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을 가고 겨울 오는 길목에 서다

<바위나리와 떠난 여행 20> 섬강 건너 등산로에서 지는 가을을 바라보다

등록 2005.11.13 19:03수정 2005.11.14 10: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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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른 아침 섬강 건너 등산로를 찾았습니다. 갈길 바빠 급하다고 허둥대는 가을이란 녀석에게 괜찮으니 더 머물렀다 가라고 안개비가 촉촉하게 내렸습니다. 갈 때 가더라도 젖은 몸 말릴 동안 한숨 돌리고 쉬었다 가란 뜻이겠지요.

이기원
입동이 지난지도 벌써 일주일이 다 되어갑니다. 겨울 문턱에 서서 지는 가을이 아쉽다고 매달리는 게 얼마나 부질없는 일인지 알만한 사람은 다 압니다. 그렇다고 그 아쉬움을 쉽게 버릴 수 없습니다.


강 건너 갈대가 무리지어 흔들리고 있습니다. 더러는 꺾이고 더러는 상했어도 부는 바람 따라 가을 한 철 넉넉히 흔들리며 살았습니다. 아침이슬 젖은 몸 흔들어 말릴 때와, 따가운 햇살 받아 넉넉히 흔들릴 때면 싱그러운 아름다움이 함께 묻어났습니다.

이기원
가을이 간다는 건 그런 싱그러움이 함께 사라지는 것입니다. 그래서 더 아쉽고 서운합니다. 저 갈대들도 사나운 겨울 바람 앞에 서면 사시나무보다 더 심하게 요동치며 흔들리겠지요. 제 앞에 닥칠 시련을 아는지 모르는지 녀석들은 안개비에 젖은 몸 살랑살랑 흔들고 있습니다.

상한 갈대라도 하늘 아래선
한 계절 넉넉하게 흔들리거니
뿌리 깊으면야
밑둥 잘리어도 새순은 돋거니
충분히 흔들리자 상한 영혼이여
충분히 흔들리며 고통에게로 가자

뿌리 없이 흔들리는 부평초 잎이라도
물 고이면 꽃은 피거니
이 세상 어디서나 개울은 흐르고
이 세상 어디서나 등불은 켜지듯
가자 고통이여 살 맞대고 가자
외롭기로 작정하면 어딘들 못 가랴
가기로 목숨 걸면 지는 해가 문제랴

- 고정희, <상한 영혼을 위하여> 중에서



이기원
갈대숲 지나 한참을 오르다보니 마른 풀잎에 주렁주렁 빗방울이 달려 있습니다. 멀리서 보면 하얀 열매처럼 보입니다. 가까이 가서 눈여겨보면 맑고 투명한 구슬처럼 보입니다. 마른 풀 다시 살아나 눈부신 열매 맺은 것처럼 여겨집니다. 빗방울 열매가 바짓가랑이에 지천으로 묻어 금방 촉촉하게 젖기 시작했습니다. 낙엽이 되어 떨어진 잎도 많지만 떨어지지 않은 단풍은 여전히 고운 가을 색깔입니다.

이기원
산을 오르다 문득 내려다보니 갈대 하나가 빗방울을 머금고 있습니다. 오를 땐 몰랐는데 돌아서 내려다보니 길을 막고 있는 모습입니다. 그 갈대 너머로 펼쳐진 풍경도 여전히 가을입니다. 눈앞에 보이는 대로 세상을 사는 사내의 눈에는 그림처럼 아름다운 가을의 풍경입니다.


하지만 저 길 너머 강 건너에 사는 이들은 보이는 세상보다 한 걸음 먼저 일어나 한 걸음 먼저 준비하며 살아갑니다. 입동 지나면서 힘겹게 농촌을 지키며 살아오신 허리 굽은 할머니들은 김장 준비, 그 곁을 지키고 서 계신 할아버지들은 메주 쑤어 매달 준비를 하십니다.

그렇게 가을은 가고 겨울이 한 발 두 발 다가섭니다.

덧붙이는 글 |  제 홈페이지에도 실었습니다.

덧붙이는 글  제 홈페이지에도 실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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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서 있는 모든 곳이 역사의 현장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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