팥죽과 호박죽의 경계를 넘나드는 '호박죽'

나의 첫 살림선생이 가르쳐 준 호박죽

등록 2005.11.11 16:00수정 2005.11.11 18: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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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여 년 전 결혼하고 경기도 용인에 처음 둥지를 틀었다. 당시 나는 그야말로 '초짜' 주부였다. 결혼 전에 엄마 일 좀 도와 주고, 하다 못해 구경이라도 했더라면 신혼 초에 그렇게 힘들지 않았을 텐데……. 엄마 일은 엄마 일이지 내 일이 아니라며 무관심하게 살았던 벌을 톡톡히 받아야 했다.


밥 한 번 해 본 적 없고, 세탁기 한 번 돌려본 적이 없는 내게 맡겨진 빨래며 청소, 요리, 이런 주부가 감당해야 하는 일은 날 당황하게 하고, 심한 압박감을 주었다. 지금 생각 같아서야 애도 없고 둘이 사는 집에 뭔 일거리가 있는가, 하고 느껴지는데 당시는 산더미처럼 많은 일에 압사 당하는 느낌이었다.

그렇게 살림에 지쳐 있는 내 앞에 구세주가 나타났다. 그때 혜성처럼 나타난 프로페셔널한 주부는 살림에 대한 나의 욕구를 북돋아 주고 내가 아줌마로서 자리를 잡아가는 데 일조한, 일종의 살림 선생이었다. 그렇다고 이 사람이 나이가 많은 사람은 아니었다. 오히려 나보다 두 살 어린 사람이었다. 결혼도 나와 거의 비슷한 시기에 했는데 결혼 전에 엄마 일을 많이 도와줘서 살림에 대해 거의 감을 잡고 있었고, 선천적으로 생활에 대한 지혜가 있는 그런 사람이었다.

바로 같은 아파트에 사는 아줌마였는데, 어느 날 이 아줌마가 우리 집에 호박죽 한 그릇을 들고 찾아왔다. 우리 남편과 그 집 아저씨가 같은 사무실에서 일하니까 앞으로 친하게 지내자고 했다. 아가씨에서 아줌마로 바뀌어가는 과정의 진통을 겪고 있던 나는 이웃을 사귀는 방법도 모른 채 그냥 혼자 집에만 있었는데, 누군가 찾아와 친구가 되자니 정말 고마운 일이었다.

이렇게 그 아줌마는 내게서 말벗이 되는 친구이자 살림을 하나 하나 가르쳐 주는 살림 선생이 되었다. 결혼 전에 배워야 했던 걸 난 이 아줌마에게서, 나보다 나이도 어린 아줌마에게서 하나 하나 새롭게 배워가면서 살림에 맛을 조금씩 알아갔다.

팥이 많이 들어간 호박죽.
팥이 많이 들어간 호박죽.김은주
지금 만들 요리, 호박죽도 이 아줌마에게서 배운 요리다. 처음 우리가 만나는 자리에서 함께 호박죽을 먹으면서 너무 맛있다고, 방법을 물었다. 그 아줌마는 자기 집에서 직접 만들면서 내게 시범을 보이는 친절까지 베풀었다. 고맙고 그리운 아줌마지만 이사를 몇 번 하고, 시간이 지나면서 연락이 끊겼다. 허나 이맘때 호박죽을 끓일 계절이 돌아오면 그 사람이 생각난다.


호박죽은 내가 좋아하는 음식이었다. 강낭콩이 몇 알 들어간 노란 호박죽을 학교 식당이나 시장 골목 리어카 식당에서 사먹곤 했는데, 이 아줌마가 끓인 호박죽은 내가 지금껏 먹었던 호박죽하고는 조금 달랐다. 호박죽이 노랗지가 않고, 팥이 많이 들어가 팥죽처럼 보였다. 그러나 먹어 보면 호박 맛이 느껴지는, 호박죽임을 알 수가 있었다. 맛도 학교 식당에서 먹었던 그 호박죽보다 몇 배는 좋았다. 이 호박죽의 비결은, 팥을 많이 넣는다는 것이었다.

늙은 호박이 많이 나오는 요즘 같은 철이면 어김없이 겨울내 먹게끔 호박 서너 통을 샀다. 그리고는 하루 날 잡아 호박을 손질했다. 우리 나라 사람들은 겨울 반찬으로 김장을 하고, 다른 나라들은 잼을 만들기도 하고 피클을 만드는 곳도 있다. 우리 집에서는 호박 다듬는 게 겨울을 준비하는 큰 일 중 하나였다. 겨울 간식을 위해 호박을 준비하는 것이다.


큼직큼직하게 자른 호박.
큼직큼직하게 자른 호박.김은주
먼저 호박을 반으로 갈랐다. 나눠진 호박을 또 반으로 나누어 호박을 8등분을 하고는 씨를 털어낸다. 여기까지는 별로 어렵지가 않은데, 딱딱한 껍질 벗기는 일이 쉽지가 않았다. 그런데 몇 년 이 일을 계속 해오다 보니 나름의 요령이 생겼다. 과일 벗기듯이 하면 칼에 손이 베일 수도 있고 위험천만이니까 호박을 도마 위에 올려 놓고 껍질 위에 칼을 올려놓았다가 무 자르듯이 껍질을 벗겨내면 그래도 좀 수월했다.

큼직큼직하게 잘라서 1회용 비닐봉지에 호박죽 한 번 끓일 정도씩만 담아 냉동실에 얼렸다. 호박죽이 어려울 것 같지만 호박만 준비되면 그 어떤 음식보다도 만들기가 간단하면서 간식으로는 정말 좋았다.

물은 호박과 팥이 잠길 정도로.
물은 호박과 팥이 잠길 정도로.김은주
큼직큼직하게 자른 호박을 커다란 솥에 넣는다. 호박죽이 끓으면서 넘칠 수도 있고 젓기에 편하려면 좀 큰 솥이 좋다. 그리고 팥을 깨끗하게 씻어서 호박이 들어 있는 솥에 쏟아붓는다. 물은 호박과 팥이 완전히 잠길 정도로 붓고 센 불에서 끓인다.

호박이 끓고 있는 동안 불려 놓았던 한 컵 정도의 쌀을 분쇄기에 물과 함께 넣고 갈면 뽀얀 물이 생기면서 쌀이 갈아진다. 곱게 갈수록 더 빨리 골고루 익게 되니까 최대한 곱게 가는 편이 좋다. 이때 찹쌀로 갈아서 해도 되고, 슈퍼에서 파는 찹쌀가루를 물에 타서 써도 되는데 맛은 찹쌀을 불렸다 쓰는 게 나은 편이다. 또 맵쌀을 쓸 수도 있다. 나 같은 경우는 찹쌀의 끈기를 별로 좋아하지 않기 때문에 맵쌀을 써서 "후루룩" 부담 없이 먹는 걸 좋아하는 편이다.

호박이 다 으깨질 때까지 저어준다.
호박이 다 으깨질 때까지 저어준다.김은주
호박과 팥이 완전히 다 익어서, 호박은 거품기로 저으면 완전히 으깨질 정도가 되고, 팥도 손가락으로 누르면 힘없이 으깨질 정도가 되면 이제 쌀가루를 넣고 거품기로 저으면 된다. 이때 설탕을 넣어서 단맛을 가미해야 호박죽이 더 맛있어진다. 끓기 시작하면 불을 약하게 해서 1분 정도 더 끓이면 호박죽이 완성된다.

우리 집은 이렇게 겨울에 가끔 호박죽을 끓여 먹었다. 냉동실에 호박을 많이 잘라뒀기에 겨울 내내 쉽게 해먹을 수가 있었다. 그리고 호박죽을 많이 끓여서 냉장 칸에서 보관하면서 차갑게 먹어도 또 나름대로 특별한 맛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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