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의 운동엔 '인간'이 빠져 있었다"

운동권 소재 장편소설 <난주> 쓴 장필선씨

등록 2005.11.19 18:19수정 2005.11.21 11: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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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0, 90년대 학생운동 출신 노동운동가들의 꿈과 고뇌, 사랑을 그린 장편소설 <난주> 낸 장필선씨 ⓒ 오마이뉴스 남소연

책의 앞표지에 인쇄된 '장필선 장편소설 난주'라는 제목을 보고서는 <난주>(전3권·필맥 펴냄)가 어떤 작품인지 쉽게 짐작이 가질 않았다. 요즘이 어떤 때인데 3권짜리 소설을 펴내는 간큰(?) 작가와 출판사가 있는가 싶어 그냥 책을 들고 있던 손의 손목만 비틀어 뒷표지를 보았다. 그 곳에는 '팔구십 년대의 꿈과 사랑, 고뇌와 좌절-'이란 제목 아래 깨알 같은 글씨가 인쇄돼 있었다.

"이 소설은 1980~1990년대의 변혁운동과 운동권을 주제로 한 최초의 장편소설이다. 이 책에는 당시 학생 출신 운동가들이 노동현장에 들어가기 위해 각고의 노력으로 신분위장을 하는 모습, 사회주의 이론 학습에 심혈을 기울이는 모습, 현장 활동가와 노동자 사이에 갈등하고 협력하는 모습, 형사의 미행을 따돌리기 위한 갖가지 묘안들, 심지어 활동가들 사이의 미묘한 신경전과 갈등까지 숨김없이 솔직하게 묘사돼 있다."

출판사의 다소 과장된 홍보 문구이기도 하거니와 '운동권'을 소재로 했다는 이유로 고물라디오에서 나오는 '아, 옛날이여!' 쯤으로 취급하려던 나의 생각이 바뀐 것은 이 글 끝에 나오는 '심지어 활동가들 사이의 미묘한 신경전과 갈등까지 숨김없이 솔직하게 묘사돼 있다'는 구절이다.

직업적 책읽기 방식으로 가장 짧은 시간에 이 작품을 훑어보았던 난 인터뷰를 준비하면서 군데군데 좀 더 자세히 들여다보다 아예 다시 정독했음을 고백한다. 여기서 이 작품에 대한 문학적 평가는 무의미하다. 내가 읽은 것은 소설이 아니라 역사였기 때문이다.

11월 17일 서울 목동의 한 찻집에서 <난주>의 작가 장필선(41)을 만나 인터뷰했다.

10년 전 원고 그대로 출간하다!

장필선이 <난주>를 쓴 것은 1992~1993년 무렵이었다고 한다. 애초 장필선은 200자 원고지로 5천여 매나 썼었는데, 출판을 할 요량으로 4천여 매로 줄였다. 그러나 그는 그때 이 원고를 책으로 내지는 않았었다. 그리고 10여년이 흐른 2005년 늦가을, 장필선은 책상 서랍 깊은 곳에서 잠자던 원고뭉치를 꺼내 세상에 내놓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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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오마이뉴스 남소연

"운동하는 분들한테 혹시 누라도 끼칠지 모른다는 노파심이 드는 등 제 자신이 저어하는 마음이 있어서 출판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이젠 우리 사회도 많이 달라졌다고 생각합니다. 이런 이야기도 충분히 나눌 수 있다고 판단하여 용기를 냈습니다. 막상 책 내고 나니까 담담합니다."

이번에 출간한 원고는 10여 년 전에 썼던 것을 그대로 사용했다. 손을 봤다면, 바뀐 한글맞춤법, 이를 테면 "했읍니다"를 "했습니다"로 바꾸는 정도에 그쳤다.

고치고 싶은 충동을 강하게 느꼈음에도 그렇게 했던 것은 글을 쓸 때의 입장과 마음을 고스란히 전달하기 위해서다. '호치키스' 같은 하찮은 용어 하나에서도 당시의 분위기를 그대로 느낄 수 있기 때문이다.

이 작품의 배경은 1980년대 후반 활발한 민주화운동에 힘입어 지하 전위정당을 키워가던 운동권이 1990년대 초 소련을 비롯한 사회주의 국가들의 붕괴로 인해 서서히 쇠락해가고 있었던 때였다.

미술을 하고 싶었으나 부모의 강한 반대로 불문과에 진학하는 작가의 자전적 캐릭터를 상당부분 닮은 주인공 난주와, 강철 같은 의지로 사회주의에 대해 추호의 의심도 없이 매진하며 기존 운동권의 이념을 교조적으로 대하는 강민, 강한 의지와 열정을 갖고 있으나 유연하고 포용적이며 사회주의 사상이 탁월한 선전가 성진 사이의 삼각 러브스토리가 씨줄로, 운동권의 조직운영과 활동방식, 전략과 전술, 조직 내 인간적인 갈등과 사상투쟁의 과정이 날줄로 짜여졌다.

'정신적 생존'을 위해 써야 했다!

"난주는 전위라고 자처하는 자신들이 과연 일반인보다 나은 것이 무엇인지 반문해 보았다. 사회주의 사상을 더 많이 알고 있다고 해서, 정치경제적 상황을 더 잘 해석한다고 해서 과연 남들을 지도할 자격이 있는 건지, '인간'이 없는 이론만으로 과연 어느 정도 지도력을 가질 수 있을 것인지…. 난주의 회의는 길게 이어졌다."(2권 328쪽)

이렇듯 장필선이 작품에서 진술한 것처럼 그가 이 작품을 쓴 것은 '인간이 없는 운동'에 대한 자기반성에서 출발했다. 인간이 없는 운동은 의미가 없다고 생각한 그는 자신의 '정신적 생존'을 위해서라도 이 문제를 꼭 풀어야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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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오마이뉴스 남소연

"당시 우리는 인간적인 사회를 만들자고 목숨을 걸고 치열하게 운동을 하고 있는데, 정작 우리 자신들의 모습을 들여다보니 전혀 인간적이지 않았습니다. 우리 조직은 왜 우리들의 동료들을 소외시키고 좌절시키는가, 하는 문제가 저에게는 절실하게 다가왔습니다."

물론 장필선의 이같은 생각은, 그 자신에게는 너무도 절실한 것이었겠지만 조직에게는 한가한 소부르주아적 운동가의 투정처럼 느껴졌을지도 모르겠다.

대학에 들어가면서부터 시작해 당시 운동 경력이 어느덧 10여년이나 쌓인 장필선은 '인간 없는 운동'에 대한 회의가 점점 크게 부각되면서 감당할 수 없는 상황에 이르렀다. 임계점에 도달한 셈. 그래서 그는 자신의 존재증명이나 다름없었던 '운동'을 스스로 그만두면서 많은 사람과 얘기하고 싶어 고해성사하는 심정으로 이 작품을 써 내려갔다.

소설이기에 할 말 다 할 수 있었다!

애초 장필선은 자신의 이런 문제의식을 다른 동료들과 직접 이야기하면서 풀어보려고 했지만 여의치않아 팸플릿이나 전단 같은 홍보물을 활용해 볼까 하다가 소설을 선택했다.

잡지 기자로 지내면서 기사를 썼던 경험이 글쓰기 부담은 줄여줬지만 소설의 기본 얼개조차 제대로 잡지 못하는 문외한이었던 터라 남들보다 서너 배는 더 고생하며 글을 썼다.

그러나 그는 소설이란 장르가 좋긴 좋았다고 느꼈다. 픽션이란 구실로 속내를 다 털어놓을 수 있고, 또 하고 싶은 말을 하기 위해 없는 인물을 만들어낼 수도 있기 때문이었다.

"운동가란 도덕적이고 의식적인 인간이 되려고 노력해야 된다고 생각합니다. 근본적으로 선한 인간에 대한 신념에서 출발하고 인간의 선이 최대로 구현된 사회를 지향하는 마르크스주의자라면 당연히 개인적으로도 자기개조와 자기개혁을 위해 노력해야 한다고 봅니다. 자기개조의 과정이 사회적 혁명의 과정이고 자기개혁의 연장이 사회개혁이어야 하기 때문입니다."

그는 조지 오웰이 <동물농장>을 썼던 심정으로 이 작품을 썼다고 했다. 한 때 사회주의자였던 조지 오웰은 스탈린 치하의 소련에서 보여주었던 인간 파괴와 소외의 극치로 인한 타락상에서 인간성에 대한 회의를 느꼈고, 그래서 그는 스탈린주의를 풍자해 <동물농장>을 썼다. 두 발로 걸으면서 동물들을 착취하는 인간을 비판하던 돼지들이 인간을 몰아낸 후 그들 스스로가 두 발로 걸으며 인간의 길을 답습하고 있는 모습, 그것이 바로 스탈린주의였던 것이다.

이론에 현실을 꿰맞추려다 정작 현실을 못 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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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오마이뉴스 남소연

운동을 하면서 사상적 동요가 심했다는 장필선. 현실에서 이론을 끌어낸 마르크스와 달리 이론에 현실을 꿰맞추려다 보니 현실을 제대로 직시하지 못하는 우를 범했다고 지적하는 장필선은 '이미 지나간 과거의 투사'라는 이미지가 강해 '미래지향성이 없다'로 받아들여지기 때문에 '운동권'이란 용어를 싫어한다고 했다.

그러나 장필선은 '운동'은 '인간다운 사회를 만들기 위해 노력하는 움직임'의 의미를 갖고 있기에 영원히 포기할 수 없는 명제라고 했다. 그래서 "모든 것을 의심하라"는 마르크스의 말을 되새기자고 했다.

그가 이 작품을 통해 말하고자 했던 것은 인간의 본질에 대한 고민이었다. 거시적인 것보다 미시적인 것, 남의 것보다 내 것, 이상보다는 욕망을 먼저 생각하는 인간의 본성을 억압적으로 누르고 나아가는 것은 항상 위태롭다는 것이 그의 생각이다.

그는 마르크스처럼 죽어가는 자식을 옆에 두고 <자본론>을 쓸 만큼 자신은 냉철하지 못하다고 했다. 아마도 그였다면 자신은 자식의 병간호를 했을 거라고 했다. 그래서 장필선은 작품 속의 한 구절처럼 이런 것을 꿈꾸며 운동했을지도 모른다.

"마르크스가 마지막으로 의자에 앉아서 죽을 때 그는 예니의 사진을 가슴에 안고 있었지요. 서로가 서로의 모든 것이 된다는 것은 얼마나 가슴 벅차고 신나는 일입니까. 우리도 이처럼 서로를 존중하며 서로의 모두가 될 수 있기를 바랍니다."

장필선은 누구인가

▲ 유리공예가이기도 한 소설가 장필선
ⓒ오마이뉴스 남소연
1964년 부산에서 태어난 장필선은 고교 시절에 보았던 '부마사태'가 자신의 삶에 많은 영향을 주었다고 생각한다.

당시 언니 오빠들의 주장이 하나도 그르지 않다고 생각해 선생님께 이런 일(부마사태)이 있는데, 수업을 할 수 있느냐고 항의할 만큼 자신도 모르게 의식화(?)됐던 그는 미술을 하고 싶었으나 부모의 강력한 반대로 서울대 불문과에 들어간다.

경찰의 폭력이 난무하는 가운데 시작된 그의 대학생활은 그를 미술가를 꿈꾸는 불문학도이도록 내버려두지 않았다. 그는 꿈을 접고 운동권에 몸을 담는다.

1987년 '불법유인물 제작 배포' 혐의로 국가보안법을 위반하여 감옥에 간다. 때마침 서울구치소가 경기도 의왕 포일리로 이사하는 관계로 '호텔'에서 생활하는 감방 복(?)이 있었다 말하는 그는 대학을 졸업하고 인천으로 가서 본격적인 노동운동을 한다.

그러다 노동운동단체에서 <길을 찾는 사람들>이라는 대중잡지를 창간하자 창간작업에 참여하면서 기자로 변신한 후 1년여 기자생활을 하다 자신들의 운동에 인간이 없다는 데 회의를 느끼고 소설 <난주>를 집필한다.

월간 <말>지 객원기자를 지내기도 했던 그는 인천에서 운동할 때 만난 지금의 남편과 결혼한 후 유학을 가는 남편을 따라 인간의 얼굴을 했다는 스웨덴 볼보보다 전혀 그렇지 않다는 일본 도요타 공장의 생산성이 더 높은 이유를 알고 싶어 일본으로 가보지만 정작 도요타 공장은 견학하지 못하고 미국으로 한 달간 배낭여행을 간다.

1달러짜리 피자 조각을 끼니로 때우며 뉴욕 맨해튼과 워싱턴의 미술관을 집중적으로 돌아다니던 그는 결국 미술을 해야겠다는 결심을 하고 일본으로 돌아와 유리공예를 공부한다.

대학교수가 된 남편과 함께 2003년 일본에서 귀국한 그는 유리공예가로의 새 삶을 개척하며 두 딸을 키우며 살고 있다. / 조성일 기자

난주 1

장필선 지음,
필맥, 20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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