터키 파묵칼레에 울려퍼진 '소양강 처녀 '

7박 8일 터키여행기 (14) - 파묵칼레와 히에라폴리스 그리고 밸리댄스

등록 2005.11.10 13:15수정 2005.11.11 16: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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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묵칼레라는 말은 터키어로 목화성이라는 뜻이다. 목화성이라는 이름만 먼저 들은 사람이라면 이곳 데니즐리주가 목화의 주산지이며 질 좋은 면 섬유의 생산기지라는 사실을 얼핏 떠올리겠지만 그보다 먼저 이곳의 눈 앞에 펼쳐진 새하얀 석회암 절벽을 한번이라도 본 사람이라면 이 곳이 왜 '목화의 성'이라고 불리는지 한 눈에 알 수 있다.

특히 수 만 년을 두고 온천물이 넘치면서 온천 수 속에 함유되어 있는 칼슘성분만 응고되어 하얀 석회암 절벽을 이룬 이 곳의 모습은 눈이 부실만큼 인상적이다.


a 목화성이라는 이름처럼 새하얀 석회암 절벽 파묵칼레

목화성이라는 이름처럼 새하얀 석회암 절벽 파묵칼레 ⓒ 김정은

목화성, 파묵칼레

유네스코의 세계문화유산으로 등록된 이곳도 온천수에 몸 담그는 여행객들로 온천수도 줄어들고 훼손이 심각해서 지금은 입욕객을 전면 통제하는 대신 온천수에 맨발을 담그고 걸어 다니는 정도만 허용하고 있다고 한다.

이 때문에 조금 아쉬웠지만 막상 나 스스로 미지근해진 온천수에 맨 발을 담그고 드넓은 석회암 절벽을 돌아다니다 보니 더 이상 훼손되기 전에 출입을 통제한 조치는 매우 잘한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지금 이 순간에도 이 연약해 보이는 하얀색 대지는 수많은 사람들의 발에 짓밟힌 채 몸살을 앓을 정도인데 통제 전 이 곳이 수많은 사람들의 목욕탕으로 사용되었다는 사실 자체가 왜 그리 끔찍하던지. 우리나라든 타국이든 언제나 자연의 법칙을 파괴하고 자연을 훼손하는 주요대상은 한결같이 인간들이었다.

a 히에라폴리스 유적

히에라폴리스 유적 ⓒ 김정은

그러나 무엇보다도 온천 휴양도시로 알려진 파묵깔레를 더욱 돋보이게 하는 것은 폐허에서 다시 세상 밖으로 나온 도시유적 히에라폴리스의 존재다.


자연의 경이로움과 인간의 체취가 함께 어우러진 이 고대 도시 유적의 건립에 대해서는 두 가지 설이 전해지고 있다. BC 197년과 159년 사이에 현존하는 비문 중 버가모 왕의 유메네스(Eumenes) 2세의 어머니의 이름인 히에라를 본따 지었다는 설과 셀루키드(Seleucids)왕국의 도시였다는 설이 있는데, 연극장에 있는 비문에 셀루키드 왕국의 이름이 발견됨으로써 셀루키드 도시설이 더 지지를 받고 있다고 한다.

자연의 경이로움과 인간의 체취가 어울린 히에라폴리스


a 1만명 정도의 수용규모를 자랑하는 히에라폴리스 내 원형극장

1만명 정도의 수용규모를 자랑하는 히에라폴리스 내 원형극장 ⓒ 김정은

약 3세기 동안 라오디게아의 그늘에 있었던 이 도시는 그 무렵 다른 도시들처럼 로마의 영토로 편입되고 AD 1세기 말엽부터 치료 휴양의 도시이자 상업 도시로 번영을 누렸다. 그러나 계속되는 지진, 아랍인의 침입, 셀주크 투르크 군과 비잔틴 제국 군대 간의 전쟁이 계속 되는 바람에 급격히 황폐해졌으며 결국 12세기 이래 폐허로 잊혀진 도시가 되었다.

a 파묵칼레의 야외온천장, 클레오파트라도 와서 이용했다는 설이 있다.

파묵칼레의 야외온천장, 클레오파트라도 와서 이용했다는 설이 있다. ⓒ 김정은

이처럼 철저하게 잊혀진 도시를 다시 세상 밖으로 살려낸 사람은 1957년 이탈리아의 고고학자 파올로 버존이었다. 그의 대대적인 발굴 작업 덕에 만 명 정도를 수용하는 규모의 원형극장이 언덕 위에 당당한 자태를 뽐내고 있고 약 1200개의 정말 각양각색의 형태를 지닌 고분들과 석관이 산재해 있는 네크로폴리스(공동묘지)와 기둥이 늘어서 있는 메인 도로를 중심으로 남아 있는 유적 잔해들을 볼 수 있게 됐다.

인근 호텔에 짐을 풀고 이곳 온천수에 몸을 담그고 피로를 풀다보니 파묵칼레에도 어둠이 슬금슬금 찾아오고 있었다.

a 우리가요 소양강처녀를 멋들어지게 부르고 있는 터키 여가수

우리가요 소양강처녀를 멋들어지게 부르고 있는 터키 여가수 ⓒ 김정은

소양강 처녀와 밸리댄스

"해 저문 소양강에 황혼이 지면 / 외로운 갈대 밭에 슬피 우는 두견새야 / 열여덟 딸기같은 어린 내 순정 / 너마저 몰라주면 나는 나는 어쩌나 / 아아 그리워서 애만 태우는 소양강 처녀~."

저녁식사를 마치고 나니 뜻밖에도 이곳 호텔 야외공연장에서 투숙객을 위한 밸리댄스 특별공연을 한다는 정보를 입수했다. 간단한 음료수만 주문하면 밸리댄스 공연을 공짜로 볼 수 있다는 말에 모기의 습격을 감내하고 호텔 야외공연 무대 앞자리에 일치감치 자리를 잡아놓고 밸리댄스 공연을 목이 빠져라 기다렸다.

그런데 기다리는 사람의 속셈을 눈치 챘다는 듯 밸리댄서는 나올 기미가 없고, 쉴새 없이 쿵쾅거리는 전자 오르간 소리에 슬슬 지쳐가고 있었다. 그런데 무대가 바뀌는가 싶더니 갑자기 귀가 번쩍 뜨일 정도로 또렷한 한국 노래가 우렁차게 들리기 시작했다. 혹시 여기가 터키가 맞나 의심할 정도로 맛깔스럽게 '소양강 처녀'를 열창하고 있는 사람은 한국인이 아니라 삭발한 모습의 개성파 터키 여자가수였다.

a 데니즐리는 목화의 주산지이자 면섬유 생산기지다. 사진은 목화에서 실을 빼내는 모습.

데니즐리는 목화의 주산지이자 면섬유 생산기지다. 사진은 목화에서 실을 빼내는 모습. ⓒ 김정은

한국산 트로트 '소양강 처녀'가 터키 락가수와 만나 열정적인 터키식 락으로 변했지만 우렁찬 락의 리듬 속에서도 여전히 노래 속의 두견새는 갈대밭에서 슬피 울고 열여섯 소녀의 순정은 애만 태우고 있었다.

겉으로는 박수를 치며 흥겨워했지만 마음속으로는 끊임없이 생겨나는 호기심을 막을 수 업었다. 과연 문제의 이 여가수는 어떤 이유로 이곳에서 한국의 트로트를 부르는 것일까? 하필이면 그 많은 한국 노래 중에 소양강 처녀였을까? 특히 가사의 뜻이 무언지 알고나 부르는 것일까?

많은 한국인 관광객들의 기분을 살리기 위한 서비스라고 볼 수도 있었겠지만 흥에 겨워 몇 번이고 반복해서 부르는 이 여가수를 보니 문득 버스에서 터키인 가이드가 흥얼거리던 그네들의 민요 '카팁'의 곡조와 가사내용이 떠오른다.

위스크다르 가는 길에 비가 내리네 / 내 님의 외투 자락이 땅에 끌리네
내 님이 잠에서 덜 깨어 눈이 감겼네 / 우리 서로 사랑하는데 누가 막으리
내 님의 깃 달린 셔츠도 참 잘 어울리네 / 위스크다르 가는 길에 손수건을 놓았네
내 님을 위한 손수건에 사랑을 담았네 / 어느새 내 님이 바로 옆에 있네
우리 서로 사랑하는데 누가 막으랴 / 내 님의 깃달린 셔츠도 참 잘 어울리네


6.25 전쟁 때 참전한 터키 병사들에 의해 우리나라에도 '위스크다르'라는 곡명으로 알려진 친숙한 곡조의 노래인데 듣다 보니 짝사랑하는 소녀의 안타까움이 배어있는 가사와 곡조가 소양강 처녀와 매우 유사하다는 느낌이 들었다.

그러고 보니 락풍의 소양강 처녀가 터키인 여가수의 어눌한 발음에도 어색하지 않은 이유는 우리 민족과 터키인들 사이에 가느다랗게 연결되어 있는 정서적인 공감대가 존재하고 있기 때문일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터키 여가수가 최신 한국노래를 놔두고 굳이 "소양강 처녀'를 선곡한 이유도 그녀의 핏속에 흐르는 우리와 유사한 기질 때문이 아닐까?

a 밸리댄서의 화려한 율동

밸리댄서의 화려한 율동 ⓒ 김정은

터키인 여가수의 흥겨운 '소양강 처녀' 노래 덕분에 분위기가 고조될 무렵 고대하던 밸리댄스 공연이 시작되었다. 고대 이집트 신왕국 시대 제18왕조의 무덤 속에 현재의 밸리댄스와 똑같은 형태로 춤을 추는 무용수가 그려져 있을 정도로 이슬람권에서 오래된 다산기원의 춤은 오스만 투르크시대로 들어오면서 터키 문화의 영향을 받아 좀더 육감적으로 변했다고 한다.

그래서인지 종주국인 이집트보다 오히려 터키 밸리댄스가 더 유명하단다. 최근 우리나라에도 이 춤을 배우려는 사람들이 증가할 정도로 유행이라서 유심히 보고자 했지만 기대가 너무 컸던 탓일까? 밸리댄서의 호화로운 율동도 잠시 잠깐, 공연은 기대한 만큼 충실해보이지 않았고 댄서들의 공연 대신 관객들을 뽑아 벨리댄스를 가르쳐주는 퍼포먼스로 거의 모든 공연을 때우는 것 같은 인상이 들었다.

물론 모든 밸리댄스 공연 중에 관객과 함께 하는 퍼포먼스는 빠지는 법이 없고 그 퍼포먼스 자체도 흥미는 있지만 정작 공연시간은 짧고 공연시간 내내 관객들과의 퍼포먼스가 더 큰 비중을 차지한다면 주객이 전도된 것이 아닐까? 아니, 그보다는 생각지 않은 곳에서 우연히 듣게 된 한국 트로트 '소양강 처녀'의 충격이 밸리댄스의 화려한 율동보다 더 큰 탓이 아닐까?

어쨌거나 터키 파묵깔레의 밤은 난데없는 "소양강 처녀"와 벨리댄스의 흥겨움이 더해져 여행의 피로를 풀어주는 파묵칼레 온천수의 효능처럼 유쾌, 상쾌하게 깊어가고 있었다.

덧붙이는 글 | 7박 8일 터키여행기 14번째 이야기입니다.

덧붙이는 글 7박 8일 터키여행기 14번째 이야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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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기업을 그만두고 10년간 운영하던 어린이집을 그만두고 파주에서 어르신을 위한 요양원을 운영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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