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 묵거든 말해라 또 부치줄텡께"

올해도 김장김치 한 가득 보내준 어머니

등록 2005.11.29 16:47수정 2005.11.29 17: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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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연 쌀밥에 꽁댕이만 떼어낸 배추김치를 죽죽 찢어 볼이 미어져라 먹고 나니 이제야 좀 살 것 같다는 소리가 절로 나옵니다.


오전 내내 작은 아이를 데리고 큰아이 유치원을 알아보느라 헤매고 다니다가 뱃가죽이 등에 들러붙을 것 같아 갈지자 걸음으로 집으로 돌아오니 집 앞에는 거짓말 않고, 집안에서 윙윙대며 돌아가고 있는 냉장고만한 아이스박스가 주인을 기다리며 소박맞은 새색시처럼 새초롬한 모습으로 놓여져 있었습니다.

사랑으로 버무러진 배추김치
사랑으로 버무러진 배추김치주경심
오후 늦게나 도착할 줄 알았는데, 괜히 천리길도 넘는 길을 물어물어 딸 집에 찾아온 친정엄마를 문앞에서 기다리게라도 한 듯 죄송한 맘이 들었습니다. 부랴부랴 문을 열고 '낑낑' 대며 박스를 집안으로 들이고 보니, 이리 무거운 것을 어찌 들고 나와 부쳤을지 택배비라고 해봤자 몇 천 원 안팎일 텐데 그 몇 천 원에 어찌 이리도 무거운 것을 턱하니 염치도 좋게 부쳤을지.

그래도 뭐든 더 넣지 못해 누르고 또 눌렀을 엄마의 그 마음 또한 모르는 바 아니기에 집 앞에서 택배 아저씨를 만나지 않은 걸, 박스를 내려주고 휘청거리며 계단을 내려가는 아저씨에게 '커피라도 한 잔 드릴 걸'이라고 후회할 일이 생기지 않은 것만으로도 큰 위안을 삼으며 피식 웃었습니다. 틀림없이 아버지가 바늘 하나 들어갈 틈 없이 꼼꼼하게 묶은 매듭을 풀고 뚜껑을 여니, 고향집 마당에서만 맡을 수 있는 곰삭은 젓갈 냄새가 콧 속으로 훅하니 달려듭니다.

"식구가 적은께 우선 쬐깜만 보낸다. 묵고 떨어지믄 말해라. 갓짐치랑 배추짐치는 묵을만 헌디. 무시짐치는 담다봉께 쬐깜 짭드라. 느그 아부지한테 지천 마이 들었다. 짐치를 몇 십 년을 담아놓고 아적도 간도 못 맞추냐고. 긍께 무시짐치에는 물을 한대접이나 붓어서 때짝꺼리 놔라. 잉 양님이 많애서 물잠 붓는다고 태도 안 날 것이다. 그라고 짜밤이 한 되나 있을 것이다. 날씨 추분디 맥없이 애기들 델꼬 돌아댕기지 말고 집이서 그놈이나 볶아서 믹이라. 강냉이 볶은 거는 작은 것들 오거든 줘라. 그것들은 물을 낄이 묵은께 강냉이가 있어야 헌다드라. 부치고 봉께 일허로 가서 얻어온 전복도 있는디 못 보냈고, 문어도 한 마디 있었는디 그놈도 빠져부렀고. 이런 정신머리를 어쩌끄나잉. 느그 아부지 알믄 또 야단을 헐 것인디."

갓김치, 배추김치, 석박지..맛나겠죠?
갓김치, 배추김치, 석박지..맛나겠죠?주경심
지난 밤 딸에게 부쳐놓은 박스 안을 설명하느라 엄마의 늙은 입은 오랜만에 휘모리 장단처럼 흥이 올라 밤이 깊어가는 줄도, 갈치를 낚으러 나간 아버지가 돌아오는 줄도 모르셨습니다. 그리고 박스 안의 물건들은 엄마의 설명처럼 배추김치, 무김치, 갓김치에 짜밤, 그리고 소주병에 들어가 있는 잘 볶아진 강냉이까지. 한 가지도 틀림이 없이 들어 있었습니다.


허기까지 진 데다가 오랜만에 엄마의 김치 냄새를 맡으니 회가 동해서는 입에서 생침이 줄줄 흘러나와 고였습니다. 상을 펼 것도 없이 밥 한 그릇에 수저 하나 그리고 엄마의 김치를 한 포기 꺼내보니 진수성찬이 부럽지 않았습니다. 씹을 것도 없이 목구멍을 타고 넘어가는 김치. 매콤하면서도 쌈빡한 뒷맛이 십년 전, 이십 년 전에 먹었던 엄마의 그 김치맛이 틀림없었습니다. 이럴 때는 입이 작은 것이 얼마나 싫은지. 점심이라고 꼭 한 그릇 남은 밥이 또 얼마나 아쉽던지.

그런데 밥 한그릇을 게 눈 감추듯 싹싹 쓸어 넣도록 불을 지펴놓은 듯 후끈하게 달아오른 뱃속과는 달리 마음 한 구석은 뭔가 허전함이 몽글몽글 피어올랐습니다. 그런데 꽁댕이만 남은 접시를 보니 그 이유를 알 듯도 합니다. 일년 삼백 예순다섯 날, 하루 세끼를 반찬이라곤 김치뿐인 그 밥상 앞에서도 투정 한 번 않고 밥 그릇을 싹싹 긁어대는 자식들에게 "뭔 놈의 새끼들이 한 끼니에 짐치를 한 포기도 넘게 쳐 묵으까" 하는 엄마의 그 잔소리를 이젠 더 이상 들을 수가 없기 때문이었습니다.


그 시절 어린 자식 셋이서 꽁댕이도 남기지 않고 김치 한 포기를 먹어버리면 다음 끼니를 걱정해야 했던 엄마는 너무 잘 먹어서 더 애물단지였던 자식들에게 지긋지긋한 가난과 더 먹이고 싶어도 먹일 것이 없는 현실을 잔소리로 대신했었던 듯합니다. 돼지 먹일 것도 없이 다 먹어버린다는 애물단지 자식들이었건만, 아무리 잘 먹여도 내다 팔지 못한다는 그 자식들이었건만 그래도 내 엄마는 먹을 것이 생기면 꼭 자식들 앞에 내놓았지 당신 입으로 넣지 않았으니까요.

남은 김치를 김치통에 담아서 계란 몇 알과 아이들 감기약이 전부였던 대나무통처럼 텅 빈 냉장고를 채우고 나니 새삼스레 엄마가 있어 참 좋다는 생각도 해봅니다. 바닷물을 퍼다가 밤새 절인 배추에, 약 한 방울 치지 않아 못나디 못난 고추로 양념을 해서 만든 엄마의 김치가 엄마의 사랑에 추억까지 담아 냉장고 안에서 제 입과 마음을 풍요롭게 해줍니다.

그리고 엄마 말마따나 다 먹었다고 전화하기가 무섭게 득달 같이 내 집안으로 들어올 더 많은 김치들이 아무리 잘 먹여서 살을 찌워도 내다팔지 못하는 내 아이들을 여물게 하겠지요. 김치를 받았다는 전화를 하면서 엄마에게 더도 말고 덜도 말고 앞으로 딱 이십 년만 더 김치를 담가달라고 했습니다.

"이십 년이나?" 하면서도 허허 웃는 엄마. 사실은 제 딸 민이가 시집을 가서 딸을 낳고, 그 딸이 또 딸을 낳을 때까지 살아주셨으면 합니다. 그리고 그때도 엄마의 이 쌈빡한 김장을 맛볼 수 있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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