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머니, 우리 무엇이 되어 다시 만날까요

불지사리 대법회를 다녀온 후 떠 오른 삶의 단상

등록 2005.11.25 02:17수정 2005.11.25 15: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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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 22일 열린 불지사리 친견 대법회

22일 열린 불지사리 친견 대법회 ⓒ 나영준


"이 미련 곰탱아. 그렇게 멀뚱히 서 있지 말고, 가서 불전함에 이 돈 좀 넣고 그래."


79년의 어느 봄날이었다. 초등학교 3학년이었고 서울의 한 주택가에 있는 조금만 암자였다. 타들어가는 향내가 작은 법당을 맴돌아 의식을 찔러왔고 경내엔 천수경 암송이 한창이었다. 그리고 아직 세상 물정 모르던 젊은 엄마는 외할머니에게 연신 구박을 당하고 있었다.

외할머니는 전형적인 기복(祈福)신자셨다. 쉴 사이 없이 불전함에 돈을 갖다 바치던 중 마지못해 절이나 하고 있는 딸자식이 못마땅했던 것이다. 그저 맛난 절 밥이 먹고 싶어 따라나선 철부지 꼬마에게 그것은 종교에 대해 고민하게 되는 첫 계기였다.

"교회 다니는 사람?"... "저요!"

초등학교 시절, 지금 생각해도 용서할 수 없는 호구 조사 방식이 있었다. 50~60 여명의 아이들을 앉혀 놓은 채 "집에 냉장고 있는 사람, TV있는 사람, 자가용(승용차) 있는 사람" 해 가며 손을 들게 했던 것이다.

부의 나열로 어린아이들을 줄세우던 굴욕의 시간이었다. 고개를 푹 숙인 아이들, 물끄러미 창밖을 보는 아이…. 그 중 철없는 한 녀석은 "우리 집엔 칼라TV만 두 댄데요"라고 외치던 기억마저 선명하다.


그 야만적인 조사의 끝에는 종교에 대한 질문이 있었다. 그리고 고학년이 돼가며 나는 거짓말을 하기 시작했다. 왜 기억 속의 깜찍하고 예쁜 여자아이들은 늘 교회를 다녔는지. 자신 있게 교회에 나간다는 그녀들을 보며 어느새 나의 손도 따라 올라 간 것이다.

그렇게 나는 불교신자라고 자신 있게 말하지 못했다. 늘 나이 드신 아주머니들만 믿는 것으로 각인되어 가던 불교. 어느새 절에 다닌다는 것이 창피해지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 이유 중엔 어머니를 질타하며 돈을 쥐어주던 외할머니의 모습도 분명 한몫을 했다.


불지사리 전시회서 만난 또 다른 어머니들

a 간절히 발원하는 신도들.

간절히 발원하는 신도들. ⓒ 나영준

지난 22일, 조계종 총무원장인 지관 스님의 초청으로 열린 '불지사리 친견 대법회'에 다녀왔다. "살아생전 다시는 못 볼 귀한 기회이니 꼭 함께 가자"는 어머니의 신신당부가 아니더라도 요란스런 언론보도 덕에 어느 정도는 궁금하기도 했던 터였다.

올림픽 공원 펜싱 경기장에는 법회시간인 2시 이전부터 많은 발길이 이어졌다. 그리고 그 곳을 가득 메운 이들은 90% 이상이 아주머니, 즉 어머니와 할머니들이었다. 정성금을 소중히 바치는 이들, 공양미에 자식의 이름과 바라는 바를 소중히 적어 내려가는 이들.

정성들이 대단하시구나 싶어 가만히 쳐다보고 있노라니 문득 어린 시절 어머니를 윽박지르시던 외할머니의 모습이 자연히 겹쳐졌다. 그랬다. 그때 외할머니는 결코 자신의 영달을 위해 시린 무릎을 굽혀가며 절을 올렸던 것이 아니었다.

그 방식을 싫어할 순 있어도 오로지 딸자식과 금쪽같은 손자가 잘 되길 빌었던 마음마저 나무랄 수 있을까. 현장에 모인 귀중한 마음들 역시 예전 외할머니의 정성과 다르지 않았다. 모두 긴 줄을 이루었고 불지사리 앞에서는 간곡하게 허리를 굽히기 시작했다.

자식이 부모 되고 부모가 자식 되어가며 세세생생 윤회를 거듭한 것이 현재의 인연이라고 한다지만 과연 이들은 전생에 어떤 인과의 업을 지었기에, 자신의 삶을 위해선 털끝만한 발원 하나 세우지 않을까 궁금해지지 않을 수 없었다.

그리고 그 따스한 정성 앞에서 부처님의 손가락 형상에만 얽매여 설레설레 쫓아간 자신이 부끄러워지기 시작했다. 사방에서 부처들이 외우는 경소리가 체육관을 메우고 있었다.

"아제아제 바라아제 바라승아제 모지사바하, 아제아제 바라아제 바라승아제 모지사바하, 아제아제 바라아제 바라승아제 모지사바하."

a 행사장 입구의 노란 등이 푸른 하늘과 대비를 이룬다.

행사장 입구의 노란 등이 푸른 하늘과 대비를 이룬다. ⓒ 나영준


"네가 스님이 되었으면 좋겠다"

불가에서 '사람으로 태어나기 어렵고, 태어나되 불법을 접하기 힘들고, 접하되 참 스승을 만나기 쉽지 않다'라는 말이 있다. 고교 시절 무렵, 감사하게도 현재 나가는 사찰의 훌륭한 스승을 만날 수 있어 이후 온 가족이 차분히 불법을 익히고 있다.

물론 한때 '종교는 민중의 아편이다'란 말에 취해(지금도 크게 틀린 이야기는 아니라고 생각한다) 한동안 불가에 발을 끊은 일도 있지만 그럴 때조차도 '나는 불교신자이다'라는 기본적 믿음을 내려놓은 일은 없다. 군대 시절 '통성기도회'에 끌려갔을 때조차도 속으로는 반야심경을 읊조리곤 했으니 말이다.

하지만 말이 좋아 불교신자지 늘 고민과 술에 취해 다니는 모습은 부처님이 보셔도 "쯧쯧…"하고 혀를 차실 법하다. 아침이면 숙취를 못 이겨 오만가지 인상을 찌푸린 모습을 거울에 비추어보고 있노라면 이것이 바로 사바세계구나 싶어 저절로 쓴웃음이 지어진다.

"나는 네가 스님이 되었으면 좋겠다"

그런 날 아침이면 어머님이 툭툭 던지듯이 하시는 말씀이다. 몇 년 전 만해도 혹 그런 농담 섞인 질문을 하면 "그래도 그건 싫다"며 고개를 흔드시곤 했는데 그 사이 믿음이 많이 깊어지셨구나 싶어 아무 대답도 못 하고 물끄러미 바라만 보게 된다.

하지만 당신이 되고 싶어 하시는 것은 따로 있다. 올해 한국나이로 예순 둘, 평균수명이 길어졌다고 해도 살아온 것보다는 짧게 남은 세월. 자연스레 현생보다는 다음 세상을 그리시고 있다. 그리고 어머님이 원하시는 것은 드넓은 평야의 몽골에서 마음껏 날아다니는 한 마리 새의 모습이다.

a 각종 발원을 담은 초가 불을 밝히고 있다.

각종 발원을 담은 초가 불을 밝히고 있다. ⓒ 나영준


어린 시절을 떠 올리면 몽롱한 즐거움에 빠지지 않을 이들이 어디 있을까. 어머니 역시 고향 마을을 신나게 뛰어다니던 유쾌한 갈래머리 소녀였다. 여고시절, 방학을 맞아 집에 돌아오면 가장 먼저 하는 일은 '집 채만한' 세퍼트의 목줄을 잡고 동네방네를 자유롭게 누비고 다니는 일이었다고 한다.

"어디 계집아이가 개를 끌고 돌아다니느냐!"는 외할아버지의 호통도 한 귀로 흘려듣고 들로 산으로 나풀거리던 그 시절을 가장 그리워하는 어머니. 못난 자식 뒷바라지에 바친 평생의 짐을 내려놓는다면 분명 그때는 그런 자유를 갈망하실 법도 하다는 생각이 든다.

상상하기는 싫지만 사람이 태어나면 죽음을 맞이하는 것은 너무도 당연한 일, 그래서인지 나 역시 그 이별 이후를 떠 올려보곤 한다. 어머니의 바람대로 그녀가 푸른 하늘을 휘감아 도는 한 마리 새가 된다면 나는 또 어떤 모습이 되어 그녀를 만날 수 있을까.

나 역시 어머니의 기원대로 수도승이 된다면 인생의 진리를 찾아 혹 그 하늘 아래를 걷고 있진 않을까. 그러다 잠시 걸음을 멈추고 이마에 손을 짚어 하늘을 바라본다면 그녀는 나를 알아보고 날아와 줄 수 있을까.

그렇게 잠시라도 나의 어깻죽지에서 지친 날개를 쉬어간다면 우린 서로를 바라보며 어느 계절에 우리가 만났을까를 생각하다, 다시 또 만날 날을 기약하며 휘적휘적 자신의 갈 길을 재촉해 버리고 말까.

살아생전 아무리 지극해도 모자란 것이 효도라지만 늘 걱정만 안겨드리는 자식이 밉지도 않은지 쌔근쌔근 주무시는 어머님의 얼굴을 보고 있노라니 문득 많은 모습이 겹쳐진다. 돌아가신 외할머니의 모습인가 했지만 다시 돌아보니 세상의 모든 어머니인 듯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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