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76 장 만월지야(滿月之夜)
‘영주. 꼬리가 붙었소.’
전음이었다. 약속된 시각에 맞추기 위하여 자고 먹는 시각을 제외하고는 진성현을 향해 달려오는 길이었다. 하지만 사부와 한나절을 더 지체하고 출발했기 때문에 약속시간에 당도하기는 어려워 보였다.
지금도 이미 대부분 곤히 자고 있을 시각이었지만 연신 젓가락을 놀리며 허기진 저녁을 때우고 있던 담천의의 귀로 우교의 목소리가 파고든 것이다.
‘재미있군.’
담천의는 자신을 미행하고 있는 자를 감지하지 못했다. 아마 약속시간을 맞추기 위해 전력으로 달려 온 탓도 있을 것이다.
‘영주의 좌측 창가에 혼자 앉아 있는 자요. 아는 인물이오?’
담천의는 국수 가락을 입에 넣으며 힐끗 좌측을 바라보았다. 좌측 창가에 앉아 있는 인물은 사십대 초반으로 보이는 문사풍의 인물이었다. 옅은 청의를 걸치고 문사건을 쓰고 있었는데 핏기가 없이 굳어있는 표정이었다.
“..........!”
그러다 문득 허공에서 두 사람의 시선이 언뜻 마주쳤는데 적의가 없어 보이는 상대의 눈빛이 매우 낯익어 기이한 느낌을 받았다. 아무리 보아도 자신의 기억 속에는 없는 인물이었다.
더구나 미행을 하는 자라면 눈빛을 마주치거나 무의식중에도 적의를 드러내기 마련이다. 하지만 상대방은 아주 낯선 사람처럼 잠시 눈빛을 마주쳤다가 자연스럽게 시선을 돌렸다.
‘저 자 혼자요?’
‘아니오. 저 자를 은밀하게 따라다니는 나와 같은 신세로 보이는 자가 한 놈 더 있소.’
‘문주의 신세가 어떻다고 한탄이시오?’
담천의가 장난스레 전음을 보내자 우교가 탄식을 터트렸다.
‘허.... 주인이 배부르면 아랫것 배곯는지 모른다고 처마 밑에서 식은 만두나 씹어야 하는 내 신세를 정녕 모르고 하는 말씀이오?’
‘나 역시 동전 오문하는 국수 가락이나 먹고 있지 않소?’
‘그래도 영주는 의자에라도 앉아 뜨뜻한 국물이라도 마실 수 있잖소?’
‘어차피 문주는 죽은 것 아니오? 죽은 사람이 식은 만두라도 씹으면 다행이지.’
‘죽은 사람 제사에는 푸짐한 음식이라도 올라오오.’
‘뭐.... 문주가 그것을 원한다면 그렇게 합시다. 내 아주 푸짐한 제사상을 봐드리겠소.’
‘정말이오?’
‘대신 일년에 한번 뿐이오. 본래 귀신은 일년에 한 번 제사상을 받는 법이고 아직 문주 기제사를 지내려면 십일 개월하고도 며칠 남아 있을 거요.’
‘끄응....’
우교는 신음을 흘렸다. 처음에는 두 사람 모두 매우 서툴렀지만 이제는 말 못하다 죽은 귀신이 붙었는지 언제나 이런 식이었다. 더구나 처음에는 우교가 좀 더 재미를 본 것 같았는데 어느새 말솜씨가 늘은 담천의에게 골탕 먹는 횟수가 늘어났다.
‘눈빛은 어딘가에서 본 것 같은데 얼굴은 매우 생소하오. 언제부터 따라붙은 것이오?’
‘오늘 오후 미시(未時) 경부터요.’
‘나를 노리고 있는 것 같소?’
‘영주를 노리고 있는 것 같지는 않소. 만약 영주를 노리고 있다면 가까이 접근하려 하거나, 이 객점에 들어올 때 뭔가 반응을 보였어야 했지만 저 자들은 아무런 움직임을 보이지 않았소.’
(무슨 의도일까?)
담천의는 궁금했지만 다시 좌측을 바라보는 것과 같은 어리석은 짓은 하지 않았다. 우교의 전음이 이어졌다.
‘하지만 몸놀림으로 보아 경시할 수 없는 인물이라서 언제 돌변할지 모르니 떼어버리는 게 나을 것 같지 않소?’
‘또 한 명은?’
‘저 자와 십여 장 거리를 두고 움직이고 있소.’
궁금했지만 이미 알고 있는 이상 위험은 그만큼 줄어 든 것이다. 기회가 온다면 자신을 미행하는 이유를 알 수 있을 것이다.
‘일단 놔둬 봅시다. 목적이 있다면 스스로 드러낼 것이오.’
‘한 가지 일이 또 늘었군.’
우교는 불만이었다. 호위하는 쪽에서는 아무래도 따라붙는 자가 있으면 성가신 탓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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음낙성(陰樂晟)은 중앙기관장치가 되어 있는 석실로 가는 동안 다른 동료들이 없음을 기이하게 여겼지만 다른 생각은 하지 않았다. 자신이 게으르면 다른 사람도 게으를 수 있다. 그는 중앙기관장치가 되어 있는 석실로 들어가려고 문을 벌컥 열었다.
“허 헉---!”
그는 문을 열자마자 방안에 펼쳐진 광경에 헛바람을 집어 삼켰다. 그곳은 매우 넓은 공간이었는데 한쪽에 돌로 만든 침상이 놓여있었고 그곳에는 거의 알몸을 드러낸 채 당황하는 여인이 있었던 것이다.
여인은 겨우 고의 하나만 걸친 채 옷을 갈아입고 있는 중이었던 모양이었다. 바닥에 흘러내린 나삼을 집을 사이도 없이 그가 들어오자 급히 양 손으로 자신의 가슴을 가렸다. 하지만 풍만한 여인의 가슴은 그녀의 팔이나 손으로 가려질 것이 아니었다.
더구나 눈이 부실 정도로 하얀 피부에 가느다란 세류요(細柳腰)를 타고 여인의 앙증맞은 배꼽이 보였다. 그리고 고의로 가렸다 하나 여인의 은밀한 부위와 길게 뻗은 다리는 음낙성의 눈을 어지럽게 만들었다.
“무... 무슨 일이냐?”
여인도 놀란 듯 경악성을 터트렸다. 음낙성은 그제서야 여인의 얼굴을 바라보았는데 차라리 보지 말아야 했다. 그는 그 여인이 누구인지 아는 순간 황급히 머리를 숙이며 몸을 돌렸다.
“죄 죄송합니다.... 기....기관에 문제가.... 생겨서...”
하지만 그는 더 이상 말을 잇지 못했다. 자신의 척추에 파고드는 살기에 황급히 몸을 피하려 했지만 이미 늦었고, 맹렬한 고통에 말 대신 신음성을 내뱉어야 했다.
“크윽---!”
명문혈(命門穴)은 사혈이었다. 그럼에도 그는 즉사하지 않고 몸을 비틀면서 자신의 명문혈에 박힌 비수를 뽑으려 했다. 그것은 의외였다. 무공이 보잘것없다고 알려진 음낙성이 명문혈에 비수가 박히고도 움직일 수 있다는 것은 그의 무공 수위가 절대 낮은 게 아니라는 사실을 입증하고 있었다.
그는 남들이 보기에 게으른 자 같지만 매우 치열하게 무공을 익힌 자였다. 남들이 게으르다고 비웃을 때 그는 열심히 무공을 닦았다. 하지만 그 간의 노력도 허무하게 연이어 그의 목에도 무언가 파고드는 느낌을 마지막으로 그는 앞으로 꼬꾸라졌다. 그리고 바닥에 뉘인 몸을 한차례 떨었다. 그것으로 그만이었다.
아마 그가 조심을 하였더라면, 그가 좀 더 관찰력이 깊은 사람이었다면 왜 기관 장치가 몰려 있었던 이 방에 그러한 장치가 모두 사라지고 침상이 놓여 있는지 생각해 보았을 것이다. 그리고 왜 저 여인이 이곳에서 벌거벗은 채 있었는지 의심을 했을 것이다. 하지만 그는 너무나 당황해 아무 것도 의심하지 않고, 아무 것도 생각해 보지 않았다. 그것이 그가 죽게 된 치명적인 실수였다.
여인은 양 손을 내리고 하얗게 웃고 있었다. 풍만한 여인의 가슴에 달린 유실이 숨을 쉴 때마다 미세하게 흔들리고 있었다. 그녀는 넷째인 유항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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