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늘에서 '뚝' 떨어진 고구마 한 상자

흥미로운 아마추어무선의 세계②

등록 2005.11.07 12:14수정 2005.11.07 16: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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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취미로 '아마추어 무선(일명 햄)' 활동을 한다. 그러나 그리 열심히 하는 편은 아니고 그저 시간이 날 때 가끔씩 한 번 마이크를 잡고 교신을 하는 정도다.


요즘에야 휴대전화가 발달해서 아마추어 무선이 널리 각광받지 못하고 있다. 그러나 눈에 보이지 않는 전파를 통해 미지의 상대방을 만날 수 있다는 것은 아마추어 무선만이 갖고 있는 독특한 매력이 아닐 수 없다.

직접 얼굴을 마주 보고 이야기하는 것이 아니라 목소리만으로 여러 정황들을 판단해야 하는 제한이 있기 때문에 교신 중에는 서로 깍듯한 예의가 필요하며 상대국에 대한 호의가 필수적이다.

뜻하지 않은 곳에서 접하게 된 작지만 가슴 흐뭇한 경험이 있어 여기서 소개한다.

지난 11월 6일 일요일. 지방에 계신 어머님을 뵙고 서울로 올라오는 길이었다. 막힘없이 잘 나가던 고속도로가 이천 부근에 와서 정체되었다. 이유 없이 차가 막힐 때면 운전하는 모든 이들의 마음이 그런 것처럼 나 역시 그 정체의 이유가 궁금하지 않을 수 없다. 또 어디까지 막히는지도 알고 싶었다.

이럴 때 유용한 것이 바로 아마추어 무선! 평소 잘 잡지 않던 무전기의 마이크를 잡고 과감하게 외쳤다.


"CQ! CQ! 여기는 DS1XXX! 중부고속도로상에 계신 국장님 교신을 원합니다!"('CQ'는 불특정 무선국을 부르는 아마추어 무선용어다)

금방 응답이 왔다. 신호의 '감도'와 '명료도'도 아주 좋았다. 간단한 수인사 후 위치를 물었더니 내가 있는 곳과 비슷했다. 상대국의 OM님(아마추어 무선사를 높여 부르는 말)은 화물트럭을 운전하시는 분인데 사는 곳은 경기도 여주고 지금은 서울 가락동에 물건을 납품하러 가는 길이란다. 그런데 내 바로 앞차가 많은 짐을 싣고 가는 트럭이다. 차 위로 삐죽이 나온 안테나도 보인다.


"혹시 불그스름한 짐을 가득 싣고 가는 트럭 아닌가요?"

맞단다. 하하하! 불특정 무선국을 호출해 이렇게 바로 앞차와 교신하는 건 매우 드문 경우인데 내가 그 주인공이 될 줄이야. 더구나 고속도로에서 말이다. 지금 고구마를 싣고 가락동으로 가는 길이라며 '물고구마'와 '밤고구마'의 장단점에 대해서도 설명해 주시고 고구마는 역시 '여주 고구마'가 제일 맛있다는 자랑도 잊지 않으신다.

교신하는 사이 차는 어느새 톨게이트까지 왔다.

"고구마 한 상자 드릴테니 저 앞에 잠깐 차 좀 세우시지요."

그러더니 고구마 한 상자를 선뜻 차에 실어 주신다. 고맙다며 얼떨결에 받기는 했지만 아무래도 그냥 가버리면 나쁜 놈이 될 것만 같아 미적거릴 수밖에 없다. 집사람한테 물어보니 마찬가지 생각이란다. '기름값'이나 하시라고 돈 만원을 드렸더니 한사코 거절하신다.

"이러면 안 됩니다. 우리는 아마추어 가족 아닙니까? 아이들하고 맛있게 드시소."

정체된 교통상황이 궁금해 시도한 교신이었을 뿐인데 하늘에서 전파를 타고 고구마 한 상자가 그야말로 '뚝' 떨어졌다. 방금 밭에서 캐낸 덕분에 붉은 흙이 그대로 묻어 있는 채 말이다.

아마추어 무선의 세계에 입문하면 가장 먼저 배우게 되는 것이 아마추어 무선인의 신조인 "아마추어는 우호적!"이라는 선언이다. 그 OM님이 내게 준 것은 고구마 한 상자였지만 내가 받은 것은 차 안에서 조용히 교신내용을 듣고 있던 가족들(집사람과 큰 아이도 아마추어 무선사이다)에 대한 선물임과 동시에 '아마추어 무선인 신조의 살아있는 선언'이었다.

교신을 자주 하지는 않지만 그래도 어쨌든 나도 '아마추어 무선사'이고 동호인이다. 그것도 앞으로 더더욱 친절하며 예의바른 아마추어 무선사가 되기를 다짐하는 동호인 말이다. 그 고구마 한 상자는 앞으로도 두고두고 우리 가족의 추억과 함께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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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쓰기 분야는 역사분야, 여행관련, 시사분야 등입니다. 참고로 저의 홈페이지를 소개합니다. http://www.refdol.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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