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제 강제동원 '한'... 18년 이어온 월례회

태평양전쟁희생자광주유족회, "일본 공식사과까지 멈추지 않을 것"

등록 2005.11.09 16:26수정 2005.11.09 17: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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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 태평양전쟁희생자광주유족회원들이 월례 모임 시작에 앞서 회원들에게 발송할 500여 편의 우편작업을 서두르고 있다.

태평양전쟁희생자광주유족회원들이 월례 모임 시작에 앞서 회원들에게 발송할 500여 편의 우편작업을 서두르고 있다. ⓒ 이국언

제법 찬 바람이 파고들기 시작한 지난 8일. 아래층에서 개 짖는 소리가 잦아지는가 싶더니 어느새 사무실 방안이 회원들로 가득하다. 이 날은 '태평양전쟁희생자광주유족회'가 매월 한 차례씩 갖고 있는 월례모임이 있는 날. 회원들이라야 이미 허리가 구부정한 70~80대 할머니 할아버지들이다.

나서는 길에 병원에 들려 당뇨 약을 지었다는 분, 걸음걸이가 시원찮아 골목 올라오기도 벅차다는 분, 한 차례 안부가 돌고 돈다. 사무실이라야 슬레이트 주택에 딸린 고작 3~4평 남짓한 방이다.

월례회 모임이 시작된 것은 88년 전국유족회 발족 무렵부터다. 회원들은 일제 강점기에 징용이나 징병, 근로정신대 등의 이름으로 강제로 끌려가 피해를 입은 당사자이거나 그 유족들. 사회적 관심마저도 없던 시절, 서로 위로라도 되고 용기 잃지 말자고 모이게 된 것이 어느새 18년의 세월이 흘렀다. 지난달이 꼭 200번째 월례회였단다.

"기각만 14번, 괜히 쓸데없는 짓 했다는 사람도..."

"일본 법정에서 기각당한 것만 모두 14번입니다. 그동안 많은 분들이 돌아가시고, 괜히 쓸데없는 짓 했다고 도중에 낙심해 떨어져 나가신 분들도 많았지요. 회비 거출도 힘들어지다 보니 유족회를 꾸려오는 것조차 힘이 부치더군요."

이금주(86) 광주유족회 회장은 "끝까지 좌절하지 말자고 다짐하면서도 막막한 세월이었다"고 말한다. 광주유족회가 일본 정부와 기업을 상대로 한 일제강점기 피해배상 소송만 모두 7차례. 본인이 재판 때문에 10년 넘는 세월 동안 현해탄을 넘나 든 것만 70여 차례에 이른다. 그러나 65년 맺은 한일협정을 이유로 모두 패소하거나 기각되고 말았다. 보상 문제는 이미 끝났다는 것이다.

a 일당 10만원 일용노동도 제치고, 마을 노인회에서 놀러가자는 제안도 뿌리치고 한 자리에 모였다. 자장면 한 그룻에 초라한 모임이지만 의기만은 잃지 않았다.

일당 10만원 일용노동도 제치고, 마을 노인회에서 놀러가자는 제안도 뿌리치고 한 자리에 모였다. 자장면 한 그룻에 초라한 모임이지만 의기만은 잃지 않았다. ⓒ 이국언

92년부터 유족회 활동을 시작했다는 징용피해자 정화근(79·산수동)씨는 "그때만 해도 피해 당사자분들이 많이 살아계셨다"며 "40~50여 명씩 모일 때는 건너 방, 마루 심지어는 창문 밖에서 얼굴도 못 보고 앞에서 말하는 것 귀로만 듣기도 했다"고 말했다. 그러나 번번이 패소하면서 회원의 출입도 많이 줄었다. 또한 20여 년 가까워 온 세월에 많은 수가 사망하고 말았다. 이날 참석자는 모두 13명.


주위의 냉대와 핀잔도 이들의 가슴을 아프게 했다. 특히 여자 근로정신대 피해자의 경우, 주위의 오해와 편견을 이겨내는 것이 쉽지 않았다. 위안부라는 오인 때문이었다. 일본을 넘나들며 법정투쟁을 벌이면서도 주변에는 계에서 강원도 놀러갔다 온다고 둘러 대야 했던 그들. 불과 엊그제까지의 일이다.

"일본 공식사과까지 걸음 멈추지 않을려..."


김혜옥(75·화순) 할머니는 "지금도 그 말만 들으면 안에서 피가 솟구친다"고 말한다. 17살 때 일본 군수공장에 끌려가 부상을 입은 한 피해자는 "신문 어느 구석을 뒤적여 봐도 유족회나 우리들 소식은 한 줄 없더라"며 "'이미 반세기가 더 지난 일인데 무슨 소리냐'며 부인과 자식들까지 외면할 때 가장 서운했다"고 털어놨다.

한 겨울 눈밭에 지팡이를 끌고 오면서도, 날짜를 옮겼으면 옮겼지 한 번도 월례회를 그냥 지나친 적이 없었던 유족들. 어떤 희망도 걸 수 없던 시절, 18년을 버텨 온 힘은 어디에 있었을까. 정 할아버지는 "하도 억울해서 하는 것이지, 무얼 기대해서가 아니다"며 "가슴속 응어리가 아니었으면, 계모임도 이렇게 지속하지는 못했을 것"이라고 말한다.

남편이 징용피해자인 김순금(84·방림동) 할머니는 "젊은 나이에 남편 잃고 살아 온 세월을 생각하면 비참하기 그지없다"며 "내게는 유족들이 가족이나 다름없다"고 말한다. 아울러 "신사 참배를 자랑하는 일본의 뻔뻔스런 모습을 볼 때마다 그럴수록 주먹이 불끈 쥐어 진다"며 "잘못을 공식사과 할 때까지는 걸음을 멈추지 않겠다"고 말한다.

a 강제동원 피해의 한을 간직한 채 18년 세월을 하루 같이 달려왔다. 그 사이 북적였던 목소리들도 그 많던 신발도 많이 줄었다.

강제동원 피해의 한을 간직한 채 18년 세월을 하루 같이 달려왔다. 그 사이 북적였던 목소리들도 그 많던 신발도 많이 줄었다. ⓒ 이국언


a 1944년 도난카이(東南海) 지진으로 나고야 미쯔비시 항공기제작소에서 숨진 6명의 조선여자근로정신대 순직비. 1988년 유족들이 순직비를 쓰다듬으며 통곡하고 있다.

1944년 도난카이(東南海) 지진으로 나고야 미쯔비시 항공기제작소에서 숨진 6명의 조선여자근로정신대 순직비. 1988년 유족들이 순직비를 쓰다듬으며 통곡하고 있다. ⓒ 광주유족회


색 바랜 노트... 자장면 12그릇

▲ 이젠 글씨도 많이 퇴색된 현판. 유족들은 이곳을 아지트 삼아 일제 강점기 식민지배의 부당성을 고발해왔다.
한때 1200여 명에 이르던 회원 중 남아 있는 사람은 400여 명 남짓. 많은 사람이 유명을 달리하고 일부는 발길을 돌렸다. 눈비가 오건 일요일이건 정기모임은 매월 10일. 부득이한 일이 있을 땐 미리 날짜를 조정한다.

초창기 장부는 행방을 모르고 회의록은 94년부터 기록돼 있다. 누구도 관심을 가지지 않을 때, 감히 일본을 상대로 법정투쟁을 벌여 온 지난한 세월도 색 바랜 노트 빼곡히 담겨져 있다.

조심스럽게 정부에서 특별법이 제정돼 어느 정도 응어리가 풀린 거냐고 묻자 단호한 답이 돌아온다. "그것은 정부가 해야 할 일은 한 것뿐이지, 언제 일본 놈들이 그러더냐"고. 짧은 역사 인식을 경계하고 있는 것.

회의는 일본 재판과 관련한 소식, 유족회 자체행사나 계획들에 관해 논의한다. 최근에는 특별법 제정 이후 강제동원피해진상규명위원회 활동 소식 등도 주요 관심사다. 간간히 소식이 뜸한 회원 안부를 나누는 것도 통과의례다.

회비로 5000원씩을 걷어 3000원짜리 식사를 하고 나머지 1~2천원씩은 꼭 남겨왔단다. 자식들 결혼이다, 회갑이다, 유족 상을 당하는데 찾아보기 위해서다. 총무를 보고 있다는 김춘엽(82·우산동) 할머니는 상의 끝에 이날 메뉴로 자장면 12그릇과 김밥 3줄을 주문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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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일제강제동원시민모임 이사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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