총각김치 한 보시기, 알싸한 맛의 비밀

아래층 할머니가 소복이 담아 준 맛깔스런 이웃의 정

등록 2005.11.09 14:42수정 2005.11.09 15: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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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등학교 1학년 큰 아이의 학예회를 감개무량하게 감상한 날, 여느 집이라면 멋들어진 외식을 생각하겠지만 이날따라 아이들이 집으로 가자고 졸라댑니다. 학예회를 준비하고 보여 주는 과정에서 다소 고단했던 모양입니다.


집으로 돌아가는 길, 왠만한 은행나무 가로수는 죄다 아이 손바닥만한 황금빛 부채를 펼치고 있습니다. 기압의 변화가 있음직한 저녁 나절이면 멀리서 불어 온 바람이 황금부채를 흔들고 지나갑니다.

지나는 자리마다 맥없이 떨어지는 몇 개의 낙엽이 가을이 깊어가고 있음을 실감나게 합니다. 게다가 서쪽으로 뉘엿거리며 지는 오후 햇살마저 가끔은 금홍빛으로 번지며 주위를 온통 노르스름하게 만드는 데 일조합니다.

융단 같이 낙엽이 쌓인 길을 걸으며 집에 도착해 보니, 아랫집 현관문이 훤히 열려 있습니다. 날씨가 제법 스산한데 문을 열어 놓은 걸 보니 환기를 시키는가 보다 생각하며 계단을 타고 위로 오르려 하는데, 아래층 할머니가 걸어 나오시며 손짓을 합니다.

"어디들 다녀오는 갑네. 애기 엄마 좀 보자구래요."

연세가 지긋하신 분이 언제나 인자하신 미소로 존대를 합니다. 뒤따라오던 아내는 무슨 일인가 싶어 눈을 동그랗게 뜨고 아래층으로 내려갑니다. 한 번도 그런 일이 없었기 때문에 저 또한 내심 걱정스러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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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유성호

혹시 아이들의 분주함 때문에 아래층에 소음이 심했나 싶기도 하고 쓰레기를 잘못 버린 게 아닌가 싶기도 합니다. 도둑이 제 발 저리는 꼴입니다. 잠시 있자니 아내가 뭔가를 앞세우고 들어옵니다.

누런 플라스틱의 일명 황토 김치용기에 뚜껑을 닫을 수 없을 정도로 맛깔스러운 총각김치가 한 보시기 담겨져 있습니다. 안도의 한숨과 함께 아침 나절 일이 떠오릅니다. 연립주택 공동 출입구 앞에서 할머니께서는 알타리 무를 다듬고 계셨습니다.


갓 뽑아낸 듯한 싱싱한 알타리 무의 향긋함이 계단에 진동했습니다. 머릿속에서는 재빠르게 양념을 모두 버무린 총각김치를 떠올렸고 알싸한 무의 미각을 생각했습니다. 그러자 입안에는 침이 그득하게 고입니다.

"무 냄새가 정말 좋네요. 향긋한데요."
"담그면 한 그릇 드릴까?"
"……."

느긋하게 돌아보시며 던진 할머니의 호의에 저는 아무 대답도 하지 못했습니다. 양이 많지 않아 보였기에 덥석 받아 먹는 염치를 보일 수가 없었습니다. 그랬던 할머니는 우리 가족이 돌아올 때를 기다리기 위해 현관문을 열어 두었던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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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유성호

뚜껑을 열자 새하얀 몸통에 고춧가루와 갖은 양념 옷을 두른 알타리무가 정말 '딜리셔스(delicious)'하게 담겨져 있습니다. 서둘러 오랜만에 잡곡이 섞이지 않은 하얀 쌀밥을 했습니다. 아무래도 갓 담은 총각김치에는 이밥이 궁합이 맞지 않을까 싶어서입니다.

오늘따라 밥 짓는 시간이 왜 이리 길게 느껴지는지, 참을 수 없는 맛의 유혹에 그만 먹음직스런 무 하나 골라 덥석 깨물었습니다. 이내 "아삭"하면서 몸통의 일부분을 내주는 알타리 무 향이 입안으로 번집니다.

무 고유의 쌉싸름함과 생고추의 매콤함, 그리고 김치의 맛을 좌우하는 곰삭은 젓갈이 어우러져 혀를 행복하게 자극합니다. 밥을 한 고봉으로 뜨고는 총각김치 한 줄기를 걸쳐 놓습니다. 밥상 위에는 총각김치 말고는 반찬이 없습니다. 밥도둑이 따로 없습니다.

함포고복을 하며 현관을 나서자 때마침 음식 쓰레기를 버리러 나오신 할머니를 만날 수 있었습니다.

"총각김치가 정말 맛있습니다. 애들도 잘 먹어요. 젓갈을 많이 쓰셨나 봐요?"
"예, 젓갈을 안 넣으면 그게 어디 김친가요. 근처에 사는 마흔넷 먹은 우리 큰딸이 여적 김치를 갖다 먹고 있어요. 아무리 해도 엄마가 담근 김치 맛이 안 난다네요. 그릇 돌려 줄 생각 말고 찬찬히 들어요."

그리고는 원치도 않는데 김치를 주는 게 아닌가 하고 걱정하셨답니다. 이사 온 지 1년이 다 되도록 변변한 인사조차 나누지 못하고 살았던 것이 못내 찔립니다. 할머니가 주신 총각김치 한 보시기에는 알타리 무의 향긋함과 함께 이웃의 알싸하고 따뜻한 정이 숨겨져 있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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