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재소설]정통무협 단장기 301회

등록 2005.11.08 08:27수정 2005.11.08 08: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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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부의 주위로 여전히 세 명의 인물들이 자리하고 있었다. 그 중에는 처음으로 자신에게 절망감을 안겨준 광노제란 인물도 여전히 있었다. 전하라는 호칭에 신경이 거슬렸는지 굵게 귀밑까지 그어진 검미가 약간 치켜 올라갔고 씁쓸한 미소가 걸리는 듯 했다.

“조금 오래 걸렸구나.”


“지나는 길에 들렀습니다.”

돌아 온 것은 아니라는 의미다.

“다쳤구나...”

이미 우교의 도움으로 독을 제거하고 부상을 입은 어깨와 허벅지는 금창약을 발라 지혈시켰지만 옷에 축축하게 배어있는 핏자국까지 없앨 수는 없었다.

“오랜 만에 오다보니 늪지에서 헤메다 갈대에 긁힌 모양입니다.”

“앉거라.”


사부는 그의 어설픈 변명에 다시 씁쓸한 고소를 머금었다. 담천의가 앉기를 기다려 그의 앞에 찻잔을 놓으며 손수 차를 따라주었다.

“밤새 오느라 속이 비었겠구나. 아마 아침을 준비해 놨을게다.”


담천의는 마치 애를 달래는 듯한 사부의 태도에 갑자기 심사가 꼬이기 시작했다. 이미 자신의 움직임은 누구보다 잘 파악하고 있을 사부였다. 자신이 밤새 이곳으로 걸어왔다는 사실까지도 알고 있는 것이다. 그는 심술이라도 부리고 싶어졌다.

“이왕이면 좀 더 쓸 만한 작자들을 부르지 그랬습니까?”

자신을 공격했던 사영천 살수들을 말함이었다. 사실 백결로부터 백련교에서 자신을 노리고 있음을 들었고, 우교로부터 종리추를 비롯한 사영천이 백련교와 관련된 자들임을 이미 들은 바 있었다. 사부와 그들 간에 관련이 있을 것이라는 생각은 아니었지만 굳이 배제할 것도 아니란 생각이었고, 사실은 억지를 부려 본 것이었다.

“집 앞에서 얼쩡거리는 그들을 그냥 놔두었다고 심통이 난 모양이구나. 그들은 이쪽은 신경 쓰지 않고 너를 기다리고 있더구나. 네 일이기에 놔둔 것뿐이다.”

어찌 보면 냉정한 말이었다. 또한 담천의가 얼마나 변했는지, 어느 정도의 경지에 올랐는지 눈으로 확인하고 싶었을지 몰랐다.

“담가의 피를 받은 사람들은 자신의 일에 끼어드는 것을 원치 않더구나.”

변명치고는 어쩌면 적당한 말이었다. 그의 부친 역시 그런 성격은 마찬가지였으니까. 하지만 그 말은 은근히 자신의 부친을 탓하는 의미도 있었다.

“그래서 담가장의 혈사 때에도 방관하셨습니까?”

“...........!”

사부의 얼굴에 복잡한 기색이 떠올랐다. 어차피 담천의가 이곳으로 올 때는 부친의 일을 물을 것이란 예상은 당연한 것이었지만 이렇게 반감을 가지고 물을 것이라고는 애써 생각해 본 적이 없다.

어느 정도 알고 있는 것일까? 자신의 품을 떠나 사년이란 세월 동안 이 아이는 얼마나 변한 것이고, 또한 어떤 오해를 하고 있을까? 이제 굳이 속일 이유도 없었다. 자신을 찾아온다면 그저 자신이 알고 있는 모든 것을 알려줄 참이었다.

“곧 떠날 사람처럼 그러는구나.”

“아시고 계시지 않습니까? 그 일 때문에 저를 기다리셨던 것 아닙니까?”

말투가 곱지 않다. 이미 그가 하는 말이 무슨 뜻인지 안다. 아마 고집스런 담가의 피를 받은 그로서는 이미 자신도 모르게 정해 놓은 제마척사맹의 맹주 자리가 탐탁지 않을 것이다. 그리고 그 의도가 자신을 지금이라도 제마척사맹이 있는 천마곡으로 보내려는 것이 아니냐는 의미였다. 하지만 사부는 화내지 않았다. 마치 투정을 부리는 아이를 바라보듯 잔잔한 미소를 띠웠다.

“많이 변했구나.......”

전에는 자신과 말조차 섞으려 하지 않으려 했던 아이였다. 그저 몇 번 물으면 겨우 한 마디 대답할 뿐이었다. 부친을 죽인 원수라는 생각을 접은 후에도 그 태도는 여전했다.

“아버님처럼 어리석게 살지 않겠다고 결심했습니다.”

“담장군은 어리석지 않았다.”

“자신 뿐 아니라 온 식솔까지 충(忠)이란 이름으로 죽음을 받아들인 분은 어리석은 분입니다.”

“네가 무얼 안다고 네 부친을 욕되게 하느냐? 그는 내 형제와 같은 사람이다.”

처음으로 나직하지만 노여움이 섞인 목소리였다.

“전하의 형제 같은 사람 이전에 제 부친입니다. 어린 자식들을 책임지지 못한 분이셨습니다. 저는 부친을 원망할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너라고 네 동생을 책임졌느냐?”

할 말이 없었다. 부모가 없으면 당연히 오빠라도 동생을 책임져야 했지만 자신 역시 어린 동생을 돌보지 못했다.

“원망하겠지요.”

기어들어가는 중얼거림이었다. 어떠한 목적을 위해서는 희생을 감수하는 그의 성격은 어쩔 수 없이 부친을 닮아 있었다.

“소혜.. 그 아이는 너를 원망하지 않더구나. 혼처도 마다하고 네가 돌아와 다시 담가장을 일으키기를 바라고 있다.”

동생의 일 하나로 상황은 변해버렸다. 어찌되었건 자신과 동생을 지금까지 무사히 키워준 인물이 바로 사부였다. 아무리 낯짝이 두껍다 해도 더 이상 대들 수는 없는 일이었다.

“네 문제 역시..... 일단은 강남 송가로 매파(媒婆)를 넣어야 할 것 같더구나.”

송하령과의 관계를 말함이다. 이미 자신과의 관계가 중원 천지에 퍼졌다고 했으니 강남송가라고 여식 일을 눈감고 귀 막아 언제까지 모른 척 할 수 있을까? 집에 돌아 간 송하령이 지금쯤 어떤 곤란을 겪고 있을지도 몰랐다.

“어차피 제가 처리해야 할 일입니다.”

자신의 문제가 나오자 담천의는 내심 당황하고 껄끄러웠다. 굳이 부끄러운 것은 아니었지만 앞으로 어떻게 하겠다고 뚜렷하게 결정한 것도 아니어서 더욱 답답한 마음도 들었다.

“너로 인해 고통 받는 사람이 있음을 잊지 마라. 네가 사내라면 네 여자를 울게 해서는 안 된다.”

정곡을 찌르는 말이었다. 어쩔 수 없는 상황이었다 해도 모든 것을 애써 외면하고 이기적으로 처리한 상황이었다. 그로 인해 자신이 선택한 그녀는 울고 있을지 몰랐다. 가슴이 더욱 답답해왔다. 점차 숨이 막혀 질식할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

그러다 문득 담천의는 사부의 옆에 앉아 조용히 자신을 응시하고 있는 광노제란 인물을 바라보았다. 맑은 눈빛 때문에 전혀 나이를 추측할 수 없게 만드는 것은 과거와 똑같았다. 답답한 마음에, 그리고 이곳에 오면 반드시 하고자 했던 일이기에 그는 나직하게 말을 건넸다.

“한 번 더 가르침을 주시겠습니까?”

의외의 말에 광노제란 인물의 노안(老顔)에 복잡한 기색이 스쳤다. 이것은 명백히 도전이었다. 과거에 패한 적이 있는 청년이 다시 승부를 청하는 것이다. 하지만 ‘가르침’이란 말에 다소 마음이 놓였다. 자신에게 심한 반감이나 적의는 없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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