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릉의 예감(제문을 불 태우는 곳)은 깨졌지만 드물게 뚜껑이 남아있다.한성희
여자의 한은 여자가 알아준다고 했던가. 조선의 민초였던 여인들이 정순왕후와 함께 땅을 치고 가슴을 치며 슬픔을 나눴던 이 통곡을 사람들은 동정곡(同情哭)이라 했다. 송비의 서리서리 품은 한을 이해해주는 것은 여인네들의 몫이었다.
송비는 먹을 것이 없어 궁궐에서 따라 나온 세 명의 시녀가 동냥해온 밥으로 끼니를 연명한다. 왕비와 통곡으로 마음을 같이한 마을 여인네들이 줄을 서서 푸성귀를 전해준다는 소식이 세조의 귀에 들어가자 금지령이 내렸고 여인들은 궁궐의 감시를 받는다.
조선의 여인들은 이에 굴하지 않았다. 송비를 돕기 위해 정업원 근처에 최초의 금남(禁男)시장인 채소시장을 열었다. 남자의 출입을 금했으니 제 아무리 관리라도 출입을 할 수 없었고, 북적대는 시장에 장사하러 가는 척 담 너머로 던져주는 여인들을 누가 말리랴.
옷에 자주 염색을 들여 근근히 생계를 이어가는 송비의 소식은 세조에게도 마음 편할 수 없었다. 세조는 정업원 근처에 영빈정(英嬪貞)이라는 집을 지어주고 곡식을 내렸으나 송비는 끝내 거부했다. 송비가 세조의 도움을 받아들일 사람이었다면 아침저녁으로 억울하게 죽은 지아비 생각에 가슴을 치고 통곡하지도 않았으리라.
죽을 때까지 단종을 그리워하고 생각했다 해서 붙은 사릉(思陵)이란 능호는 조선왕릉 능호 중 그래서 가장 애절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