끝나지 않은 싸움, 로렌과 대우 그 8년의 기록

등록 2005.11.02 15:17수정 2005.11.02 15: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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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세기 초에는 이탈리아인, 1930년대에는 폴란드인, 1950년대부터는 마그레브(리비아·튀니지·알제리·모로코 등 아프리카 북서부 일대를 총칭하는 아랍어)인 등 일거리를 찾아 몰려온 이민자들이 정착해 노동을 위주로 형성된 프랑스 북부의 공업 도시 로렌은 아버지의 아버지, 또 그 아버지가 노동자로 대물림하며 공장을 중심으로 형성됐다. 그러나 석탄, 철강 산업으로 연명해온 로렌 지방의 점차적인 폐광은 철강 파동과 극심한 실업난을 조장하며 1974~1983년의 프랑스를 강타했다.

이런 가운데 한국의 재벌 기업 '대우'의 등장은 폐광으로 황폐해진 로렌 계곡에 르네상스를 알리는 신호탄으로 여겨졌다. 그러나 이것이 프랑스 정치권과 한국 국적의 재벌 기업이 결탁한 사기 사건이었음을 깨닫기 까지는 8년이 걸렸다. 대우의 세 공장이 가동된 시점으로부터 갑작스런 공장 폐쇄까지 걸린 기간이자 길고 지루한 노동 투쟁이 시작된 시점이기도 하다.

대우 로렌공장은 어떻게 폐쇄됐나

a "당국은 책임 져라, 우리는 죽고 싶지 않다!" 공장 입구에 현수막. 로렌의 대우 노동자 투쟁을 담은 다큐멘터리의 장면.

"당국은 책임 져라, 우리는 죽고 싶지 않다!" 공장 입구에 현수막. 로렌의 대우 노동자 투쟁을 담은 다큐멘터리의 장면. ⓒ Denis Robert

김우중씨가 프랑스 국적을 취득한 1987년부터 구체화되기 시작한 로렌의 대우 공장은 프랑스 정부로부터 2천만 유로(250억원)라는 엄청난 공공 보조금 지원을 받으며 1993년 첫 공장을 열었고 1995, 1996년 각각 2, 3차 공장도 가동에 들어갔다. 여기서 생산하는 것은 TV와 전자렌지였으며 공장 두 곳에는 태반이 여성 노동자로 채워졌다.

김우중씨는 애초에 TV브라운관과 냉장고를 생산하는 공장까지 총 5개의 공장을 약속했으나 이 약속은 지켜지지 않았다. 대우 로렌 공장은 2001년부터 점차 전자렌지 생산량을 줄이기 시작했고 2002년 9월~2003년 1월 사이 공장 문도 차례로 닫혔다. 마지막 18개월 간 대우는 '사회보장 및 가족수당 할당금 회수 동맹(URSSAF)' 분담금조차 지불하지 않았다.

공장이 완전히 문을 닫기 전, 해고 노동자 처우 대책을 위한 노-사 협상 시작 이틀만인 2003년 1월 23일 20시30분경 몽 쌩 마르탱 공장의 완제품 창고에서 화재가 발생해 6000㎡의 건물이 전소됐다. 몽 쌩 마르탱 공장은 대우 공장 3곳 중 유일하게 흑자로 운영되던 곳으로 총 550명의 노동자들이 음극선관을 생산해온 곳이다.

이 사고(?)로 노동자 투쟁의 전리품이었던 완제품과 노동자들의 회합 장소가 연기와 함께 날아가 버렸다. 2002년 12월 중순부터 팽팽히 맞서온 노-사 간 힘의 균형이 무너지는 순간이었다. 2003년 1월 초부터 공장을 점거하며 정부 당국과 대우 측에 "적절한 해고 대책을 제시하지 못하면 강물에 화학물질을 방출하겠다"고 위협해온 노조가 기댈만한 압박의 근거 자체가 사라져 버렸기 때문이다.

이로써 대우는 최소한의 보상금도 지불하지 않았음은 물론 '합법적' 정리해고 절차에 박차를 가할 수 있었다. 전자렌지 공장은 폴란드로, TV 공장은 터키로 이전됐으며 1200여 대우 노동자들은 거리로 내몰렸다. 그리고 이들 중 4명은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a 공장을 점거한 노동자들이 불을 지펴 추위를 쫓고 있다. 로렌의 대우 노동자 투쟁을 담은 다큐멘터리의 장면.

공장을 점거한 노동자들이 불을 지펴 추위를 쫓고 있다. 로렌의 대우 노동자 투쟁을 담은 다큐멘터리의 장면. ⓒ Denis Robert

프랑스 노동자들은 대우공장 철수와 관련, 프랑스 정권과 대우의 결탁을 의심하고 있다. 프랑수아 봉은 "애초 프랑스 정치권의 주장은 로렌에 새로운 기회를 준다는 것이었지만 건강했던 공장이 적자를 내더니 결국 문을 닫게 됐다"면서 "지금 생각하면 그런 것 때문에 대우가 받은 특혜도 예외적인 것이 많았던 것"이라고 말했다.

그는 "롱귀 공장의 경우, 노동자들이 공장을 점거했을 때 컴퓨터를 압수할 생각을 미처 못 했지만 컴퓨터 안에 스위스에 쏟아 부은 비자금의 증거 등 모든 정보가 들어있었다"며 "비록 컴퓨터는 다 사라졌지만 프랑스가 알제리 북부 자동차 시장을 정복하도록 대우를 도왔을 것이라는 추측은 충분히 가능하다"고 주장했다. "로렌 공장은 발판에 불과했던 것이다. 그렇지 않았다면 왜 로렌의 TV 제조 공장을 방치했는가 말이다."


한편 화재와 관련된 재판이 진행 중인 가운데 프랑스 정치권이나 대우 측의 의도적인 방화라며 노조가 제기한 의혹의 근거는 아래와 같다.

1. 화재 발생 시 왜 화재 경보 장치가 작동하지 않았나.
2. 대우는 왜 화재 당일 14~22시까지 작업이 계획됐던 노동자들을 23일 귀가 조처하고 29일까지 휴가를 줬나.
3. 화재 당일 22시까지 현장에 남아 있었어야 할 간부들은 왜 현장에 없었나.
4. 화재 당일 회사 경리부는 왜 일제히 공장을 빠져 나가 소재지를 옮겼나.
5. 화재 발생 전 날 회사는 왜 기존의 경비원 4명에서 2명으로 감축하고 남은 2인 조차 업무를 수행하지 말 것을 명했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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