이들 ⓒ 김선호

사실, 각 지방마다 축제가 넘쳐나는 요즈음입니다. 그 축제들이 대체로 판에 박은 듯이 비슷하게 치러지는 것을 보면서 안타까웠는데 '가평 아름다움 만들기'의 가을 행사에는 질박한 아름다움이 있었습니다. 선생님이 염원하신 공동체의 원형을 어렴풋이 보았다고나 할까요? 마을 분들이 공동체를 이루어 함께 농사짓고 공동으로 수확한 것들을 저희와 같은 도시 사람들을 초청해 함께 나눠 먹고 '생명'과 '환경'과 '평화'와 '통일'을 얘기하는 자리를 마련하신 까닭을 다시금 생각해 보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참, 개곡분교의 재롱둥이 '몽실이' 소식은 정말 안 되었습니다. 독사에 물려서 시름 시름 앓다 죽었다구요. 아이들도 마음 아파했습니다. 작년에 염색체험과 더불어 가장 기억에 남는 일이 몽실이랑 놀았던 일이라며 개곡분교 강아지를 못 잊어 했거든요. 선생님, 아이들을 위해 다시 강아지 한 마리 데려다 놓으면 좋겠습니다. 선생님이 가시는 걸음마다 운동장에서 전시실로 또 숙소로 향하는 작은 오솔길을 졸랑거리며 따라 가던 몽실이의 귀여운 걸음이 저도 많이 생각납니다.

a 짚으로 만든 달걀꾸러미

짚으로 만든 달걀꾸러미 ⓒ 김선호

아이들은 마냥 즐겁게 뛰어 놀았습니다. 한때 아이들의 운동장이었으니 그곳이 아이들의 차지가 되었던 것은 당연한 일이었겠지요? 선생님도 그런 모습을 흐뭇하게 바라보셨지요? 얼결에 평소의 습관대로 '하지마라'라는 말에 선생님으로부터 된통 호통을 받고 말았네요. "제발 아이들한테 '하지마라'라는 말은 쓰지 마세요"라고 하셨지요.


집짓고 난 작은 나무토막들을 모으셔서 그것에 줄을 매달고 거기에 그림을 그려 놓으니 멋진 목걸이도 되고 핸드폰 줄로도 손색이 없습니다. 아이들은 그것을 제방 앞에다 걸어놓고 들여다 보며 즐거워합니다. 쓰고 난 나무토막이 하나의 '작품'으로 탄생한 것이 너무 신기하답니다. 거실 가운데 붙여놓은 사인펜 그림은 우리집 두 아이 얼굴과 매우 흡사하게 그려준 이동수 화백님의 작품입니다. 그림을 그리면서 뭐가 될 것인지를 묻고는 그 꿈을 꼭 이루라는 문구를 새겨 넣으셨습니다.

a 개곡분교의 뒷간

개곡분교의 뒷간 ⓒ 김선호

무엇보다 아이들이 재밌어 했던 것은 '불장난'이었답니다. 저녁참에 고구마와 밤을 굽기 위해 마당 한 편에 피워놓은 모닥불에서 아이들은 떠날 줄 몰랐습니다. 불을 피우는 일이 아이들을 즐겁게 하는 뭔가가 있었을까요, 아니면 그런 구경이 쉽지 않아서였을까요? 하긴, 저 어렸을 때만도 아궁이에 불 때는 광경을 매우 흔하게 보았던 것 같은데 작은 시골 동네에도 기름보일러가 놓이는 요즈음은 불 때는 광경을 구경하기 쉽지 않게 되었습니다.


모닥불이 신기한지 연신 불을 뒤집고 마구 장작을 집어 넣어 불을 꺼뜨리곤 하다가 다시 불길이 오를 때마다 환호성을 지르며 좋아하더군요. 어른들은 '불장난 하면 자다가 오줌 싼다'고 점잖게 타이르면서도 아이들이 좋아하는 모습에 오히려 흐뭇한 웃음을 짓곤 했지요.

그러고 보니 이번 행사제목이 '우리들의 꿈 바람전'이었네요. 운동장 가득 쏟아져 내리는 가을 햇살을 가르며 뛰어 노는 아이들, 공동체를 이루어 농사를 짓고 함께 나누는 가운데 생명과 환경을 이야기하는 자리를 마련한 이번 행사의 취지는 그렇게 자연스럽게 영글어 가고 있었습니다.

a 개곡분교 뒷간에서 보이는 풍경

개곡분교 뒷간에서 보이는 풍경 ⓒ 김선호

속속 손님들이 마당으로 들어설 때마다 선생님은 불편한 오른팔과 온전치 못한 왼손을 내밀어 악수를 청하시고 아이들을 일일이 안아 주셨습니다. 그리고 그들에게 선생님이 마련하신 전시실 작품들을 소개하고 설명해 주셨지요. 선생님께서 틈틈이 쓰신 서예 작품들과 부인이신 이혜화 선생님의 염색공예작품들이 자연스러운 조화를 이루며 정갈하게 놓인 작은 전시실.

그리고 지난해 왔을 때 옛 방식 그대로 집을 지을 거라던 그곳에 아늑한 여행자용 침실이 놓여 있었습니다. 황토염색을 한 침구류며 창호지를 바른 여닫이문에 들보가 들여다보이는 천장에 선생님의 섬세한 손길이 여기 저기 묻어나는 것만 같았습니다.

'참 목수'를 만나기가 어렵다고 하셨지요. 전통적인 것, 환경지향적인 것들이 하나 둘 사라져 가는 것 같아 안타깝다고 토로하신 선생님의 말씀에 공감합니다. 사라져 가는 그것들을 마을공동체를 통해서 하나씩 살려 나가시려는 선생님의 노력에 경의를 표합니다.

a 쓰다 남은 나무토막에 그림을 그리니 멋진 목걸이 완성!

쓰다 남은 나무토막에 그림을 그리니 멋진 목걸이 완성! ⓒ 김선호

'장애인 공동체와 함께하는' 행사 취지에 걸맞게 전시실 한 편엔 장애인들이 직접 만든 공예품들이 전시되어 있었습니다. '이 작품들이 장애인들이 만든 작품인거 맞아?' 하고 반문한 저 역시도 장애인들에 대한 편견이 없지 않았음을 시인합니다. 그런 저에게 이번 행사는 장애인들과 더불어 즐거운 한 때를 보내며 그들 또한 평범한 우리 이웃과 다를 바 없다는 것을 깨닫게 된 계기가 되었습니다.

저는 달걀 꾸러미 만들기가 가장 인상적이었습니다. 짚을 엮어서 달걀 꾸러미를 만드는 일이 처음이라 쉽지 않았습니다. 가르쳐 주시는 강사 분을 따라 흉내를 내 보았지만 처음엔 실패였습니다. 두번째는 그럴 듯하게 만들어서 '스승을 능가했다'라고 가르쳐 주신 분이 농담삼아 얘기를 건넬 만큼 깔끔한 달걀꾸러미를 만들어 냈지요. 그뿐만 아니라, 나중에 오신 분들께는 제가 직접 시범을 보이고 한수 가르쳐줄 정도로 기술이 늘었답니다.

a 풍물패의 공연에 어깨춤이 절로 나고

풍물패의 공연에 어깨춤이 절로 나고 ⓒ 김선호

일일이 꾸러미를 만들어 달걀을 넣어야 하는 방식은 시간도 많이 들고 번거로운 일이었습니다. 그러나 시간과 번거로움에도 불구하고 그렇게 만든 달걀꾸러미는 아이들 눈길을 사로잡을 만큼 예쁜 작품이 되어 주었습니다. 달걀꾸러미를 만들며 어른들은 아이들에게 짚이 되는 과정과 그 쓰임새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곤 했습니다. 그 모습이 참 보기 좋았지요. 아이들은 바구니도 되고 소먹이도 되고 땔감이 되기도 했으며 나머진 퇴비가 되기까지 하나 버릴 게 없는 짚의 무궁무진한 쓰임새에 새삼스럽게 놀라기도 했구요.

화장실이 어디냐고 묻는 아이들을 데리고 운동장 위로 난 계단을 올라 선생님의 숙소 맞은편 '뒷간'으로 데려갔습니다. 도시의 수세식 변기에 익숙한 아이들에겐 옛날 방식의 푸세식 뒷간이 매우 낯설었는지 처음엔 무서워하더군요. 아, 그런데 개곡분교의 푸세식 화장실은 그 유명한 선암사 뒷간에 못지 않았습니다. 다만 규모만 작을 뿐, 앉아서 일을 보는 눈높이에 맞춰 앞쪽이 뚫린 뒷간은 개곡분교 앞마당과 그 건너 앞산이 다 건너다 보였습니다.

그곳에 가을이 깊어있었습니다. 지난 여름 비오리들이 헤엄치며 놀던 개울가는 꽃핀 갈대들로 무성하고, 개울 너머 추수를 끝낸 논배미엔 가지런히 낟가리가 쌓여 있었습니다. 논이 끝나는 곳엔 빨갛게 단풍든 나무들이 한 줄로 나란하고 그 건너엔 잣나무가 푸르게 군락을 이룬 앞산이 물결치듯 능선을 이루고 있었습니다. 개곡분교 뒷간에 보이는 풍경이 그리 아름다우니 선생님이 지은 뒷간이야말로 개곡분교의 명물입니다. 뒷간을 나오다 나란히 놓여 있는 플라스틱 통을 발견한 아이가 '이게 뭐냐'고 물었습니다. '똥통', '오줌통'을 아이가 보았던 것이지요.

a 공동체를 꿈꾸는 달걀꾸러미

공동체를 꿈꾸는 달걀꾸러미 ⓒ 김선호

숙소와 뒷간 사이 두 그루 커다란 전나무 아래서는 닭들이 노닐고 있었습니다. 닭들이 노는 양을 재밌게 지켜보고 있는데 마당에 풍물패의 농악놀이가 막 벌어지더군요. 최근에 장구의 기본 장단을 익히고 있는 아이가 얼른 가보자며 제 손을 이끌었습니다. 잔치마당에 풍물패가 빠질 수 없겠지요. 뭐니 해도 우리 가락이 흥겹습니다. 아이들도 장단에 맞춰 손뼉을 치고 어떤 이는 흥에 겨워 어깨춤을 추어대던 풍경이 아직도 눈에 어른거립니다.

선생님, 잘 먹고 잘 놀고 왔습니다. 더불어 함께하는 공동체사회를 지향하는 선생님의 취지를 또한 깊이 생각해 보는 시간이기도 했습니다. 이번 두번째 행사가 알찬만큼 세번째도 그리고 오래 오래 '아름다움 만들기'행사가 이어졌으면 합니다. 그때 다시 찾아 뵐 것을 약속드립니다. 건강하시기 바랍니다.

덧붙이는 글 | 경기도 가평군 개곡2리에 문닫은 학교인 '개곡분교'에 '아름다움 만들기'라는 문패를 새로 달고 서예가이신 권영환 선생님과 염색공예가인 이혜화 선생님께서 가을잔치마당을 열었습니다. 올해 두번째인 이번 행사는 권 선생님이 몸담고 있는 장애인공동체와 함께 한 뜻깊은 잔치마당이었습니다.

덧붙이는 글 경기도 가평군 개곡2리에 문닫은 학교인 '개곡분교'에 '아름다움 만들기'라는 문패를 새로 달고 서예가이신 권영환 선생님과 염색공예가인 이혜화 선생님께서 가을잔치마당을 열었습니다. 올해 두번째인 이번 행사는 권 선생님이 몸담고 있는 장애인공동체와 함께 한 뜻깊은 잔치마당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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