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한항공의 결항을 알리는 안내전광판김범태
휴대폰 벨이 울렸다. 조종사들의 파업으로 비행기 시간이 앞당겨졌다는 대한항공 측의 안내전화였다. 갑작스럽게 잡힌 제주 출장을 앞두고 터져 나온 조종사 파업은 내게도 그렇게 영향을 미쳤다.
지난 9일 오전, 항공사의 조정된 비행기 시간표에 따라 당초 예약했던 탑승시각보다 한 시간 이상이나 서둘러 공항에 도착했다. 쌀쌀한 새벽공기를 가르며 아침잠을 설친 채 집을 나서면서 나는 이번 조종사 파업을 바라보는 시민들의 시선을 담아보기로 했다.
앞서 조종사들의 파업 가능성을 전하는 뉴스를 접했으면서도 내가 대한항공을 예약한 이유는 '설마 파업까지 가겠는가' 하는 안일한 사태파악이 1차 원인이었겠지만, 더 근본적인 이유는 항공사 마일리지를 적립할 수 있다는 점이 더 솔직한 이유였음을 숨길 수 없다.
이런저런 생각을 하며 지하철에서 무가지를 손에 든 나의 시선은 '대한항공 파업' 소식에 관심이 쏠릴 수밖에 없었다. 주변의 많은 시민들 역시 조종사 파업과 황우석 박사 관련 기사에 대부분 눈길을 두고 있었다.
김포공항 대한항공 창구에서 나를 가장 먼저 반긴 것은 '조종사 파업으로 불편을 끼쳐드려 죄송하다'는 내용의 플래카드였다. 한산하게 느껴지는 대한항공 창구에 비해 아시아나항공의 창구는 많은 사람들로 북적이는 모습이 대조적이었다.
티켓을 끊어주는 항공사 직원에게 "파업으로 손님들 항의가 많겠다"며 말을 걸자 "그렇다"면서 짧게 대답을 끊는다. 출발을 기다리며 대합실에서 항공사 파업 관련 뉴스를 보던 승객들은 애써 화면을 외면하기도 했다.
제주로 떠나는 비행기에서 만난 한 승객은 "원래 오전 10시40분 비행기였지만, 출발 시간이 앞당겨지면서 일행이 서둘러야 했다"며 불만을 털어놓았다. 옆 좌석에 앉아 있던 어느 관광객도 "노사가 승객에게 피해를 주지 않는 선에서 합의할 수 있는 방법은 없는 것인지 모르겠다"며 못마땅해 했다.
외국인 기장이 운항하는 비행기를 타고 한 시간을 날아 도착한 제주공항에서 한 여승무원은 "고객 여러분께 불편을 끼쳐 죄송하다"라며 "이번 사태가 빨리 해결되었으면 좋겠다"는 교과서적 인사를 건넸다. 하긴, 그녀에게 더 이상의 대답을 원하는 게 과욕이었는지 모른다.
목적지로 향하는 택시에서 만난 기사는 "물론 조종사들이 많이 배우고, 고급 기술을 가진 사람들이라는 것은 알지만, 우리네 1년 연봉을 한 달 월급으로 가져가는 사람들이 임금인상을 요구하며 파업까지 가는 것에 상대적 박탈감만 느낀다"고 한숨을 내쉬었다.
▲결항을 알려 온 문자메시지김범태
그날 오후, 끝내 내게도 우려하던 일이 현실로 나타났다. 다음날 예약해 두었던 비행기가 결항되었다는 문자메시지가 날아든 것이다. 항공사 전화는 벌써 몇 십분째 불통이었다. 순간, 화가 치밀었다. 대체 항공편도 마련해 놓지 않은 채 달랑 문자로만 결항을 통보하는 항공사가 야속했다.
더구나 일요일에는 사촌동생의 결혼식이 예정되어 있었기에 비행기를 타지 못하면 낭패가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녀석의 결혼사진을 찍어주기로 얼마 전부터 약속을 해 두었기에 더욱 큰일이었다.
하는 수 없이 공항으로 부리나케 달려갔다. 그러나 이미 자리가 동나버린 후였다. 내게도 피해가 발생한 것이다. 창구 여직원에게선 "우선은 기다려봐야 한다"는 답변만 돌아올 뿐이었다. 급기야 "급하면 아시아나항공으로 가보라"는 이야기까지 흘러 나왔다. 기가 막혔다.
우선은 대기자 명단에 이름을 올린 후 숙소로 이동했다. 공항 택시정류장에는 빈 택시가 길게 늘어서 있었다. 기사 아저씨는 "이틀 사이 손님이 크게 줄었다"며 "지난번엔 아시아나항공이, 이번에 대한항공이 바꾸어 가며 애를 먹인다"면서 울상을 지었다. 그는 "무엇이 부족해서 그러는지 이해할 수 없다"며 혀를 찼다.
이튿날이 되어서야 이날 저녁 출발하는 마지막 비행기에 탑승할 수 있게 되었다는 항공사 측의 연락을 받을 수 있었다.
업무를 마치고 공항으로 가는 길에 만난 택시기사는 "택시는 물론, 식당, 여행사, 숙박업소 등 제주도 경제에 미치는 타격이 여간 큰 게 아니"라며 걱정했다. 아저씨의 이야기는 곧 "패기 있는 지도력에 기대를 걸었던 노무현 정부에 실망이 크다"면서 정권 비판으로 이어졌다.
항공권을 끊는 자리에서 "애꿎은 창구직원들이 손님들로부터 항의 받으려니 힘들겠다"며 은근 슬쩍 떠보자 담당직원은 "어쩔 수 없죠. 한솥밥 먹는 가족들인데..."라며 말끝을 흐렸다. 수화물을 접수받는 직원도 쓴웃음을 짓기는 했지만 같은 대답이었다.
▲한산한 대한항공 창구의 모습김범태
대한항공의 파업으로 다른 항공사로 탑승객이 몰리면서 반대편 아시아나항공 창구가 이용객들로 북적이는 모습은 서울과 마찬가지 였다.
많은 사람들이 저녁 8시가 넘어선 시간까지도 대기번호표를 발급받아가며 탑승을 기다리고 있었다. 몇몇 사람들은 분을 참을 수 없었던지 아시아나항공 창구임에도 "왜 시민을 볼모로 자기들의 이득을 챙기려 하는지 모르겠다"며 분통을 터뜨렸다. 어떤 이들은 "언제까지 기다려야 하느냐"며 안타까운 표정으로 발을 동동 굴렀다.
뉴스에서는 조종사노조 파업 4일째이던 이날에도 대한항공 여객기와 화물기의 결항률이 70%에 육박하는 등 국내외 항공운송이 사실상 '마비 상태'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는 보도가 나왔다. 실제로 대한항공은 이날 김포-서울간 노선을 8편밖에 운항하지 않았다고 한다.
서울로 돌아오는 비행기에서 옆 좌석에 앉은 아주머니는 "예약해 놓은 비행기가 결항되었다는 문자메시지를 받고 황당했다"며 "갑작스럽게 일이 이렇게 꼬일 줄 알았더라면 아예 처음부터 예약하지 않았을 것"이라고 꼬집었다.
이틀간의 짧은 출장을 마치고 돌아오는 길, 하지만 그 어느 때보다 길고도 지루한 시간이었던 이번 여행에서 만난 거의 대부분의 사람들은 "그들도 나름대로 이유가 있겠지만, 쉽게 이해할 수 없는 부분이 더 많다"며 이번 조종사 파업을 부정적으로 평가했다.
특히 "제주도는 이제 귤 농사지어서 먹고 살던 시대가 지났습니다. 솔직히 관광 사업이 우리 도민들에게는 가장 중요한 사업원천입니다. 그런데 이런 이유로 여러 사람들이 피해를 입으니, 아무리 정당한 이유라도 우리 같은 소시민들로서는 쉽게 납득하기 어렵군요"라고 말하던 어느 아저씨의 힘없는 목소리가 잠자리에 들어서는 시간까지 자꾸 귓전을 맴돌았다.
| | 고래 싸움에 등골 휜 제주 여행업계 | | | 교통, 숙박, 음식점 등 큰 타격 ... "체감경기는 더해" | | | | 대한항공 조종사노조의 파업으로 제주관광업계의 피해가 속출했다.
제주도관광협회 발표에 따르면 대한항공 파업 영향으로 9일 제주를 찾은 관광객은 지난주보다 5000명 줄어든 1만 명가량에 그쳤고, 주말이었던 10일에도 지난주보다 30% 감소한 9000여명에 머물렀다.
중문관광단지 어느 특급호텔의 경우 이틀간 75개 객실이 무더기로 예약취소되는 등 숙박업소마다 객실 예약취소가 잇따랐으며, 렌터카업체에도 불똥이 튀어 100대의 차량 예약이 취소된 것으로 알려졌다.
제주시에서 식당을 운영하는 한 주인은 "평소보다 손님이 절반은 줄어든 것 같다"며 "체감으로 느끼는 것은 더하다"고 한숨을 내뱉었다. / 김범태 | |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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