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D 업종의 역사로 돌아보는 시대의 풍경

[서평] 토니 로빈슨의 <불량직업 잔혹사>

등록 2005.11.23 21:35수정 2005.11.24 08: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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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량직업 잔혹사>는 역사상 '최악의 직업'들을 통해 우리가 외면해온 문명사회의 이면을 반추해낸다.
<불량직업 잔혹사>는 역사상 '최악의 직업'들을 통해 우리가 외면해온 문명사회의 이면을 반추해낸다.한솔
예나 지금이나 더럽고(Dirty) 힘들고(Difficult) 위험한(Dangerous) 일을 기피하려는 것은 인간의 보편적인 심리다. 제아무리 만인 평등에 기초한 민주주의 사회라 할지라도, 혹은 저마다 웰빙이나 삶의 고급화를 외치는 목소리가 높아져도, 항상 사회의 음지에서 남들이 기피하는 어렵고 힘든 일을 감당하며 눈물을 삼켜야하는 존재가 있기 마련이다.

물론 고생은 고생대로 하면서도 정작 그런 일에 종사하는 사람들은 대중의 낙후된 인식 때문에 정당한 평가도 받지 못한 채 잊혀지기 십상이다. 하지만 문명 사회의 고상한 품위를 유지시켜주는 것은 어쩌면 그 문명의 혜택을 향유하는 소수가 아니라 음지에서 고생한 비주류 다수의 힘에 기댄바 크다. 다소 거창하게 말하자면 언제나 음지에서 남들이 기피하는 일을 묵묵히 감당해주는 사람들이 있었기 때문에 우리의 역사가 발전할 수 있었던 게 아니었을까?


<불량직업 잔혹사>(저자: 토니 로빈슨·데이비드 윌콕 / 신두석 편저)는 최근 역사 관련 서적의 트렌드라 할 수 있는 미시적 역사관을 통하여 잊혀진 시대의 생활상을 조명하고 있다. 왕조나 정치사, 굵직한 이슈 중심의 역사관을 벗어나 민중들의 생활상과 소소한 비하인드 스토리를 통해 다른 시선으로 역사를 풀어내는 이야기는 교과서 중심의 갇힌 역사에 지친 대중들에게 신선함을 선사한다.

사형집행인이나 중세 기사의 갑옷 담당 시종, 거머리 잡이, 굴뚝 청소부, 의자가마꾼, 변기담당관에 이르기까지 이름도 생소한 기상천외한 직업들은 고대에서 20세기 초에 이르기까지 서구 사회에서 실제로 존재했던 직업들이다. 이 책은 역사상 최악의 직업을 가졌던 사람들의 고충을 통하여 오늘날 현대 문명 사회의 탄생에 관련된 비하인드 스토리를 펼쳐낸다.

풍부한 자료와 전문가 인터뷰에 기초하여 잊혀진 '직업의 역사'를 생생하게 보여주는 저자의 필력은 군더더기를 줄이고 짧고 명료하다. 무려 60여 가지가 넘어든 다양한 직업의 역사를 돌아보다보면 때로는 황당하게 느껴지면서도 때로는 정곡을 찌른다.

처음 책장을 열면 마치 할리우드의 지저분한 화장실 유머를 보는 것 같은 황당한 사례가 곳곳에 포진하여 실소를 자아내게 한다. 우리가 흔히 영화에서 폼나게 등장하는 중세의 기사들에게는 그들의 배설물을 처리해주는 갑옷 담당 시종이 있었다는 사실을 아는지? 적진을 향해 용감하게 돌격하는 기사들의 모습은 대개 현대의 대중들에게 아름답고 낭만적인 무용담으로 잔상이 남아있지만, 사방이 막힌 갑옷을 입고 전장을 누벼야하는 기사에게 통풍구나 따로 용변을 볼 수 있는 시간이 있을 리가 만무하다.

행여나 전투 시간이라도 길어지게 되면, 시종은 의기양양하게 전쟁에 승리하고 개선하는 기사의 무용담을 듣는 대신 갑옷 안에 들어찬 지저분한 배설물을 치워야 했다. 이쯤되면 차라리 시종들은 주인이 전쟁터에서 용맹하게 싸우다가 돌아오지 않기를 기대하고 있지 않았을까? 만일 그들이 기사도의 무용담을 예찬하는 현대의 영화를 보게 되었다면 과연 무슨 생각을 하게 될까.


화장실 유머 못지않은 잔혹무비한 '하드고어'도 있다. 동양에 '망나니'가 있는 것처럼 서양에도 대대로 사형집행인이라는 직업이 존재했다. 허구한 날 참수형이나 교수형을 집행하는 사형집행인은 여러모로 최악의 직업에 속할 수밖에 없었고, 동양과 마찬가지로 신분 또한 최하층이었다.

영화와 달리 한번에 목을 베는 일이 쉬운 것이 아니기에 베이다 만 목에서 뿜어져 나오는 피를 뒤집어쓰며 사형집행인들은 죄수의 목숨이 끊어질 때까지 목을 난도질한다. 항상 피의 일상에서 자유롭지 못한 그들은 자신이 죽인 사람들의 망령을 보거나, 보복의 위험에 시달려야만 했던 불행한 사람들이었다.


흔히 우리가 배우는 역사는 유명한 정치가나 군인, 혹은 예술가나 성인 같은 특별한 경우에 국한된 경우가 많다. 이들이 당대의 사회-문화를 선도해온 주류임에는 분명한 사실이지만, 인물 중심의 역사는 당대 민중들의 삶과 격리되어 특별한 소수에 의해서만 문명이 주도되었다는 오류를 범하기 쉽다.

<불량직업 잔혹사>는 단순히 과거의 풍경을 선정적으로 재현하는데서 멈추지 않는다. 잊혀진 역사에 대한 냉소와 연민이 교차하는 가운데, 찬란한 현대 문명을 완성하기 위하여 음지에서 소외와 차별을 받으며 묵묵히 사회의 한 축을 지탱해온 직업인들의 일상을 조명하고 있다는데 그 미덕이 있다.

불량직업 잔혹사 - 문명을 만든 밑바닥 직업의 역사

토니 로빈슨.데이비드 윌콕 지음, 신두석 옮김,
한숲출판사, 20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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