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반 빼빼로 모아보니 20여만원어치

이 많은 것들을 누가 다 먹을까?

등록 2005.11.11 11:59수정 2005.11.11 12: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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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침에 출근해보니 교실이 온통 시끌시끌했습니다. 교문 들어오는데 아이들 손에 뭔가가 하나씩 들려 있는 걸 보며 짐작은 한 일입니다. 어제 그렇게 얘기를 했는데도.


"친구가 좋으면 뭔가를 주고 싶은 건 당연한 거야. 하지만 꼭 이 날이어야 하는 걸까? 그리고 꼭 빼빼로여야만 하는 걸까?"

생일날 케이크를 먹고 소풍가서 김밥을 먹는 것처럼 빼빼로 데이에는 빼빼로를 먹어야 하지 않느냐고 아이들은 말합니다. 겨우 초등학생인데 말입니다. 빼빼로데이라는 행사 속에 교묘하게 숨어 있는 상술과 시장의 법칙이 이미 그 시스템의 열렬한 추종자가 되어 버린 아이들에게는 보이지 않는 것일까요?

빼빼로 데이로 인해 수혜를 보는 제과회사와 그 어떤 관계도 없는 내가 교사라는 이유로 회사를 폄하하자니 그렇고, 그렇다고 아이들의 생각에 편승하고 싶은 생각은 없으니 이럴 땐 어떻게 하면 좋을까요?

a 책상의 빼빼로. 여러 개를 사서 테이프로 붙여 하트 모양을 만들기 위해 이 아이는 용돈을 오래도록 모았다고 합니다.

책상의 빼빼로. 여러 개를 사서 테이프로 붙여 하트 모양을 만들기 위해 이 아이는 용돈을 오래도록 모았다고 합니다. ⓒ 송주현

"자, 각자 받은 빼빼로를 모두 책상 위에 올려 놓아보세요."

가방에서, 책상 속에서, 혹은 빼빼로 전용 쇼핑백에서 아이들이 주섬주섬 빼빼로를 꺼내 올려놓습니다. 많기도 해라. 책상이 좁아 보이는군요. 공부할 땐 이렇게 책상이 넘쳐 보이지 않았는데. 아이들의 마음도 이렇게 책상 가득 넘치는 빼빼로처럼 기분 좋고 이것을 보는 어른인 나도 기분이 좋으면 차라리 다행이겠구만.


"이왕 이렇게 되었으니 우리 이걸 통해 뭔가를 공부할 수 있겠는지 알아보자."

우선 각자 가지고 있는 빼빼로의 총 합산 금액을 내보기로 하였습니다. 빼빼로는 대체로 500원. 약간 장식과 내용물이 조금 더 있는 건 1000원대. 통이 조금 더 큰 건 3000원. 5000원짜리도 있습니다. 초등학생이 이 정도라면 한참 들뜨는 중고생들은 어느 정도일까요?


a 빼빼로와 카드. 무엇이든 나누기를 좋아하는 착하고 예쁜 아이들에게 빼빼로데이는 거스르기 힘든 명절인가봅니다.

빼빼로와 카드. 무엇이든 나누기를 좋아하는 착하고 예쁜 아이들에게 빼빼로데이는 거스르기 힘든 명절인가봅니다. ⓒ 송주현


a "같은 남자나 여자에게가 아니라 서로 남자나 여자에게 준 사람?" 물었더니 별로 없습니다. 모든 친구에게 하나씩 돌리거나 짝꿍에게 주거나 하는 방식인가봅니다.

"같은 남자나 여자에게가 아니라 서로 남자나 여자에게 준 사람?" 물었더니 별로 없습니다. 모든 친구에게 하나씩 돌리거나 짝꿍에게 주거나 하는 방식인가봅니다. ⓒ 송주현

내가 다니는 학교는 지방 작은 도시에 있는 초등학교. 우리 반 아이들은 모두 37명입니다. 많이 받은 아이는 빼빼로를 1만5000원어치 넘게 받았고 적게 받은 아이도 최소한 1000원어치는 받은 것으로 보입니다. 아이들은 빼빼로에 들떠 있고 공부할 생각은 없어 보이고. 내친 김에 한 명 한 명이 가진 빼빼로 가격을 합산해보니 20만 원이 조금 넘었습니다.

아이들도 생각보다 많은 금액에 놀라는 눈치더군요. 오늘을 위해 한 달 꼬박 용돈 없이 살았다고 푸념하는 아이도 있고 이번 달과 다음 달 용돈을 미리 받아썼으니 앞으로 군것질은 포기해야겠다고 넋두리 하는 아이도 있습니다.

"자, 이십 만 원으로 우리가 할 수 있는 일들을 하나씩 생각해보자. 당장 선생님은 곧 다가올 겨울에 자동차 스노우 타이어를 교체할 수 있는 비용이 되는구나."

어떤 아이는 자기가 다니는 두 군데의 학원비라고, 어떤 아이는 지난 여름에 다녀 온 서울 여행비라고, 또 어떤 아이는 엄마가 일주일 동안 포장마차해서 번 돈이라고 말합니다.

아이들은 각자 자기 가정의 경제상황을 하나씩 꺼내기 시작합니다. 저렇게 돈에 밝은 아이들이 왜 이렇게 많은 빼빼로를 사게 된 걸까. 도대체 제과 회사들의 마케팅은 얼마나 위대하기에 이 아이들로 하여금 그토록 소중한 용돈을 모두 털게 만든 것일까.

그 회사의 관계자들은 오늘 하루를 아이들이 풍요롭게 보내고 나면 나머지 날들은 아이들에게 내핍한 날들이 된다는 걸 모르는 걸까.

"이미 샀고 또 만지작 만지작해서 손때가 묻었으니 바꿀 수는 없겠지. 그럼 이 걸 다 먹을 거니?"

주고받는 생각은 했지만 다 먹을 생각까지는 미처 못한 아이들. 작년처럼 아마 상당수 빼빼로들은 작년에도 그랬던 것처럼 이가 썩는다는 엄마의 잔소리와 단 것이 몸에 안 좋다는 교사의 충고로, 혹은 아이들 스스로 이미 끝나버린 행사에 대한 흥미저하로 아이들 책상 서랍을 전전하다가 쓰레기통으로 고스란히 갈 겁니다.

"저는 우리 아파트 노인정에 드릴래요. 할머니들은 달콤한 것을 좋아하신대요."
"저는 동생에게 조금 주고 나머지는 냉동실에 넣어 두고 천천히 먹을래요."

천사같은 아이들. 이 아이들에게 빼빼로는 그저 설탕 많은 밀가루 덩어리의 삭막하고 멋없는 빼빼로만은 아닌 게로구나. 비록 제과회사의 눈에 보이는, 아이들 기르는 이의 처지에서 보면 정말 얄미운 상술에 의해 시작된 빼빼로 행사지만 아이들의 사랑스럽고 천진한 마음이 곁들여지면 노인정의 할머니들과, 그리고 가족들에게는 진짜 사랑의 빼빼로가 될 수도 있겠는 걸. 아이들이니까 가능한 일이지. 하지만 아이들의 이런 사랑스러운 마음이 뭔가에 의해 조종당하는 느낌이 드는 건 왜일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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