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르 코르뷔지에의 동방기행>다빈치
이 기행문은 동료인 오귀스트 클립스탱과 함께 약 1년 동안(1911~1912) 독일, 이탈리아, 루마니아, 불가리아, 터키, 그리스 등지를 여행한 대장정의 일부를 담고 있다.
특히 터키가 주요 무대로 등장하는데 우리에겐 '형제의 나라'로 알려져 있는 터키의 역동적 일상이 적나라하게 그려지고 있어 더욱 흥미롭다. 그 중에서도 화려하고 과장된 언변으로 손님을 정신 못차리게 만들어 기어코 물건을 사게 만든다는 터키 상인의 상술과 마성(魔性)으로 감싸인 신비한 터키 사원의 의식을 묘사한 대목이 압권이다. 이 밖에도 터키의 여인, 자연 풍광, 건축물, 화재(火災), 다리(橋)등에 얽힌 에피소드와 감상이 미문(美文)으로 수놓여 있다.
그의 미문을 편린(片鱗)이나마 맛보길 원하는 분들을 위해 잠시 기행문 일부를 발췌해 소개하면 다음과 같다.
시골의 예술 작품은 미적 관능성의 놀라운 창조물이라 할 수 있지. 예술이 과학보다 높은 곳에 있는 것은 정확히 말해 과학과 반대로 예술이 육체 깊은 곳의 관능을 반향하기 때문이야. 예술은 인간 육체의 동물성에 자리를 내주고, 그 건강함 위에 가장 우아한 토대를 쌓는 작업이라 할 수 있으니 말이야.
이렇듯 민중 예술은 변함없는 따스한 손길로 온 대지를 감싸안고, 인종과 풍토와 장소에 상관없이 조화롭게 스며들어 화려한 꽃처럼 대지를 덮어주곤 하지. 이렇게 예술은 '아름다운 동물'로 살아가는 희열을 제약 없이 만끽하도록 도와주어야 하는 거야.
예술, 그것은 마치 수액으로 잔뜩 부풀어 올라 활짝 봉오리를 연 꽃과도 같아. 자연의 모습을 다시 조합해 내면서 기하학적인 질서의 극치를 보여주거든! 거친 본능과 감각 그리고 추상적인 사변의 놀라운 결합이라고나 할까?(pp20-21)
내가 이 강변에 사는 어부나 상인이라면 중국인들처럼 나무로 깎은 신상을 만들 것이다. 이 강은 곧 나의 신이 될 것이고 나는 이 강을 경배할 것이다. 이 신상이 광활한 강을 굽어보도록 나는 높은 뱃머리에 신상을 세워둘 것이다. 마치 바이킹들이 그랬던 것처럼! 이제 나의 종교는 더 이상 공포가 아니요, 고요한 경배가 될 것이다.(p45)
아그레네프 슬라비안스키의 음악을 통해 끝없는 스텝의 대초원을 유유히 흐르는 강을 느낄 수 있었다면, 이곳 네고틴의 음악은 내가 배 위에서 상상했던 신의 목소리를 듣게 해주었다. 도나우 강과 푸스타 대평원이 엎드려 조용히 경배의 키스를 보내는 바로 그 신의 목소리를...
이것은 자유를 열망하며 끝없이 헤매 다니는 백성들이 광활한 대지의 신에게 보내는 찬양이자 탄식이자 번민이자 고통의 호소였으며, 스스로의 영혼에서 신성을 이끌어내기 위한 주문이기도 했다. 장밋빛과 초록빛, 푸른빛으로 물드는 저녁 무렵 아궁이 앞에 웅크리고 앉아 부르는 노래를 통해 그들은 불타는 영혼의 격동과 자유를 함께 느꼈을 것이다. 평야와 대초원과 꽃들, 이것은 개념 아닌 감성으로만 이해될 수 있기에 주관성과 꿈의 장르인 음악으로밖에 표현될 수 없었을 것이다.(p53)
내가 상상했던 이스탄불은 햇빛이 잘게 부서지고, 장방형 건물 위에 우윳빛 돔 지붕이 부푼 빵처럼 얹혀 있고, 하늘을 찌르는 첨탑들이 솟아 있는, 백악(白堊)처럼 새하얀 도시였다.(p90)
그런데 저 소리는 무얼까? 바로, 터키인들이 축제를 벌이는 소리다. 이 시간 모스크들은 온통 메아리치며 울부짖고 있다. 때론 분홍색도 있지만, 온통 검은색의 헐렁한 옷을 입고 흰색이나 초록색 터번을 쓴 터키 노인들이 기도하는 소리나 쪼그리고 앉아 대화를 나누는 소리를 모스크들이 허밍으로 반향하고 있는 것이다.(p146)
사방으로 퍼지는 오후의 햇살 속에서 드디어 아토스 산의 삼각형이 모습을 드러냈다. 몇 시간 만에 그려낸 거대한 초상화처럼, 아토스 산은 갑자기 확대된 모습으로, 해발 2천 미터의 위엄 있는 모습을 드러냈다.(pp176-177)
특히 그의 미문은 건축가이자 화가인 그만이 누릴 수 있는 심미안적 특권으로 인해 한층 풍부한 음영과 화려한 색감이 더해져 더욱 아름답게 느껴지는 것 같다.
그렇다고 해서 그의 특장이 미문에만 국한되는 건 아니다. 르 코르뷔지에는 때론 오만한 독설가가 되어 천박한 상업주의, 정체성을 상실해가는 전통 문화를 신랄하게 꼬집기도 하고, 길가에 핀 들꽃에서 소박한 자연미를 발견하고 영감에 사로잡히기도 한다. 또한 여행지를 페스트처럼 휩쓸고 다니는 천박한 졸부들의 행렬을 보며 냉소를 머금기도 하는데 이와 같은 인간적인 풍모야말로 그의 빛나는 특장일 것이다.
굳이 역마살을 타고난 역마직성(驛馬直星)이 아니더라도 누구나 한번쯤은 평생 기억에 남을 만한 여행을 꿈꾸게 마련이다. 그리고 그 꿈같은 시간을 기억의 회로에서 꺼내 불멸의 기록으로 남기고 싶어 한다.
그런 의미에서 정철의 <관동별곡>, 마르코폴로의 <동방견문록>, 이븐바투타의 <기행문>, 괴테의 <이탈리아 기행>, 아널드 토인비의 <세계일주여행기>, 노산 이은상의 <피어린 육백리>, 정비석의 <산정무한>, 최남선의 <백두산 근참기>, 유홍준의 <나의 문화유산 답사기> 등으로 작성된 불멸의 목록에 르 코르뷔지에의 <동방기행>을 위한 자리를 예약하는 것은 너무나 당연한 권리 행사라 하겠다.
르 코르뷔지에의 동방 기행
르 코르뷔지에 지음, 조정훈 옮김,
다빈치, 20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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