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등학생 노트 사다가 글씨 연습해라"

<취업도전기⑥>' 이 나이'에 기초 한글 교재 산 이유

등록 2005.11.18 17:51수정 2005.11.19 11: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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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 내일부터 초등학생들 쓰는 노트 사다가 글씨 연습해서 아버지한테 검사 맡아라."
"예?"


3~4일 전 아버지는 내게 반드시 '수행'하라며 한 가지 과제를 던져주셨다. 그건 바로 하루에 10장씩 글씨 쓰는 연습을 하고 그것을 아버지에게 보여 달라는 것이었다. 비록 많은 생을 살지는 않았지만 아무리 그래도 글씨 연습을 할 나이는 아니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아버지가 이어 하신 말씀에 반박할 말이 없었다.

아버지와 나누었던 필담입니다.^^
아버지와 나누었던 필담입니다.^^양중모
"야 이 녀석아. 니가 메모지에 써 놓고 가는 글 보면 무슨 글씨인지 도저히 못 알아보겠더라. 그래 가지구 어디 가서 취직도 못해."

요즘은 컴퓨터로 작업하는 시대라며 바로 반격에 들어가려 했지만 이미 예상하셨는지 미리 방어막을 치는 아버지에 의해 시도조차 해 볼 기회를 얻지 못했다.

"요새는 물론 컴퓨터로 이력서 넣고 하지만 그래도 여전히 글씨 쓸 일이 있는데 그렇게 글씨를 못 써서 되겠냐. 글씨가 그 사람을 나타내 준다는데."

아버지 얘기처럼 나는 글씨를 정말 못 쓴다. 중고교 시절 숙제를 정성껏 해 갔는데 이런 억울한 말을 들은 적도 있다.


"야, 너 누가 숙제를 동생한테 시키라고 했어?"

동생은 있지도 않다고 항변했지만, 초등학교 저학년이 쓴 듯 '날라가는' 글씨체를 보면 그런 오해를 살 만 하다는 생각이 들기도 했다. 물론 고칠 생각을 해보기도 했다. 하지만 어디 그게 말처럼 쉬운 일이던가. 이미 습관이 되어 빠르게 쓰다보면 다시 엉망인 원래의 글씨체가 나오곤 했다.


그래도 별탈 없이 살아왔는데 아버지는 더 늦으면 영영 고칠 수 없을 것이라는 생각을 하셨나 보다. 어머니가 아프신 후부터 아버지와 나는 종종 필담을 주고 받았다. 어머니가 말하는 것도 힘들어하셨기에 아버지는 이런저런 주의사항을 내게 메모로 남기곤 했다.

당시 난 새벽에 중국어 학원에 다녔고 지금도 새벽에는 헬스를 다니기 때문에 아버지 볼 시간이 없다. 그래서 아버지는 여전히 할 말이 있으면 메모지에 써 놓으신다. 그리고 나 역시 집에 늦게 들어올 것 같은 날 아버지께 메모를 남긴다.

그런데 이것이 문제가 된 것이다. 아버지는 이 메모지를 마치 암호해독 하듯 읽어야 했고 일차적으로는 그런 불편함을 해소하기 위해 명령에 가까운 권유(?)를 하신 셈이다.

나 자신을 위해서도 해야겠다는 생각은 들었지만 초등학교 앞 문방구에 가서 글씨 쓰는 공책을 사러 간다는 게 무척이나 화끈거렸다.

부끄러움을 극복하고 산 책입니다.
부끄러움을 극복하고 산 책입니다.양중모
"아저씨, 그... 뭐냐... 초등학생들 글씨 연습하는 거 있잖아요? 그거 어디 있어요? 하나만 주세요."

문방구에 들어가서 난 나이보다 많이 들어보이는 내 얼굴을 최대한 '활용'하기로 마음먹고 조카나 아들이 필요해서 그런 것인 양 자연스럽게 물어보려고 노력했다.

"글쎄요. 어디보자. 글씨 연습하는 거요? 아 여기 있네."

문방구 아저씨가 집어준 책은 초등학생용 글씨쓰기 연습책이었다. 글씨 쓰기를 연습하면서 단어도 배울 수 있게 해놓은 책이었다. 그러나 그 책에는 정가도 쓰여져 있지 않고 내용이 별로 마음에 들지 않았다. 그래서 다른 교재를 찾아보기 시작했다. 그리고, 드디어 찾은 책!

그건 바로 <기초 한글 쓰기 유치원 교재 쓰기 공부>라는 교재였다. 초등학생용보다 더 수준이 떨어지는 것이었지만 이미 부끄러움은 감수하기로 한 마당이었다. 참고 사기로 했다. 그리고 사실 그보다 더 매력적인 건 이 교재의 가격이 무려 2000원이나 한다는 점. 돈 함부로 쓰는 것을 싫어하시는 아버지의 성격상 한 권에 2000원이나 하는 교재를 매번 사서 연습하라고 권유하실 리는 없을 것이라는 점이다.

분명 나를 위해서 필요한 일이긴 하지만 그래도 애들마냥 글씨를 쓰고 있자니 싫은 건 어쩔 수 없는 노릇이었다. 예상대로 아버지는 처음 교재를 보고는 괜찮다 하셨지만 가격을 보시더니 지나치게 비싸다라는 의견을 내셨다. 그리고 이어지는 말.

"그냥 그 네모칸 그려진 것으로 하면 되잖아."

어린 시절 '깍두기 공책'으로 불렀던 그 공책에 글씨 연습을 하라는 것이었다. 유치원 교재보다 훨씬 많은 글을 써야 하는 그 공책을 사야 한다면 정말 너무 짜증날 것 같았지만 글씨 연습을 시작하고 나서 조금씩 생각이 바뀌었다.

'글씨는 그 사람의 마음이다'라는 말을 100% 믿지 않지만, 좋던 인상도 글씨를 못 쓰는 걸 보면 좀 바뀌는 것 같기도 하다. 그리고 계속 글을 쓰다보니 내 글씨가 마치 악당이 쓴 듯한 글씨인 듯한 느낌이 들었다. 그리고 이걸 이렇게 꺽으면 더 예뻐질까? 이렇게 둥글게 돌리면 괜찮아질까라고 생각하다보니 재미도 있다.

아주 기초적인 연습부터 들어갔습니다.
아주 기초적인 연습부터 들어갔습니다.양중모
그래서 다음에는 일부러 '깍두기 공책'을 살 예정이다. 언론사 시험 준비하려면 어차피 읽어야 할 책도 많은데 그 책들을 옮겨 적으면서 글씨 연습을 하기로 마음 먹었다. 더 생각해보니 나중에 자식들 앞에서 보기 흉한 글씨체를 보이는 것도 창피한 일일테니 지금이라도 고쳐야 할 테고 이왕 고치는 거라면 좋은 글을 써가면서 고치고 싶어진 것이다.

그리고 그 때마다 한 가지를 꼭 되뇌이면서 쓰기로 했다. 그렇게 하면 글씨 연습뿐 아니라 내 삶의 태도에도 긍정적 영향을 미칠 것이라 생각했기 때문이다.

"내 마음을 쓰는 것이니, 잘 써야 해."

덧붙이는 글 | 그나저나 정말 고칠 수 있을지 걱정이네요. 글씨 정말 못쓰거든요. 아 고쳐야 할텐데...

덧붙이는 글 그나저나 정말 고칠 수 있을지 걱정이네요. 글씨 정말 못쓰거든요. 아 고쳐야 할텐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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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을 넓게 보고 싶어 시민기자 활동 하고 있습니다. 영화와 여행 책 등에 많은 관심을 갖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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