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나무에 숨듯 살며시 나타나는 강릉 정자각.한성희
적갈색 방풍판의 배흘림 곡선은 간소한 정자각의 품위와 미적 감각을 살려주는 백미다. 왕릉은 왕궁처럼 호화스럽거나 화려한 건물이 줄지어 있는 곳이 아니다. 왕릉에 눈높이를 맞추면 내로라하는 명문양반가 묘를 봐도 눈에 차지 않는다.
웬만큼 족보가 있다는 가문의 묘에 오히려 왕릉보다 더 화려한 재실과 사당을 지어놓고 있지만 왕릉의 품위는 절대로 따라갈 수 없다.
"에구, 아무리 치장해도 왕릉에 대면 어림도 없어!"
이런 소리가 저절로 나온다. 왕릉과 일반 묘를 비교한다는 것 자체가 무리이고 저런 소리가 나오는 건 당연한 일이긴 한데, 눈만 높아져서 전생에 능참봉이었을지도 모르는 주제에 우쭐대는 격이다. 갑자기 조선왕릉에 미쳐서 연재를 쓰고 있으니 전생이 능참봉쯤 될 거라고 생각한다.
왕릉의 멋은 숲과 풍수와 한 시대를 풍미했던 왕과 왕비라는 명성, 그리고 왕과 왕비가 아니면 흉내낼 수 없는 품위를 느낄 수 있다는 데 있다. 얼핏 보기에 똑같아 보이는 상설구조지만 왕릉마다 스며 나오는 색깔도 다르고 개성도, 숨어있는 이야기도 다르다.
강릉을 들어서면 이런 기대를 충족시키기에 충분한 호젓한 숲길을 걸어 들어간다. 13대 명종(1534-1567)과 인순왕후(1532-1575) 심씨의 쌍릉인 강릉(康陵)은 태릉에서 1km 정도 떨어져 있고 비공개 왕릉이다.
태릉이 연간 30만 명의 관람객이 찾는 활짝 열린 왕릉이라면 강릉은 문을 닫아걸고 숨어있는 한적한 왕릉이다. 권세를 휘둘렀던 어머니 문정왕후의 치마폭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시달렸던 명종의 마마보이 성품대로 지금도 기가 죽어 있는 왕릉이다. 태릉의 주인공이 누군지는 알아도 강릉은 잘 모르는 사람들이 태반이니 생전의 행적과 죽은 후의 모습도 어찌 이리 닮았을꼬.
여담이지만 왕릉에 관계된 이야기 중 왕이 죽고 나서 명당자리를 찾아 묻어도 생전의 팔자를 벗어나지 못한다는 말이 왕릉 관계자들에게 회자된다. 제 아무리 천장을 해도 그 팔자를 벗어나지 못하고 다시 운명대로 들어간다니 왕과 왕비는 하늘이 내린 운명이라 벗어나지 못하는 팔자를 지니고 태어났나 하는 운명론까지 뒷담화에서 거론된다.
일국의 왕과 왕비를 지냈던 운명이 평범한 사람의 인생과 어찌 비교될까 하지만 이런 뒷담화도 왕릉답사를 하다보면 저절로 공감이 간다. 태강릉의 현재 모습도 당시 문정왕후와 명종의 모습과 크게 다르지 않으니 말이다.
그러나 오히려 활짝 열린 태릉보다 깊은 숲 속에 숨어 문을 닫아걸고 있는 강릉이 내 왕릉답사 만족도가 훨씬 높다. 잘생긴 적송이 품위 있게 둘러서고 청아한 소나무 향이 뿜어나오는 강릉은 끌어당기는 매력이 있다.
마마보이 국왕 명종
명종은 12세에 왕위에 올라 20세까지 문정왕후의 수렴청정을 받았으며 그 이후도 국정은 거의 문정왕후의 손에서 좌우됐다. 22년 간 재위했지만 왕의 종아리를 치며 욕설도 서슴지 않던 무서운 어머니의 압박에서 벗어난 기간은 2년도 안 된다.
국가경영자가 어머니에게 눌려서 숨소리 한 번 크게 내지 못하고 지낸 결과 매관매직, 무거운 세금, 을묘왜변, 임꺽정 출현 등 국정이 어지러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