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성 앞에 선 여당, 오락가락 아니면 무기력

[김종배의 뉴스가이드] 산수를 왜 고등수학으로 만드나

등록 2005.11.24 10:00수정 2005.11.24 10: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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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 금산법 개정 과정에서 재경부 등 관련부처들이 삼성에 유리한 쪽으로 법개정을 주도했다는 의혹이 제기되자 청와대는 내사에 들어갔지만 지난 4일 발표된 내사 결과는 기대에 못미치는 정도를 넘어 매우 실망스러운 것이었다. 사진은 청와대 전경.

금산법 개정 과정에서 재경부 등 관련부처들이 삼성에 유리한 쪽으로 법개정을 주도했다는 의혹이 제기되자 청와대는 내사에 들어갔지만 지난 4일 발표된 내사 결과는 기대에 못미치는 정도를 넘어 매우 실망스러운 것이었다. 사진은 청와대 전경. ⓒ 오마이뉴스 남소연


"삼성문제만 나오면 산수가 고등수학이 된다."

심상정 민주노동당 의원이 금융산업구조개선법 개정안에 대한 열린우리당의 입장을 비판하면서 한 말이다. 잘 알려져있다시피 열린우리당은 오늘 정책의총을 열어 삼성카드의 초과 지분은 처분토록 하되 삼성생명의 초과 지분은 의결권만 제한하는 청와대 안을 당론으로 채택할 예정이다.

열린우리당의 이런 방침을 비판하는 이가 심상정 의원인 것만은 아니다. 열린우리당 내에서도 비슷한 지적이 나오고 있다. '신진보연대'의 경우 "금산법은 재벌개혁의 의지를 보여줄 수 있는 기준이 되는 법인데, 청와대 안대로 처리한다면 정체성은 사라진 것이나 마찬가지"라고 주장했다.

여권의 개혁지수를 재는 척도

'신진보연대'의 주장 가운데 '밑줄 쫙'이 필요한 부분이 있다. '정체성'을 지적한 부분이다.

그렇다. 열린우리당이 처한 최대 위기는 정체성의 위기다. 열린우리당 뿐 아니라 청와대까지 포함해 여권 전체에 해당하는 문제다. 그리고 우연인지 필연인지 삼성문제가 여권의 개혁지수를 재는 척도가 돼버렸다.

금산법을 구구절절히 재론할 필요는 없다. 그만큼 국민적 관심도 컸고, 정치권 논의도 많았다. 하지만 여권은 결국 삼성의 두 금융계열사를 적당히 봐주는 쪽으로 가닥을 잡았다.


이로써 개혁의 축 가운데 하나인 재벌개혁, 그리고 재벌개혁의 핵심 의제인 지배구조 개선 문제는 공염불이 될 처지에 빠졌다.

또하나의 개혁축인 정치개혁에도 삼성이 깊숙이 얽혀있다. 검은 돈을 매개로 한 유착구조를 근절하는 게 정치개혁의 핵심 중 핵심이라는 사실은 삼척동자도 아는 일. 그래서 안기부 X파일에서 드러난 삼성의 '거래' 의혹은 국민의 지탄대상이 됐다.


하지만 여권은 달랐다. 원칙대로 풀면 될 것을 이리 재고 저리 쟀다. 심상정 의원 말대로 '산수'를 '고등수학'으로 만들었다.

검찰이 X파일 수사에 들어간 상태에서도 제기된 의혹의 '몸통' 이건희 회장에 아무런 조치를 취하지 않았고 결국 '미국행'을 방조했다. 그 뿐인가. 검찰 수사를 받고 있는 이학수 부회장의 출국금지를 일시 해제해줘 그가 미국으로 날아가 이건희 회장, 홍석현씨 등과 뭔가를 논의할 수 있는 길을 열어줬다.

이렇게 말할지도 모른다. 그건 청와대나 정부 소관이 아니라 검찰 소관이라고…. 이런 항변엔 참여정부 들어 검찰 독립을 구현했다는 나름대로의 주장이 깔려있다.

그렇다고 치자. 그럼 X파일, 금산법 등 각종 현안 때문에 국회 증인으로 채택됐는데도 보란 듯이 미국으로 날아간 이건희 회장을 열린우리당은 어떻게 대했는가? 노회찬 민주노동당 의원이 증인으로 출석하지 않은 이건희 회장을 검찰에 고발해야 한다고 주장했지만 열린우리당은 꿀먹은 벙어리였다.

금산법 개정안은 '오락가락', X파일은 '나도 몰라'

a 지난 10월 재정경제부에 대한 국회 재경위의 국정감사에 증인으로 채택된 이건희 삼성그룹 회장이 불출석해 자리가 비어 있다.

지난 10월 재정경제부에 대한 국회 재경위의 국정감사에 증인으로 채택된 이건희 삼성그룹 회장이 불출석해 자리가 비어 있다. ⓒ 오마이뉴스 남소연

삼성을 대하는 여권의 태도는 두 가지다. 오락가락 아니면 무기력이다.

금산법에 대해서는 만취한 사람의 발걸음 같은 태도를 보였다. 열린우리당과 청와대가 모두 나서 재경부의 금산법 개정안을 맹비난하더니 어느 샌가 재경부 안과 비교해 '도진 개진'인 안을 내놨다.

X파일을 핵심으로 하는 이건희 회장 처리 문제에 대해선 '나도 몰라' 식의 태도였다. 그저 이건희 회장의 '용단'과 '처분'만을 기다리는 태도였다.

여권의 문제는 바로 이것이다. 말만 앞설 뿐 결정 단계에 가선 우왕좌왕하기 일쑤다. 그래서 내놓는 안이란 건 국민 정서와 개혁 원칙과는 거리가 멀어도 한참 먼 생뚱맞은 것이다. 여권의 정체성 위기를 얘기하는 이유가 바로 이것이다.

열린우리당 부설 열린정책연구원이 심층면접조사를 했다. 지난 대선과 총선에서 노무현 대통령과 열린우리당을 지지했다가 돌아선 사람들이 그 대상이었다. 이들이 밝힌 지지 철회 이유는 한결 같았다. 실망감이었다.

노무현 대통령에 대해서는 잦은 말실수, 국정운영 실패에 대한 변명, 신중하지 못한 처신 등 때문에 실망했고, 참모진들에 대해선 미숙하고 정책을 펴는데 성급한 점에 실망했다고 밝혔다. 또 열린우리당에 대해서는 연륜과 추진력이 부족하고 즉흥적인 면을 문제점으로 꼽았다.

말만 앞서다 우왕좌왕, 결론은 '생뚱맞죠'

여권을 바라보는 국민들의 시각이 이렇다. 그런데도 열린우리당은 엉뚱한 방향으로 나갔다. 열린정책연구원의 조사에 대해서는 그 결과를 겸허히 받아들이려 하기 이전에 조사결과를 유출한 범인을 찾아내겠다며 호들갑을 떨었다.

그리고 열린정책연구원의 조사결과가 어떻게 나왔건 말건, 국민 여론이 뭐라 하건 상관치 않고 삼성 구하기에 나서고 있다.

과연 이런 상태에서 김근태·정동영 장관이 당에 복귀한다고 지지율이 올라갈 수 있을까? 10.26 재선거 직후 실시된 한 여론조사 결과 응답자의 절반 이상이 열린우리당에 내건 주문은 한 가지였다. 개혁정당의 모습을 강화해야 한다는 것, 이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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