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재소설]정통무협 단장기 317회

등록 2005.11.30 08:23수정 2005.11.30 08: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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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처는 입지 않은 것 같았지만 그의 입가에 가는 선혈이 흘러나오고, 원월만도를 잡은 손에서 피가 한 방울씩 떨어져 내리고 있었다. 아마 손아귀가 찢어진 모양이었다.

“제법이군.”


나타난 사내는 강명이었다. 헐렁한 오른 소매가 바람에 날리고 있었지만 그는 태산과 같은 모습으로 서 있었다. 좌승은 위압감을 느꼈다. 사실 좌승은 아무리 급작스런 공격이었다 하나 단 일수에 자신을 이토록 궁지에 몰아넣을 수 있는 인물이 있을 것이라곤 생각해 보지 못했다. 더구나 자신에게 이러한 위압감을 줄 인물이 중원에 존재하고 있다는 사실을 믿을 수 없었다.

하지만 그는 스스로 인정하고 있었다. 만약 저 사내가 자신을 베려고 마음먹었다면 충분히 벨 수 있었을 것이다. 좌승을 물러나게 만들려는 게 목적이었는지 저 사내는 자신을 베지 않았다. 좌승은 찢어진 손아귀에 참을 수 없는 통증을 느끼고 있었지만 그는 오히려 도를 놓지 않은 채 자신의 입가로 가져가 떨어지는 피를 혀로 핥았다. 보는 이로 하여금 맹수와 같은 느낌을 가지게 하는 행동이었다.

분명 자신보다 한 수 위였다. 허나 지금 좌승의 전신에서는 기이한 쾌감이 느껴짐과 동시에 맹렬한 투지가 솟구쳐 올랐다. 저런 강적이라면 평생 한 번 만나볼지도 의문이었다. 진심으로 도전해보고 싶은 상대가 나타난 것이다.

“어느 분이 일월신륜 육능풍, 육노선배이신가?”

강명은 좌승의 행동에는 아랑곳하지 않고 뒤에 있는 다섯 명의 인물을 하나씩 훑어보며 물었다. 하지만 좌승과 같이 척추를 타고 오르는 전율에 기이한 쾌감을 맞보고 있는 인물은 또 하나가 있었다.


이곳에 온 모든 목적을 잊어버리고 오직 하나 승부를 맛보고 싶다는 강렬한 욕구가 전신을 감싸고 있었다. 이런 느낌은 정말 오랜만이었다. 중원에 모래알처럼 많은 고수들이 있지만 마음 속에서 우러나와 겨루어 보고 싶은 상대는 찾기 어렵다.

바로 관을 메고 온 네 명의 흑의인 우측에 서서 아무런 움직임을 보이지 않고 있던 인물이었는데, 그는 천천히 발걸음을 떼며 사립을 벗어 제겼다.


“물러나거라. 좌승. 네 상대가 아니다.”

뚝뚝 부러지는 듯한 목소리였다. 한순간 틈을 노려 치고 들어가려던 좌승은 그 목소리에 짜증이 솟구쳤지만 그 목소리의 임자가 누군지 아는 그로서는 토를 달지 않았다. 좌승이 몇 걸음 물러서자 사립을 벗어 던진 중년사내의 차가운 얼굴에 달빛에 드러났다.

“내 이름은 반당(班堂)… 육노조는 오지 않았다.”

왼쪽 뺨에 길게 그어진 검흔이 달빛을 받아 선명하게 보이고 있었다. 그저 서 있을 때는 모르겠더니 앞으로 나서자 그의 전신은 마치 예리한 병기를 보는 듯한 착각이 들었다. 강명의 얼굴에도 상대를 인정하는 듯한 표정이 떠올랐다.

이미 귀에 못이 박히도록 들었던 이름이었다. 언젠가 반드시 한 번은 손속을 겨루리라고 생각했던 상대였다. 한 번도 패한 적이 없다는 냉혈도 반당. 철혈보 수많은 고수 중 서열 오위에 올라있는 인물. 서열 오위라 하나 무공 하나만 본다면 서열이 어떻게 변할지 모른다.

강명은 가볍게 포권을 취해보였다.

“냉혈도(冷血刀) 반선배이셨군. 내 이름은 강명이오.”

들은 적이 있다. 철혈보의 은영전주(隱影殿主) 여후량(呂厚亮)의 보고서에 기재되어 있었던 이름이다. 무공으로만 본다면 백련교의 사형제 중에서 가장 조심해야 하는 상대가 강명이라고 부언 설명이 있었던 것도 기억해냈다.

굳이 그 설명이 아니었다 하더라도 좌승의 도를 가볍게 쳐 내는 동작 하나만으로도 능히 짐작할 수 있는 터. 반당 역시 상대를 경시하지 않고 가볍게 포권을 취해 답례했다.

“말이 필요할까?”

강명은 들고 있던 검으로 동자배불의 자세를 취했다. 말이 필요 없다는 뜻. 강명 역시 적당하게 근육이 긴장하는 것을 느끼며 검을 세웠다. 아무리 천하제일검 섭장천에게서 검을 배웠다고는 하나, 상대는 수많은 승부 속에서 이룬 위명이다. 그러한 승부 속에서 얻은 경험 역시 자신과는 비교가 되지 않을 터.

파직--- 파지직-----

그의 검 끝에서 푸른 불꽃이 터지고 있었다. 반당 역시 도를 뽑아들고는 허공에 휙휙 그었다. 선배의 도리로 먼저 공격하지 않겠다는 뜻. 선공을 양보해 줄 것이니 공격하라는 의미다.

(좌수검(左手劍)…! 거기에 섭장천의 성하구구검(星河九九劍)이라니…)

반당은 난생 처음 강적을 만난 듯 본능적으로 몸이 먼저 긴장하고 있었다. 긴장하고 있는 것은 상대도 마찬가지인 듯 두 사람은 일장 여 거리를 둔 채 움직이지 않았다.

미세한 움직임은 좌승과 관을 메고 온 네 명의 흑의인 뒤쪽에서 느껴졌다. 바로 무너진 담과 문 사이로 일곱 명의 인물들이 모습을 보이고 있었다. 좌승의 고개가 홱 뒤로 돌려 졌다.

“……!”

한결같이 눈까지만 내려오는 검은 방갓을 쓰고 전신은 묵(墨) 빛 의복을 걸쳤다. 짧은 구레나룻하며 비슷한 키. 걸음걸이라든지 취하는 행동이 한결같아서 언뜻 보면 모두 한사람인 것 같았다.

하지만 분명 느낌이 오는 것은 그들이 고수라는 점이었다. 한 명 한 명이 절대 무시할 수 없는 상대다. 좌승은 처음으로 가슴이 철렁 내려앉는 것을 느꼈다. 불길한 느낌이 뇌리를 스쳤다.

“그대들은?”

일곱 명 중 한 명이 대답했다.

“주공께서는 우리를 묵연칠수(墨煙七首)라고 부르신다네.”

좌승은 그들에게 아주 걸 맞는 이름이라고 생각했다. 소리가 나지 않는 안정된 걸음걸이와 흔들리지 않는 상체는 고련을 겪지 않는 사람은 보일 수 없는 행동이었다. 더구나 그들 외에도 담과 사당의 지붕, 사당 안에서까지 수많은 인물들이 서서히 모습을 드러내고 있었다. 바로 강명의 수하들….

(오히려 함정에 빠졌다!)

좌승은 전신의 세맥(細脈)들이 마구 터지는 듯한 느낌을 받았다. 냉정하게 판단한다면 지금 도망가는 것이 최선의 선택이었다. 하지만 반당이 물러나지 않고 있는 상황에서 자신이 먼저 이 자리를 벗어나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다. 상대의 말이 다시 이어졌다.

“그리고 무엇보다 철혈보에 받아야 할 빚이 많은 사람들이지. 우선은 귀하와 귀하 동료들을 안내하는 게 순서겠지?”

“안내?”

“저승길 말이야…. 고이 가도록 해 주는 게 도리일 것 같아서….”

좌승은 도리어 피식 실소를 터트렸다. 흰 이가 어둠 속에서 달빛을 받아 반짝였다. 그리더니 갑작스럽게 말을 한 사내의 좌측에 있는 사내를 향해 원월만도를 쓸어갔다. 불리하다고 생각하면 선공(先攻)이 우선이다.

슈우우악---!

원월만도가 월영(月影)을 그려내며 지독한 살기를 뿜었다. 처음부터 내력을 십성(十成)까지 끌어 올린 공격이었다. 공격을 받은 사내는 잠시 당황하는 듯 급히 뒤로 물러났다. 동시에 허리에 감고 있던 쇠줄을 황급히 꺼내들며 휘둘렀다.

“흡…!”

하지만 좌승의 공격을 완전하게 피하지는 못한 모양이었다. 그의 허벅지에서 선혈이 튀면서 연이어 가슴을 노리며 베어가는 좌승의 도를 쇠줄로 튕겨냈다.

“저승길을 안내하는 일은 본래 내 역할이었지.”

좌승의 연속되는 공격에 묵연칠수라 밝힌 인물들이 병기를 꺼내들며 좌승을 공격해 갔다. 그와 동시에 관을 메고 온 네 명의 흑의인 역시 묵연칠수를 향해 공격을 시작했다. 연동 입구에서 자시가 넘은 시각에 시작된 혈투였다.

(제 76 장 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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