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 오리외, 카트린 드 메디치들녘
캄캄한 밤, 횃불로 밝힌 불, 드레스를 입고 춤추는 남녀들. 분위기가 무르익자 갑자기 벌어지는 무도회장내의 난교 파티. 소란과 아우성, 흥분의 도가니.
이것이 바로 화려함과 사치의 대명사로 불리는 프랑스 궁정의 1500년대 초 모습이었다. 이렇게 본능적이고 야만적인 프랑스 궁정에 지금과 같은 화려함과 세련, 예술의 옷을 입힌 이가 있었으니 그가 바로 이탈리아 메디치 가문의 마지막 손, 카트린 드 메디치다.
내가 카트린을 만나게 된 출발점은 스코틀랜드의 여왕, 메리 스튜어트였다. 세 번 결혼했고 국민들에게 추방당했으며 사촌인 엘리자베스 여왕에 의해 목이 잘린 드라마틱한 메리의 인생을 쫓아가다보니 엘리자베스 1세의 연대기를 읽지 않을 수 없었고, 엘리자베스 여왕을 쫓아가다보니 그녀에게 두 아들을 배우자로 제공하며 수없이 구애를 했던 프랑스의 왕비 카트린을 만나게 되었던 것이다.
메리 스튜어트 연대기에서 카트린은 매정하고 쌀쌀하며 잔인한 면모로 몇 번 등장한다. 엘리자베스 여왕의 이야기에서는 냉철하고 교활하며 외교수완이 탁월한, 그리하여 엘리자베스 여왕 자신과 일면 매우 닮아 있는 경쟁국의 실권자로 등장한다. 처음엔 그다지 흥미를 끄는 요소가 없는 인물이었지만 그녀가 하도 다양한 역사 인물들의 주위에서 후광을 발하고 있어서 그녀의 연대기를 나는 결국 읽고야 말았다. 카트린, 검은 베일속의 큰 손.
한 시대의 역사에 대해 자세하면서도 종합적인 그림을 그려보기 원한다면, 가장 손쉬운 방법이 그 시대 주를 이루었던 역사인물의 삶을 따라가 보는 것일 것이다. 도대체 어떤 인물이었기에 엘리자베스 여왕이 '늙은 여우'라고 표현한 것일까. 단순한 궁금증에서 책장을 넘기기 시작했던 나는 프랑스가 화려한 문화를 꽃피우기 이전의 야만적인 모습, 종교전쟁으로 인해 무시무시한 살육이 자행되는 과정, 그 종교전쟁이 어떤 식으로 마무리되고 인간이 비로소 신의 손에서 나와 인류의 모습에 충실하게 되었는지를 세밀화를 보듯 만나게 되었다. 섬세한 세밀화 한 장 한 장이 이루어져 연출해내는 거대한 벽화, 프랑스 16세기의 초상.
한 사람을 이루는 배경과 혈통에 기반한 차별기제는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언제나 막강한 것인가 보다. '왕족' 출신이 아니라 '상인' 가문의 출신이라는 이유로 궁정생활 초창기에 죄인처럼 눈치를 보며 움츠리고 지내는 카트린의 모습을 보며 나는 '고졸출신 대통령'이 당선되었을 때 대한민국 전체를 강타하던 기득권들의 고함소리를 떠올리지 않을 수 없었다. 가문, 학벌, 성별...인류는 언제 이 징그러운 딱지들에서 헤어 나와 인간을 인간 그 자체로 바라볼 수 있을 것인가.
그러나 카트린은 이에 눈 하나 꿈쩍하지 않았다. 자신이 상인 가문 출신이라는 것, 그리고 사랑받지 못하는 것(남편인 앙리2세에겐 '디안'이라는 막강한 힘을 가진 애인이 있어 그녀는 거의 명칭만 왕비였다)도 시간이 지나고 나면 모두 지나가리라는 것을 꿰뚫어보고 있었고, 미래에 갖게 될 권좌에 대비하여 항상 주위 정세를 살피며 외교수완을 배우기를 게을리하지 않았던 것이다. 훗날 그녀가 어떻게든 전쟁을 피하려 하며 협상의 귀재로 유럽에서 명성을 날리게 되는 것도 이 기간의 수업에 바탕을 둔 것이리라.
...사실 카트린은 교활한 노름꾼들의 말투대로 표현하자면 "좌중을 웃기고 있었다." 하지만 그녀는 시간을 벌고 있었던 것이다. 비록 상대인 펠리페 2세가 아무런 반응을 보이지 않는다 하더라도 어쨌든 그녀가 협상하는 동안만은 선전포고를 하지 못할 터였다. 비록 언제 어느 때 깨질지 모르지만, 그리고 겉보기에 별다른 성과를 기대할 수도 없겠지만 평화 협상은 시도해 볼 만한 가치가 충분히 있었다. 그녀는 경계심도 많고 계산적이었으나 자연스럽고 낙관적인 태도로 이런 종류의 책략을 발휘했다. 그녀는 검은 베일과 누르스름한 지방 아래 두뇌와 수완이라는 타고난 재능을 간직하고 있었다. 이탈리아의 베네치아 대사는 당시 그녀에게 접근하는 사람들이 그녀를 어떻게 평가했는지에 대해 이렇게 언급했다.
"상냥하고 겸손하며 원만한 성격으로 높은 평가를 받으며, 보기 드물게 지적이고, 이런 저런 일을, 특히 국사를 능숙하게 처리할 줄 아는 여인..."
이 같은 자질이야말로 화해를 역설하는 협상자의 무기였다....-본문 중에서-
모든 것을 무력승부로, 전쟁으로 해결하려 했던 유럽의 16세기. 스페인이라는 어마어마한 강국의 초강력 군주 펠리페2세와 대치하던 상황에서 전쟁을 피하고 협상을 벌이려 했던 카트린은 얼마나 현명했는가. 얼마나 실리를 취하는 아는 군주였는가. 카트린은 전쟁은 승자에게도 강자에게도 결국 남는 것이 없는 소모전이라는 것을 본능적으로 알고 있는 총명한 군주였다.
그녀가 그럴 수 있었던 건 상인가문 출신이라 '무엇이 이득이 되는지'를 냉정하게 따져볼 수 있는 능력을 어릴 때부터 체득했기 때문이기도 하겠지만 전쟁을 지휘해본 적이 없는 여자라는 약점 때문이기도 했다. 결국 '여자'라는 약자의 특성이 그녀를 '협상'이라는 높은 차원의 전략으로 이끈 것이다.
루이 14세 때 화려하게 피어난 프랑스 궁정문명은 카트린에게 빚진 바가 많다. 이탈리아에서 시작된 르네상스, 예술과 인류에 관한 사랑이 카트린이라는 여인을 타고 프랑스로 넘어와 화려한 프랑스 문화로 정착한 것이다. '외국여자'라는 이유로 견제와 조롱을 받았던 이탈리아인 카트린이 프랑스 문화 전체에 이탈리아라는 색깔을 입혀버린 것이다!
내가 이 책을 읽고 가장 놀랐던 것은 '성 바르톨로뮤 축일의 학살'에 관한 부분이었다. 흔히 카트린 드 메디치, 하면 사람들은 반사적으로 '성 바르톨로뮤 축일의 대학살'을 떠올린다. 그녀를 따라다니는 '잔인한 여왕'의 이미지는 이 잔혹한 학살 사건 때문이다. 예전엔 나도 카트린에 대해서 아무것도 아는 것이 없으면서도 이 학살을 명령한 사람이라는 생각 때문에 그녀를 '블러디 메리'와 동급의 이미지에 두었던 것 같다.
그런데 그 학살은 그녀가 의도한 것이 아니었다. 물론 반란을 획책하고 있었던 신교파 몇을 암살하려고 계획한 것은 사실이었지만 그렇게 대규모의, 신교건 구교건 가리지 않고 아무나 닥치는 대로 죽여버리는 식의 광적인 대중에 의한 대중학살을 의도했던 것은 결코 아니었다. 반란자 몇을 제거하려는 그녀의 의도가, 그 당시 프랑스 전체를 휩쓸고 있던 종교분쟁의 광기와 만나면서 거대한 참극을 연출해냈던 것이다.
살인이 시작되기 직전, 그녀는 자신의 의도가 훨씬 거대하고 불행한 학살극으로 변질되리라는 것을 직감하고 서둘러 그 계획을 중단시키려 했지만 그 시각 이미 프랑스는 살인의 광풍에 휩싸이고 있었다. 카트린의 반대파들, 그리고 해외 각국에서 카트린을 실각시키고 싶어했던 많은 군주들은 이 사건을 얼씨구나 하고 환영하며 이 대량학살이 순전히 카트린에 의해 일어난 것이라는 분위기를 조성했고, 이 분위기는 카트린의 이미지로 남아 오늘날까지 '잔인한 왕비'로 전해져오고 있는 것이다.
역사란 얼마나 많은 이미지를 남기는가. 그 이미지의 이면을 하나씩 하나씩 들추어보는 것으로 역사를 여행하는 우리 이승의 나그네들은 최고의 쾌감을 맛보게 되는 것이다.
물론 카트린이 그 학살을 의도하지 않았다는 것은 이 책 지은이의 견해일 뿐, 사실과 다를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역사에, 절대적인 사실이라는 게 어디 있겠는가. 많은 세기가 지난 후 역사와 만나는 우리는 역사를 기술하는 작가의 시선에 잠시 잠시 기대어 그 인물의 단면을 조금씩 조금씩 맞추어 갈 수 있을 뿐이다. 나는 정황상 타당성이 있어 보이는 이 견해를 받아들이기로 했다. 그리하여 내 머릿속에서 카트린 드 메디치는 이제 '잔혹한 왕비'의 이미지를 벗었다.
미세한 이미지 한 장 한 장으로 거대한 벽화를 이루어가는 이 두꺼운 책의 단점이 있다면 조금 지루하다는 것이다. 카트린에 대해서, 그녀를 둘러싼 정황에 대해서 너무 세세하게 설명하고 넘어가고 싶어 한 작가는, 비슷한 상황도 조금의 차이만 있다 싶으면 다시 최고의 세밀성을 가지고 묘사하는 우를 범했다.
그래서 비슷한 상황이라 사실 묘사해줄 필요가 없는데도 자꾸자꾸 묘사하는 바람에 끝으로 갈수록 지루하단 느낌을 갖게 된다. 그럼에도 역사여행을 즐기는 자라면 이 책은 끝까지 읽을 가치가 있다. 왜냐하면 웬만한 책에서는 맛볼 수 없는 당시 정황의 세세한 일면을 섬세하게 맛볼 수 있으니까. 16세기 프랑스 궁정 모습을 세밀화로 맛보고 싶은 분들은 꼭 읽어보시길. 중간 중간 여왕 마고로 유명한 마르그리트가 카트린의 골칫덩이 딸로 출현하여 종횡무진 뛰어다니는 흥미진진한 장면도 빼놓을 수 없는 재미다.
카트린 드 메디치 - 검은 베일 속의 백합
장 오리외 지음, 이재형 옮김,
들녘, 20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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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세기 프랑스 문화에 화려한 이름 새긴 여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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