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자들> 겉표지.랜덤 하우스 중앙
문예중앙시선3 <상자들>은 인천에서 왕성하게 활동하고 있는 중견 여류 시인 이경림의 네 번째 시집이다. 43세라는 늦은 나이에 등단하여 그동안 세 권의 시집과 한 권의 엽편 소설 <나만 아는 정원이 있다>를 펴낸 시인은 이제 곧 60을 바라보는 나이가 되었지만 그는 어느 여성 시인보다도 상상력이 활달하고 시의 목소리가 젊고 싱싱하다. 시인이 팔 년 만에 펴내는 새 시집 <상자들>에도 시인의 특장은 그대로다.
'상자들'이라는 독특한 제목의 이 시집에는 곳곳에 상자 이미지가 놓여져 있다. 그 상자들은 시인의 내밀한 몽상의 풍경들로써 아버지, 어머니, 어린 시절의 나, 아파트, 가방, 칠성당, 부엌, 공장, 원고지 빈 칸, 신생아실, 합장, 쭈글쭈글한 주전자, 정육점, 허공, 환(幻) 등 다양하게 펼쳐진다.
이 중에서 아버지라는 이미지의 상자가 가장 강렬하게 솟구쳐 오른다. 출현 횟수나 내용의 절실함에서 그러하다. 책머리 '시인의 말' 그는 "이렇게 흐물흐물한 쾨쾨한 진물 질질 흐르는 다 떨어진 상자를 뒤집어쓰고 이 캄캄한 상자 속을 언제까지 헤매야 합니까 아버지!"라고 적고 있다.
시집의 첫 작품 <작가>와 맨 마지막 작품인 <아홉 개의 상자가 있는 에필로그>도 아버지에 관한 이야기이다. 인생 육십이라는 적지 않은 나이의 시인이 이 세상이라는 상자를 떠나 저승이라는 다른 상자로 거처를 옮기신 아버지에 대한 그리움과 이승이라는 상자 속에서 자신을 키워오면서 힘겹게 여러 상자들을 만들고 만든 아버지의 힘겨운 삶에 대한 연민이 아버지라는 상자 이미지의 내용물이다.
강화 보문사 칠성당 뒷벽에/물고기 등을 뚫고 솟아오른 낙락장송 탱화를 보러 가는 길에/ 웬 어쭙잖은/??? 같은/한 떼의 갈매기들을 만났다/ 사람들이 던져주는 새우깡을 따라/요쪽 저쪽 가까운 바다를 건너다니는 자들이다/눈치 없는 자 하나가 아무것도 가지지 않은 내게로 와/기웃, 들여다본다/가까이서 보니 엄청나게 크고 징그럽다/완강한 부리가 더욱 밉살스럽다/저리 가!/쫓아도 자꾸 붙는다
잠깐 바다 건너는 일이 이렇게 악머구리다/비탈을 오른다/비탈에서는 곧추서기가 힘들다/온몸으로 비탈을 안고야 발이 떨어진다/거친 숨 사이로 아버지가 번역하신 묘법(妙法) 연화경(蓮華經)이 보인다/오를수록 산은 멀고 산경(山徑)만 가득하다
절 한쪽 구석에 낡고 초라한 칠성당이 보인다/물고기의 등을 뚫고 솟아오른 낙락장송도 먼지를 뒤집어쓰고 그대로 있다/고통으로 뒤틀린 채 허공으로 뛰어오른 물고기!/(칠성당 뒤편은 여전히 고통으로 가득하구나)
언젠가 나는 잔등을 뚫고 나간 낙락장송(落落長松) 때문에/온몸이 뒤틀린 물고기들이/지하도바닥에서/더러운 신문으로 얼굴을 가리고 잠든 것을 보았다/네거리에는 잔등에 한 바다를 짊어진 칠성당들이/하염없이 신호를 기다리고 있었다
위 시는 <칠성당들>이란 시다. 좋은 시는 그것만으로도 족하다. 이러쿵 저러쿵 짧은 설명을 덧붙이고 싶지 않다. 인간 존재의 비의를 들여다보는 시인의 눈이 깊다. 이 세상이라는 상자, 그 상자 속의 한 인간이라는 작은 상자, 그리고 상자 속의 상자, 또 상자들의 다양한 이야기가 시집 <상자들>속에 살아 펄쩍펄쩍 뛰고 있다.
그것은 여성의 정체성 문제, 삶과 죽음의 경계, 문명 비판의 시대 문제, 가족의 사별, 슬픔, 절망, 그리움 등으로 담겨져 있다. 독자여, 이 상자들을 한 번 열어보시라. 그 상자들을 펼쳐 읽다보면 어느 새 내 몸 속에 묻혀있던 상자들도 발견할 수 있을지 모른다. 내 속의 상자를 만난다는 것은 지금과는 전혀 다른 새로운 삶을 살아가는 일이다.
시집 한 권이 그걸 가능하게 한다. 난 이 시집을 지난 여름에 이경림 시인으로부터 전해 받아 읽어보고는 여러 사람들에게 권한 바가 있다. 특히 여류 시인들과 여성들이 꼭 읽어보기를 권장하고 싶다.
상자들
이경림 지음,
랜덤하우스코리아, 20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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