집에 돌아왔건만 이제 집은 아주 낯설고 거북했다. 어른들은 내색을 하지 않았다. 어른들이라고 이미 중원에 퍼져있는 소문에 귀를 막고 있지는 않았을 터였다. 본래 그녀가 집을 나선 이유가 어른들의 분부 때문이었으니 어찌되었건 탓을 할 수도 없는 노릇일지도 몰랐다.
하지만 혼인도 하지 않은 과년한 여식이 많은 사람들 입에 오르내린다는 것은 강남송가의 맥을 잇는 부친으로서 아무래도 견디기 힘들었을 것이다. 그럼에도 부친은 아무 말하지 않았다. 그런 부친의 태도가 송하령으로 하여금 더욱 가시방석에 앉아 있는 것 같은 느낌을 갖게 했다.
더구나 그녀에게 있어서는 안 될 일이 발생했음을 안 것은 집에 돌아온 지 엿새 만의 일이었다. 그녀는 가슴이 덜컥 내려앉았다. 이것은 누구와 상의할 수 있는 일이 아니었다. 내색을 하지 않으려 무척 노력했다.
입맛도 없었다. 억지로라도 먹어야 한다고 생각했지만 음식을 입에 댈 수가 없을 지경이었다. 오랜 여정으로 지친 몸은 더욱 야위어 가고 병색이 보일 지경이었다. 그녀에게 있어 유일한 삶의 희망은 그녀가 사랑하는 사람을 생각하는 것이었다.
잠이 들면 그 사람의 꿈을 꾸었다. 얼핏 잠이 들었다가 문밖에 기척이라도 나는 듯 싶으면 그 사람일까 벌떡 깨었다. 나뭇잎을 흔드는 바람소리에도, 창을 때리는 빗방울 소리에도 그녀는 화들짝 놀라며 바라보았다. 그리움은 시간이 지날수록 더해가고 뻔히 오지 못할 사람인지 알면서도 기다렸다.
몸 뿐 아니라 마음도 시들어가고 있었다. 방도를 찾아야 했다. 이대로 집에 있어서는 안 되었다. 무슨 변명 거리를 대더라도 집을 나서야 했다. 그 사람에게 가야 했다. 그런 그녀에게 마침 서가화가 찾아 온 것은 어쩌면 행운이었다.
“언니… 어찌 이렇게 된 거야? 무척 고생을 한 모양이네.”
서가화는 송하령의 초췌한 모습에 거의 울상이었다. 사람 꼴이 아니었다. 이미 일어날 시간이 훨씬 지났는데도 속옷을 걸친 채로 침상에 누워 있다가 일어난 모습이라서 그런지 더욱 초췌해 보였다. 얼굴은 반쪽이 되었고, 거칠어진 피부와 병색이 완연한 얼굴은 큰 병이라도 걸린 사람의 모습이었다.
“괜찮아….”
“괜찮기는…? 지금 언니가 어떤 꼴인지 알기나 해? 이렇게 되도록 왜 가만있었던 거야? 어르신들도 무심하시지.”
“괜찮다니까 그런다… 좀 쉬면 나아질 거야.”
“아니야. 안되겠어. 내가 용한 의원이라도 불러와야지.”
서가화가 일어서자 송하령이 황급히 서가화의 손을 잡고 말렸다. 송하령은 의원을 부른다는 말에 오히려 당황하는 듯 했다.
“내가 알아서 할께.”
“언니는… 환자가 뭐를 알아서 한다는 거야? 도대체 그 인간은 언니가 이 지경되도록 무얼 한거야?”
송하령이 손을 잡고 완강히 말리는 기색이자 서가화는 다시 애꿎은 한 사내를 탓했다. 송하령이 이렇게 된 것은 그 사내 탓이 분명했다. 그러다 문득 침상 곁에 놓여진 죽을 보고는 물었다.
“아직 아침도 들지 않은 거야?”
야채와 해산물을 넣고 끓인 죽으로 보였는데 손 하나 대지 않은 듯 했다.
“식으면 먹으려고….”
“벌써 다 식었잖아.”
서가화는 수저와 죽그릇을 집어 들고는 침상 곁에 앉았다.
“환자가 먹지도 않으니 더 그렇잖아. 자….”
서가화는 손수 수저로 죽을 떠 송하령의 입가에 가져갔다. 송하령은 쓴 웃음을 지으며 하는 수 없다는 듯 입을 벌리다 입에 죽이 닿자 갑자기 고개를 돌리더니 헛구역질을 해댔다.
“우… 욱… 욱….”
“언니…. 왜 그래…? 먹기 거북해?”
서가화는 헛구역질을 하는 송하령을 보면서 수저를 자신의 입가로 가져가 향기를 맡고, 살짝 입에 넣어 보았다. 향기도 식욕을 돋을 만 했고, 맛도 괜찮았다.
“아주 맛있는데….”
말을 하다말고 문득 무언가 생각난 듯 서가화는 놀란 표정을 지었다. 어쩌면 그럴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니 그럴지 모르는 게 아니라 확실했다. 그녀는 지금까지와는 달리 조심스럽게 말했다.
“언니… 혹시…?”
고개를 돌린 송하령이 씁쓸한 미소를 띠웠다. 그리고는 고개를 끄떡였다.
“그래… 맞아….”
임신이었다. 젊은 남녀가 수 개월을 함께 생활했으니 아기를 가지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차라리 그와 같이 있을 때 알았다면 좋았을 것을 그와 헤어지고 난 뒤에야 알게 된 것이다. 혼인한 부부라면 주위 사람들에게 알리고 축복을 받아야 할 일이지만 처녀가 아이를 가졌으니 누구에게 말할 수도 없는 일.
“어르신들도 아셔?”
혼자만 삭여야 하는 그녀의 심정이야 오죽했을까? 더구나 이런 일이 소문이라도 나면 송가의 위신은 간 곳이 없고 망신살이 뻗히는 일이다. 정작 본인이야 말할 것도 없지만 어르신 들도 얼굴을 들고 다닐 수 없는 일.
“아직은 모르시는 것 같아.”
송하령은 자신 없는 목소리로 대답했다. 되도록 피곤하고 아프다는 핑계로 식구들조차 피해왔지만 어쩌면 어머님은 아시고도 내색하지 않는지도 모른다. 딸은 엄마를 닮는다 하지 않았던가?
“이제 어찌하려구…?”
“가화야… 그렇지 않아도 너를 찾아가려 했어.”
서가화의 눈꼬리가 샐쭉해졌다. 욕이 절로 나온다. 눈치 빠른 서가화가 송하령의 부탁이 무언지 모를 까닭이 없다.
“말도 안돼. 이 몸을 해서 그 자식한테 가려구?”
“가야 돼. 나 좀 도와주렴.”
애절한 송하령의 눈빛에 서가화는 이해가 되지 않는다는 듯 고개를 흔들었다.
“그 자식… 아니 그 작자가 어떤 사람인지 언니가 더 잘 알잖아. 그 작자가 어디 있는지 언니가 찾아갈 수 있어?”
“찾을 방도가 있어. 일단은 같이 소주에 갔다가….”
“소주는 왜?”
“담가장…. 그 사람 누이동생이 그곳에 있어. 한 번 꼭 가 보고 싶어서…. 그리고 그 사람을 찾으면 돼. 만날 수 없으면 장안(長安)의 황가마장(黃家馬場)이나 개봉(開封) 봉취루(鳳醉樓)로 가면 될 거야. 아니면 진성의 신검산장도 괜찮아.”
서가화는 송하령의 애절한 눈빛을 뿌리칠 수 없었다. 사실 자신도 그 인간을 한 번 만나보고 싶기는 했다. 초라한 표국의 보표였던 그가 이제는 중원을 뒤흔드는 가장 유명한 인물이 되었던 것이다.
서가화는 다음날 또 다시 찾아왔고 송하령을 데리고 떠났다. 송하령의 부모는 떠나는 것을 말리지 않았다. 하지만 송하령이 떠난 다음날 정식으로 청혼을 하기 위해 양주(楊洲) 지부대인(知府大人)이 직접 송가를 찾아오고서야 그녀를 떠나게 한 것이 성급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남북을 가로지르는 운하(運河)와 장강(長江)이 교차하는 양주는 고래로부터 어디와도 비견될 수 없는 풍요로운 고장. 관리가 중앙관부로 진출하기 위해 필히 거쳐 가는 곳이었다. 금은보화서부터 청홍의 비단에 이르기까지 청혼예물을 실은 마차의 행렬은 줄을 이었다.
(제 78 장 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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