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가을의 끝에서 서림숲에서 띄웁니다

등록 2005.11.11 15:53수정 2005.11.11 21: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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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 계절은 가을의 끝에 서 있습니다. 이 가을의 막바지는 낙엽의 생명을 마지막으로 온전히 물들이고 떨어지는 그 선명함 때문에 어찌할 수 없을 만큼 아름답습니다.

가을이 간다는 것이 아쉽지 않습니까? 이런 계절이 되면 청소년 때에는 누군가에게 열심히 편지도 써보았지만 이제는 펜으로 하얀 편지지에 글을 써본 지도 너무 오래 되었습니다. 컴퓨터에 글을 쓰기 시작하고 나서부터 펜으로 글씨를 쓰는 것을 잊어버린 듯합니다. 하지만 이 가을의 끝에서 편지를 쓰고 싶어졌습니다.


그런데 누구에게 편지를 써야 할까요, 오래 전 친구는 이제 어른이 되어 편지를 받는 것이 유치할 수도 있을 것입니다. 한때 나의 마음을 설레게 하여 새벽이 오도록 편지를 써 보내게 하던 그 사람도 이제는 남의 사람이 되어 어디에 사는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이 아름다운 늦가을의 모습을 혼자서만 볼 수가 없네요. 이 가을의 진한 색감과 마지막 향기를 보여드리고 싶습니다. 그래서 이렇게 가을의 향기를 띄워 보냅니다.

a 가을의 끝에 선 서림숲은 아름답다.

가을의 끝에 선 서림숲은 아름답다. ⓒ 정윤섭

저 먼 땅끝 동네에 가면 서림공원이 있습니다. 서림공원은 해남사람에게 정신적인 안식처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곳에는 수 백 년 묵은 아름드리 고목나무 수십 그루가 숲을 이루고 있습니다. 이 숲 속에 앉아 있으면 장엄한 노거수들 속에서 깊이 모를 정신적 안정감을 느낄 수 있답니다.

이곳은 지금 겨울과 봄, 여름이 지나고 가을의 끝에 와 있습니다. 그리고 울창한 고목나무들이 잎을 하나씩 떨어뜨리면서 나뭇가지 사이로 파란 하늘이 드러나고 있습니다. 이 서림숲이 고목나무 숲이 된 것에 전설 같은 이야기가 전해져 옵니다.

a 고목나무 아래는 항상 여유로움이 머문다

고목나무 아래는 항상 여유로움이 머문다 ⓒ 정윤섭

일설에 의하면 이 고목나무 숲은 원님이 사는 해남고을에서 유일하게 한 쪽이 훤히 트여 있는 곳으로, 풍수에서는 이처럼 허한 곳으로 기운이 빠져나간다고 생각하여 비보의 역할로 숲을 조성했다고 합니다. 그래서 서쪽의 허한 곳을 막아주기 위해 느티나무를 심고 숲을 조성했다는 것입니다.

이곳은 매일 주로 노인들과 아이들이 숲 그늘 밑에서 휴식을 취하다 돌아갑니다. 김지하 시인은 1985년 이곳 해남 고을에 와서 머문 적이 있는데 이 서림공원에서 자신의 으깨어진 심신을 추스렸답니다.


이곳이 정신적인 안식처가 된다는 것은 단순한 고목 숲에서 나오는 정기뿐만이 아닙니다. 민족정신의 원류라고 할 수 있는 단군전이 소나무 숲에 정연히 들어서 있습니다. 이곳에 단군전이 세워진 것에도 그 내력이 있습니다.

a 서림숲은 단군전을 원림의 공간으로 느끼게 한다.

서림숲은 단군전을 원림의 공간으로 느끼게 한다. ⓒ 정윤섭

이곳 단군전에는 단군영정이 모셔져 있는데 단군전의 영정은 해남 화산 금풍마을 출신의 당시 휘문고보 학생이던 이종철에 의해 모셔진 것입니다. 1920년대 이종철은 휘문고등보통학교 재학시절에 수학여행 차 구월산 삼성사(三聖祠)를 방문하였는데 일제의 만행으로 단군성조의 존영과 사당이 폐허가 되어 있었습니다.


이를 안타까이 여긴 이종철은 영정을 고향인 화산면 금풍리로 모셔와 전각을 세우고 개천절과 어천절(御天節)에 제향하였다고 합니다. 이곳 유지들은 뜻을 모아 1957년에 전각을 세우고 현재의 위치에 단군 영정을 모셨다고 합니다.

a 해남 고을을 다스린 원님들의 선정비

해남 고을을 다스린 원님들의 선정비 ⓒ 정윤섭

a 서림숲과 공원 안의 효열비각

서림숲과 공원 안의 효열비각 ⓒ 정윤섭

이곳 서림공원에는 해남고을에서 태어나 우리나라를 지키고자 몸을 바쳤던 독립운동 열사들을 기리는 3·1운동 기념비도 있어 해남고을의 중요한 정신적 원천이 되고 있습니다. 이와 함께 해남고을을 다스리다 간 수많은 목민관들의 선정비들이 남아 있으며, 정절을 지키기 위해 목숨까지도 바치던 옛 여인들에 대한 열녀각이 있어 과거와 현재가 조화롭게 공존해 있는 곳입니다.

a 낙엽도 눈처럼 쌓인 때가 있다

낙엽도 눈처럼 쌓인 때가 있다 ⓒ 정윤섭

a 마지막은 항상 애절할 만큼 찬란하다.

마지막은 항상 애절할 만큼 찬란하다. ⓒ 정윤섭

이것들은 서림숲의 나무들이 고요히, 그리고 고고하게 지켜주고 있습니다. 이 서림숲은 모든 계절이 아름답습니다. 그러나 이 가을의 끝은 처절할 만큼 더 아름답습니다. 이 나무 아래 서 있으면 낙엽들이 연이어 비처럼 떨어집니다.

봄과 여름 이 가을 동안 자신의 일생을 채우다 조락하는 낙엽을 바라보십시오. 더 이상 변색될 수 없을 만큼 한 시간의 끝에서 아슬하게 매달리다 허공에서 지상으로 빙글빙글 추락하는 낙엽을 보면 비애감이 앞섭니다. 하지만 그것은 처연할 만큼 아름다운 모습이기도 합니다.

이 서림숲이 겨울 동안은 조금 쓸쓸하고 찾아오는 발길도 뜸하겠지만 봄이 되면 이곳은 다시 생명으로 움틀 것입니다. 겨울을 맞이하는 이들의 마음이 따뜻해지기를 기원하며 이 가을의 끝에서 띄웁니다.

덧붙이는 글 | 가을의 끝을 아쉬워하며 독자여러분에게 띄웁니다.

덧붙이는 글 가을의 끝을 아쉬워하며 독자여러분에게 띄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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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문화를 중심으로 지역의 다양한 소재들을 통해 인문학적 글쓰기를 하고 있다. 특히 해양문화에 관심을 가지고 <16세기 해남윤씨가의 서남해안 간척과 도서개발>을 주제로 박사학위를 받은 바 있으며 연구활동과 글을 쓰고 있다. 저서로 <녹우당> 열화당. 2015년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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