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물에서 나오면 온몸에서 김이 모락모락 솟는다. 달라진 환경에 몸이 깜짝깜짝 놀라는 것을 잘 관찰해야 한다.전희식
살얼음이 얼고 서리가 두텁게 내리는 요즘. 중 2년생인 아들과 나는 어김없이 새벽 6시에 일어나 뒷산 계곡에 올라간다. 캄캄한 새벽길을 가 본 사람은 알리라. 도시의 새벽길은 잘 모르겠지만 깊은 산 속 새벽길을 가다보면 마주치는 여명에 일종의 신비감과 사명감 같은 것을 느끼게 된다. 어느 시인은 '콩 이파리 같은 새벽'이라고 노래했는데, 콩 이파리 같은 색깔은 영락없는 영의 세계다.
우리는 일주일 째 계곡물에 발가벗고 들어가 30분씩 하반신을 담그고 묵상을 하는 '물수련'을 하고 있다. 얼음장 같은 새벽 계곡물 속에 몸을 담그고 있으면 신비감도 사명감도 줄행랑을 치고 이빨이 덜덜덜 떨려올 뿐이다.
처음에는 새끼 손가락만한 물고기들이 허벅지를 물기도 하고 자지를 건드리기도 하지만 곧 감각이 없어진다. 바늘로 온몸을 찔러대는 냉기에 몸을 꼿꼿이 세워 단전에 숨을 모으고 온갖 명상법을 동원하여 추위와 맞서지 않으려고 하는데, 순간순간 의념을 놓치면 추위를 뒤집어쓰곤 한다. 몰아의 시간은 짧고 추위는 길다.
어제는 쏜살같이 내달리는 짐승의 발자국 소리에 산돼지가 내려 온 것으로 알고 나는 아들을 보호해야겠다는 마음에 눈을 번쩍 떴었다. 수련하다가 사람 잡겠다 싶어 꽁꽁 언 벗은 몸으로 어떻게 맞서 볼 계산도 없었지만, 바짝 긴장하고 눈을 떴더니 멧돼지가 아니라 개를 데리고 산행에 나선 낯선 사람들 한 무리가 계곡을 타고 올라오는 것이 아닌가.
수련하는 동안에 절대 눈을 뜨면 안 되는데 눈을 떠 버렸으니, 아들과 나는 서로 얼굴을 쳐다보고 눈 뜬 상대를 통해 자신을 위로했다.
"아빠. 어떡할까요?"
눈을 뎅그랗게 뜬 아들이 오돌오돌 떨면서 물었다. 산돼지보다야 사람들이 훨씬 안전한지라 안도의 숨을 쉬고 있던 내가 뭐라 말을 하기도 전에 우리를 발견한 사람들의 소곤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저 봐봐. 수도하나봐. 조용히 해."
"저쪽으로 둘러가자. 조용히 해라."
주의 깊은 이 분들 덕분에 우리는 예정대로 물수련을 잘 마칠 수 있었다. 물 속에 담궜던 손도 꽁꽁 얼어서 양말을 제대로 신을 수가 없다. 그러나 옷을 입으면서도 내게는 찜찜하게 남는 것이 있었다. 손에 제대로 잡히지도 않고 발가락에 걸려 꿰어지지 않는 팬티처럼 머릿속에 찜찜하게 남아 있는 것은 다름이 아니고 개의 발자국 소리에 그렇게 놀라 명상이 깨져 버렸다는 사실이다.
물질세계의 번잡한 작용들을 넘어서서 한결같은 얼의 세계에 접근하고자 하는 나의 공부가 개 발자국 소리에 산산조각이 났다는 사실이 용납되지 않는다. 십년 공부 나무아미타불이라더니 이게 무슨 꼴인가 말이다. 의심이 불같이 일어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