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구로는 18세 되던 임진년 그해, 구주(큐슈)에서 징집되어 일본군 제 2진인 가토 기요마사의 휘하병사로 침략을 위해 처음으로 조선 땅에 발을 디뎠다. 그 후 얼마 안 되어 평구로는 우(右)선봉장 사야가가 병사들과 함께 조선에 항복했다는 소문을 들었다.
“듣자하니 조선군은 지리멸렬하여 제대로 싸우지도 못한다던데 어찌 그런 무모한 행동을 했을까?”
평구로와 그의 동료들은 사야가의 행동을 비웃었고 곧 이를 잊어 버렸다. 가토는 종종 진군을 멈추고 마을을 약탈할 것을 지시했고 병사들은 이를 마다하지 않고 충실히 따랐다. 행여 드물게도 약탈에 참가하는 것을 꺼리는 이가 있으면 진중에서 목을 베어 걸어놓을 정도였다.
가토의 병력은 어려운 싸움 없이 함경도까지 밀고 올라갔다. 함경도에서 평구로는 피난민들을 상대로 약탈을 자행했고 동료들과 함께 남편이 보는 앞에서 아내를, 아버지가 보는 앞에서 딸을 강간하는 일을 서슴지 않았다.
“이상하게 들리겠지만 그때는 그런 짐승만도 못한 행위를 자랑스럽게 여겼다. 강간당하는 아내 앞에서 목에 겨누어진 칼날에 꼼짝도 못하고 눈물을 흘리는 자들을 보며 기뻐했다. 동료들은 그런 다음 그들을 모조리 죽여 버렸다.”
장판수는 평구로의 말을 들으며 욕지기가 일어날 지경이었다.
“허나 한순간에 내 마음을 바꾼 일이 있었다. 함경도에서 우리 병사들이 정문부 장군에게 패하여 쫓겨 다닐 때, 동료들과 나는 피난민들을 가로 막고 그들이 보는 앞에서 한 여인을 겁간했다. 그 때 여인은 울거나 소리 지르지 않았다. 절망에 가득한 표정으로 남편을 바라보았다. 보통 이런 경우에 남편 되는 자들은 고개를 돌리거나 눈을 감아버리지만 그는 달랐다. 그는 눈으로 말하고 있었다. ‘당신을 믿는다. 이 고통을 견뎌다오. 당신을 믿는다.’ 난 부끄러웠다. 피난민들을 죽이고 가자는 동료들을 설득해 그들을 놓아주었다. 얼마 뒤 정문부 장군이 이끄는 병사들에게 동료들은 모조리 목숨을 잃었고 난 요행이 목숨을 살려 정문부 장군의 휘하에서 싸우게 되었다.”
“정문부 장군이 거두어 주셨다니, 당신이 그런 끔찍한 일을 저지르고 다녔다는 것을 몰랐다는 것 아닙네까? 운이 참 좋았습네다.”
장판수는 떨떠름한 말투로 평구로가 잠시 말을 쉬는 동안 퉁을 던졌다. 평구로는 고개를 끄덕였다.
“처음에는 말하지 않았다. 정장군도 날 포로로만 다루고 잡일을 시켰을 뿐이다. 하지만 자꾸만 그 일이 잊혀 지지 않았다. 너무나 부끄러웠다. 난 죄를 고하고 죽이든지 죄를 사할 기회를 주든지 해달라고 간청했다. 정장군은 날 죽이지 않고 무기를 쥐어주며 죄를 씻을 기회를 주었다. 칼을 잘 썼던 나는 조선병사들에게 칼을 가르치기도 했다. 그런 정장군은 내게는 하늘이 내리신 분이셨다. 그러나 싸움이 끝나고 일본군이 물러간 뒤 조정에서는 정장군을 역적으로 몰아세우고 죽였다. 난 깊이 상심하여 왜막실에서 다른 왜인들과 밭을 일구며 조용히 살아갔다. 그때 두청과 저들을 만났다. 그들은 내 사정을 너무나 잘 알고 있었고 힘을 빌려 달라고 했다. 난 기꺼이 이를 따랐고 이괄 장군이 난을 일으켰을 때 싸웠다. 난은 실패로 끝났지만 그것은 이괄장군이 실패한 것이지 우리가 패한 것은 아니었다. 조정의 눈이 무서워 이곳으로 피해와 쓸 만한 젊은이들이 올라오면 검술을 가르치곤 했다. 윤계남도 그들 중 하나였다.”
“그랬었군.”
장판수는 심드렁한 표정으로 길고 긴 평구로의 말이 끝나기만을 기다렸을 뿐이었다. 그래도 평구로는 이런 장판수의 태도를 탓하거나 불쾌한 표정을 보이지 않았다.
“죄를 씻고자 난 정장군의 휘하에 들어섰지만 그 이후 몇 번의 전투에 참가한 것외에는 아무런 일을 하지 못했다. 오히려 길을 잘 못 들어서 죄를 더하게 되었지만 그 길을 벗어날 방도를 알지 못했다. 이제 장초관을 만나 목숨을 연장하고 그 뜻이 내 마음에 들어왔으니 내 눈이 밝아진 기분이다. 장초관이 칼을 들지 않는다 하니 앞으로는 내가 자네를 호위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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