퇴로를 차단한 협상의 함정

<문장과 문장 사이 2> 리우삐롱의 <담판>으로부터

등록 2005.11.07 10:53수정 2005.11.07 16: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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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지(맹렬하게 싸우면 살아남고, 맹렬하게 싸우지 않으면 죽는 疾戰則存 不疾戰則亡)에 처하면 분전해야 하며, '필사의 결의를 보여주는' 전술을 사용해야 한다. 그러나 '필사의 결의를 보여주는' 것의 핵심은 '살길이 없다'에 있는 것이 아니라 '보여준다'에 있음을 알아야 한다. 죽고 사는 것은 중요하지 않다. 중요한 것은 우리가 살 수 없음을 알아서 끝까지 죽기 살기로 싸우기로 했음을 적에게 알리는 것이다! 나는 이 책의 여러 군데에서 우리가 협상을 할 때 상대방과 협상을 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이미 알고 있는 상대방'과 협상을 해야 한다고 했다. 그러므로 '보여준다'는 기교가 매우 중요해지는 것이다.
- 리우삐롱의 <담판>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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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코북

<손자병법> '구지편'에 등장하는 구절, '사지(死地)에서는 필사의 결의를 보여 주어야 한다', '사지에는 전쟁만이 있다'는 문구를 풀이하는 글입니다. 정세가 사지로 판단될 때는 필사의 결의를 보여주어야 승리할 수 있다는 병법의 책략입니다.


그렇다면 그러한 결의를 보여주는 구체적인 방법은 무엇일까 궁금해집니다. 답은 우리가 이미 알고 있는 익숙한 수단들입니다. 지나치게 친숙한 기술이라는 점은 유쾌하지 않습니다. 우리 사회 협상의 문화가 대부분 사지를 전제하고 이루어지고 있다는 뜻이기 때문이지요. 특히 이익집단의 충돌에 있어 그렇습니다. 사지에서만 쓰이는 전략이 난무하지요.

죽기를 각오했음을 상대에게 알리는 방법은 이렇습니다. 우선 엄청난 자원을 투입하는 것입니다. 대량의 인력과 자금을 투입하는 방식으로 이미 상당한 자본을 투자했기 때문에 쉽게 포기하지 않을 것임을 보여주는 것이죠.

국가나 민족의 대의, 개인의 생사, 가문의 명예와 같은 주제를 극단적으로 내걸어서 자신의 퇴로를 아예 차단해버리는 것도 좋은 방법입니다. 이 때 공개성명서를 표방하는 것이 효과적입니다. 공개된 장소에서 군중을 상대로 선언을 해서 자신의 체면과 명분을 모두 걸었으니 상대가 쓸데없는 기대를 하지 않도록 조치를 취하는 것입니다.

사회의 기대로 자신을 옭아매는 방법도 있는데 가령 자신의 공식 지위나 직책상 다른 선택은 불가피하다고 선을 긋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 개인의 이익 때문이 아니라 직업윤리나 보직규정상 양보가 불가능하다고 밝히는 것이지요. 양심을 거론하기도 합니다.

혹은 역사적 사명이나 가족의 부탁 등에 근거해 주장을 끝까지 고수해야 하는 사정을 설명하기도 합니다. 부분적으로 비합리적인 면이 있더라도 대의를 내걸어 무마하는 방편이 되기도 합니다. 구호가 강할수록 구속하는 정도도 배가 되는 것이지요. 타협을 배제하는 주장을 쏟아내게 됩니다.


여기서 간과하지 말아야 할 것은 이러한 내용이 상대에게 잘 알려져야 한다는 것입니다. 의사소통 채널이 원할해야 효과가 있습니다. 만약 대화가 막혀있다면 대중매체를 통해 공개적으로 크게 내세워 반복 선전을 합니다.

일간지 주요 지면에 자신들의 주장을 싣기 위해 막대한 광고료를 쏟아 붓는 일이 허다한 것은 이런 이유가 큽니다. 올바른 정보를 제공하려 한다거나 너무 억울해서 대국민호소를 한다는 변을 덧붙이지만, 협상의 기술 측면에서 위와 같은 의도가 깔려있음을 무시할 수 없습니다. 형식적으로 방관자인 제3자를 겨냥하고 있지만, 실질적 과녁은 상대방입니다. 상대가 정부이든 또 다른 이익집단이든 마찬가지입니다.


협상에서 승리하기 위해 노력하는 것을 탓할 수만은 없습니다. 게다가 불가피하게 사지로 내몰리는 경우도 있습니다. 그러나 사안마다 의제를 사지로 끌고 가려는 태도는 온당하지 못하다고 생각합니다.

협상 테이블을 사지로 옮기려는 시도는 아군의 퇴로를 완전히 차단하는 데서 시작됩니다. 이때 과연 배수의 진을 칠만한 사안과 정세인지 분석하는 작업이 선행되어야 할 것입니다. 설령 죽음을 각오한 전략으로 이기더라도 그들의 쟁취가 사회전체엔 손해가 되는 일이 빈번해서는 안 될 것입니다.

덧붙이는 글 | 리우삐롱 지음 / 박종연 옮김 / 이코북 펴냄

덧붙이는 글 리우삐롱 지음 / 박종연 옮김 / 이코북 펴냄

담판 - 동서양 최고 전략가들의 절대 승자 원칙

리우삐롱 지음, 박종연 옮김,
이코북, 20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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