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실천문학사
<매장시편>과 <살아있는 날들의 비망록>의 작가 임동확(46)이 그 옛날 카프(KAPF)처럼 방향전환을 선언했다.
이전까지 그의 이름과 함께 따라다닌 별칭은 '5월 광주의 시인'. 군사독재가 백주대낮에 수백명의 시민을 학살한 현장에서 20대를 맞은 그에게 '그 날'과 '그 도시'는 결코 지울 수 없는 화인(火印)이었고, 절대 잊을 수 없는 상처였다. 그는 20대와 30대의 전 시간을 80년 5월 광주를 통곡하는 것으로 보냈다.
그랬던 그가 전격적으로 문학적 방향을 전환, 복수가 아닌 '크낙한 화해'를 노래하기 시작한 것은 의외의 일이다. 거친 듯 보이지만 한없이 결고운 그가 화인이자 상처였던 광주를 죽음만큼 장엄한 아름다움으로 바꿔 생각하기까지 겪었을 마음고생을 생각하면 가슴이 찡해온다.
아름다운 방향전환의 모습을 여러 시편에서 느낄 수 있는 임동확의 신작시집은 이름하여 <나는 오래 전에도 여기 있었다>(실천문학사). 아래 시편에선 그의 고민이 가감없이 읽힌다.
"…저문 봄날 한꺼번에 피어난 꽃들이 단 한 번도 그대를 외면하거나 유혹한 적 없으나 단지 눈길을 마주쳐 피하지 못했다는 이유만으로 죄도 없이 누명을 쓰고 있네."
- 위의 책 중 '누명' 중 일부
참혹의 역사를 외면하지 못한 죄, 혹은 지켜본 원죄로 20년 이상을 고통받아온 시인. 하지만, 임동확은 통곡이 아닌 담담함으로 자신이 뒤집어쓴 '누명'과 마주해 왔다. 감정을 드러내지 않음으로써 더 큰 울림을 주는 그의 언어 조탁력은 이제 일가를 이룬 듯하다.
원한을 껴안는 몸짓, 개인과 집단의 아픔을 함께 다독인다
언어를 조직하고 다루는 일만이 아니다. 세상사의 아픔을 다독거려 원한을 껴안음으로 풀어내는 한국적 미의 추구도 보다 세련되어졌다. 개인의 아픔을 보여줌으로써 집단이 겪은 악몽을 드러내는 기법. 시가 가진 최고의 힘, 주관의 객관화는 여기에서 완성을 이룬다. '노안(老眼)'이라는 시다.
"미루고 미루다가
연세대 구내 안경점에서 돋보기를 맞추고
잠시 기다리는 동안
여직 다 읽지 못한 세상과 책,
그리고 부르다 만 노래와
여전히 미로일 뿐인 사랑의 길을 생각한다…"
'미루어 하늘의 뜻을 짐작하는 나이'라는 지천명. 쉰을 목전에 둔 시인에게도 세상은 여전히 미로였던 것이다. 범인(凡人)이야 말해 무엇하리. 죄를 지은 자도, 그 죄 때문에 목숨을 빼앗긴 자도 결국은 인간. 미로 속을 사는 무력한 인간들끼리 무엇을 더 용서해야할까.
시집 제목과 동명인 다음의 시는 임동확이 말하는 '큰 화해'와 상생(相生)이 어떤 형태의 것이 되어야 하는지를 응축해 보여준다. 구구한 설명을 덧붙이지 않겠다.
"…나 한순간도 수꿩 울음 끊이질 않는 4월의 뒷동산/금세 피어다 지는 개나리꽃이나 그 울타리 아래/수줍게 고개 내민 제비꽃처럼 그렇게 너와 함께/질긴 그리움의 천을 짜며 노래하고 있었거늘//…오늘 다시 너와 마주 앉아 오래 아파하는 것/그 어떤 몸짓 하나 너와 무관하지 않거늘/급기야 그 누가 잠긴 방문을 차고 들어오려는가/피할 수 없는, 피해갈 수 없는 세월 속에서/오래 전에도 나는 여기 있었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