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활센터 연수·유미의 김장자원봉사 도전기

"김치는 사랑으로 버무려야 제 맛"..."미약한 힘이지만 이웃 도울 수 있어 기뻐"

등록 2005.11.28 20:28수정 2005.11.30 10: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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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활센터 가족들과 양파를 까고 있는 김유미양(가운데)
재활센터 가족들과 양파를 까고 있는 김유미양(가운데)김범태
지난 27일 경기도 광주시 외곽에 자리 잡은 삼육재활센터의 한 켠. 계절이 옷을 갈아입는 초겨울 아침, 20여 명의 주부들이 모여 앞치마를 질끈 동여매고 있다. 이들은 홀로 사는 노인과 지체장애인, 소년소녀가장 등 우리 주변 생활형편이 어려운 이웃들에게 김장김치를 담아주기 위해 모인 자원봉사자들이다.


옹기종기 앉아 김치거리를 다듬는 봉사자들의 틈바구니 속에 휠체어에 몸을 의지한 채 열심히 무언가에 열중하는 황연수(12·삼육재활초등학교 5)양과 김유미(15·삼육재활중학교 1)양의 모습이 보인다.

휴일도 아랑곳 않고 먼 길을 달려온 봉사대원들을 반갑게 맞이한 이들은 자신들의 힘으로 소외된 이웃들에게 맛있는 김치를 선물할 수 있다는 생각에 이틀 전부터 이 시간을 기다리고 있었단다.

이날 준비된 배추의 양은 2.5톤 트럭 한 대분. 모두 700포기 분량이다. 배추는 충북 괴산의 한 농가에서 절임작업까지 마친 상태로 운송됐다. 배추가 도착하는 사이, 봉사대원들은 무 채썰기와 양념 만들기 등 배추 속을 준비하느라 분주하다.

작년에 포기당 500원꼴이었던 배추가 올해는 김치파동을 겪으며 가격이 폭등, 산지에서도 포기당 2000원에 거래됐다. 그나마 좋은 일에 쓴다는 이야기에 싸게 살 수 있었다는 것이 관계자들의 귀띔이다.

봉사자들은 고추와 마늘 등 양념거리도 직접 재배한 유기농채소로 준비했다. 이렇게 마련한 김장김치는 20Kg들이 상자에 담겨져 광주와 서울지역에 사는 불우이웃들에게 전달할 예정이다. 이처럼 정성껏 준비하기까진 예산을 마련하는 것이 가장 큰 어려움이었지만, 도움을 나누려는 이웃들이 십시일반으로 마음을 모아주었다.


이내 연수에게도 첫 임무가 맡겨졌다. 쪽파 까기다. 난생 처음 해보는 김장이 신기하기도 하지만, 손에 익지 않은 일이다 보니 어색하고 여간 힘든 게 아니다. 불편한 몸 때문인지 칼질이 제 의지대로 되지 않는다. 어느새 연수의 이미와 콧등에 땀방울이 송골송골 맺혔다.

옆에 앉아 열심히 양파를 다듬던 유미는 연신 눈물을 훔쳐내기에 바쁘다. 따가운 양파 냄새에 눈에는 어느새 눈물이 그렁그렁 맺혔지만, 재활센터 가족들과 함께하는 김장이 재미있는 표정이다. 유미가 한 시간 남짓 동안 언니, 동생들과 깐 양파는 어림짐작으로도 100개는 넘어 보인다.


봉사자의 도움으로 배추속을 버무리는 연수(오른쪽)양과 유미(가운데)양.
봉사자의 도움으로 배추속을 버무리는 연수(오른쪽)양과 유미(가운데)양.김범태
오전 9시부터 시작된 양파 까기와 파 다듬기는 곧 무 씻기, 무청 고르기 등의 작업으로 이어졌다. 마늘을 까거나 무청을 다듬으며 언니들과 재잘거리는 수다는 이날만 맛볼 수 있는 또 다른 재밋거리다.

쌀쌀한 날씨 탓에 얼음처럼 차가워진 손을 호호 불어가며 열심히 일하던 연수의 입가에서 어느새 콧노래가 흘러나왔다.

"힘들 때 노래를 부르면 덜 어렵게 느껴지잖아요. 제가 이렇게 만든 김치가 저희보다도 어려운 분들에게 도움이 될 수 있다고 생각하니 기분이 좋아져요" 제법 의젓하게 말하는 연수의 표정에 잔잔한 미소가 그려진다.

그사이 어른들은 무채에 마늘, 생강, 갓, 파 등 갖은 양념을 고춧가루와 버무리며 먹음직스런 배추 속 만들기에 여념이 없다. 바삐 일손을 옮기며 부산스런 손길을 오가던 봉사자들은 연수와 유미가 돕는 일이 잔심부름 정도지만, 쏠쏠한 도움이 된다며 고마워했다.

자원봉사자 조경자(서울시 중랑구)씨는 "아직 어리광을 부려야 할 나이인데 자신보다 어려운 환경의 이웃들을 위해 불편한 몸으로 이렇게 봉사를 하기 위해 팔을 걷어붙인 것이 대견하고 기특하다"며 어깨를 토닥여주었다.

고사리 같은 손으로 어른들도 힘에 부칠 일을 하다 보니 바지도 물에 젖고, 여기저기 고춧가루 얼룩으로 지저분해졌지만 연수의 표정에는 보람이 새록새록 피어났다. 유미도 익숙하지 않은 양파 까기에 손이 아리고, 볼 끝을 스치는 바람에 옷깃을 여밀 만큼 추웠지만 마음은 오히려 가벼워졌다.

진지한 표정으로 김치를 담그는 연수양.
진지한 표정으로 김치를 담그는 연수양.김범태
연수는 세살 때 교통사고를 당해 하반신을 쓸 수 없는 척수장애를 입었다. 이 때문에 지체장애 1급 판정을 받고 이곳에서 생활하고 있다. 지체장애 6급인 유미는 왼쪽귀가 좋지 않다. 벌써 서울대병원 등 대형병원에서 6차례나 수술을 했지만, 큰 차도를 보이지 않는다고 한다.

하지만 이들은 이날 꾸밈없이 해맑은 표정으로 그간 옆에서 조용히 바라보기만 했던 김치를 직접 담그며 이웃사랑을 체험했다. 때론 허리가 아플 만큼 힘들고 피곤했지만, 어려운 이웃들에게 도움을 줄 수 있다는 생각에 이전에 없던 보람도 느끼게 되었다.

다른 반찬은 하나도 없지만 뜨거운 흰쌀밥에 갓 버무린 김치를 곁들여 먹는 점심은 꿀맛이었다. 따뜻한 미소와 친절로 자신들에게 자상하게 설명해 주며 도움을 준 자원봉사자 아주머니들과의 푸근한 만남도 정겨운 추억으로 자리했다.

어느새 복도에 하나둘씩 쌓여가는 김치상자를 보던 연수와 유미는 서로를 바라보며 "내가 남에게 도움이 된다는 사실에 기분이 좋아진다"며 "김치를 드시는 분들이 맛있게 먹고, 건강했으면 좋겠다"고 입을 모았다.

남들은 쉽게 이해할 수 없는 보람을 한가득 머금은 아이들의 뿌듯한 표정 사이로 이제는 자신들도 도움을 받기만 하는 사람이 아닌, 누군가에게 도움을 나누어 줄 수 있다는, 우리들도 할 수 있다는 기쁨이 더 크게 엿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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