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도 못 끓여먹는 시가 책이 되어 돌아오다

'왕년의 시인' 남편의 시가 사랑시 모집에 뽑히다니...

등록 2005.11.15 21:14수정 2005.11.16 11: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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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마 전 언제나처럼 큰아이를 유치원에 보내고 혼자서도 잘 놀아주는 작은 아이를 옆에 앉혀놓고 컴퓨터를 켰다. 오란 데는 없어도 찾아갈 곳은 무한대로 많은 인터넷 세상이기에 여기저기 사이트를 뒤적거리며 다니다가 우연히 발견한 '사랑 시 모집' 문구!


사랑시가 담겨있던 파란 봉투
사랑시가 담겨있던 파란 봉투주경심
KBS 라는 프로에서 연인이나 사랑하는 사람간에 주고받은 시를 모집한다는 문구였다. 물론 나하고는 하등 상관없는 문구이다. 일기 쓰고, 반성문 쓰는 거라면 모를까, 참기름 짜듯 단어를 짜고 또 짜서 만드는 '시'는 나처럼 모든 감정이 입으로 쏟아져나오는 사람에게는 가당치도 않은 문구였다.

그런데… 그 순간 왜 남편의 이름 석 자가 떠오른 것일까? 총각시절 어느 신문사에 시를 보내서 맥주 한 상자를 상품으로 받았다는 남편은 그 시절에 써놓은 시를 지금도 몇 편 간직하고 있을 만큼 한때는 감성이 수돗물처럼 뚝뚝 흘러내리는 시인이었던 것이다.

그리고 그 시인에게서 나 역시 지난 6월 13일인 6주년 결혼기념일에 처음으로 받은 한 편의 시가 있다는 것이 전광석화처럼 떠올랐다.

혹시나 하는 마음으로 시를 가져와서는 눈치코치 구단인 내가 아무리 읽어도 이해가 되지 않을 만큼 심오함 그 자체였던 남편의 시를 노니 염불하는 마음으로 게시판에 올려놓았다. 하지만 솔직히 뭔가를 기대하고 올린 것은 아니었다.

그런데 그로부터 얼마 뒤 프로그램에서 연락이 온 것이다. 수상작 중에 남편의 시가 포함이 되었다는 것이다. 물론 최우수상은 아니었지만…. 최종심사에 오른 다섯 편 중에 남편의 시가 포함이 되었다고 하니 가문의 영광을 넘어서 이제껏 "내가 왕년에 또 시인 아니었냐?"며 자칭 시인이던 남편을 '왕' 무시했던 내가 얼마나 부끄럽던지….


상품으로는 프로그램에서 소개되었던 책 중 다섯 권이 부쳐져왔다.

상품으로 받은 책!!
상품으로 받은 책!!주경심
해서 쑥스럽지만 이 자리에서 남편의 고백시를 소개해 볼까 한다.


황량한 벌판에
하이얀 민들레씨앗
하늘에서 내려와
뿌리를 내리고
한 포기 두 포기
조금씩 늘어나
첫 겨울 지나고, 비 한 줌 내리지 않는 가뭄이 와도
그 곳을 지킨 지
어느덧 여덟 해
눈걸음걸음 걸어도 보이는 곳엔
온통 대지엔 노오란 민들레
이 세상 끝나는 곳까지 민들레
이 세상은 민들레 뿐이다…


만난지 여덟 해만에 받은 첫 고백이자 선물이었다. 그런데 선물이랍시고 내민 파란봉투가 처음엔 얼마나 미덥잖고, 마뜩찮던지….

왜 안 그렇겠는가? 파란 봉투 안에 들어있던 것은 상품권도 아니고, 빳빳한 현찰도 아니고 영화 티켓도 아닌 이 시 한편이 전부였으니 얼마나 실망스럽던지…. 처음으로 받은 꽃 선물 앞에서 "국도 못 끓여먹는걸 뭣 땜에 돈을 주고 사왔어요. 다음부턴 돈으로 줘요!!"라고 쏘아붙였던 내가 시 역시 국도 못 끓여먹는 것이어서라기보다는 도통 시 자체를 이해할 수 없다는 것에 자괴감을 느끼며 더 크게 실망을 했었다.

그런데 그 국도 못 끓여먹는 시 한 편이 귀하디 귀한 책이 되어 돌아왔으니 이젠 만천하에 남편의 시를 자랑해도 되겠지? 혹, 시를 이해하신 분은 풀이를 해줘도 무방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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