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독 시커멓게 변한 '광해군지묘(光海君之墓)'라 쓰인 초라한 비석.한성희
광해군이 졸(卒·왕이 승하하면 훙거(薨去)라 하고 정4품 이상은 졸이라 한다)하자 조정에서는 연산군의 예에 준하는 왕자의 예식으로 장사를 치르게 하고 제사는 외손이 주관하라 명한다.
광해군묘에 관한 죽은 기록을 찾느라고 거의 모든 자료를 뒤졌으나 광해군묘 기록이 없다는 것과 인조21년 제주에서 천묘했다는 문화재청 자료밖에 없었다.
광해군의 죽은 날짜를 기준으로 인조실록을 뒤졌지만 장례나 천묘한 기록은 볼 수 없어 폐위된 왕은 이렇게 천대받는 것인가 혼자 한탄했다.
단념하려다가 마지막으로 <승정원일기>를 뒤지자 인조19년 7월 10일 광해군 염습의 예를 묻는 제주목사의 장계부터 장례과정까지 일목요연하게 나타났다.
인조19년 7월 21일 이경운(李敬運)이 양주로 영장처(永葬處)를 정하러 나갔다가 22일 정하고 돌아왔다. 9월 2일 이필영(李必榮)이 광해군 운구를 맞이하러 나갔다.
9월 3일(병자)광해군 상구(喪柩)가 18일 제주에서 발선(發船)하여 22일 영암에 도착한다는 예조참의 서목이 있고, 9월 8일 경상(境上)에 도착하여 배행하였다는 충청감사의 서목이 잇따른다.
예우를 어느 정도 후하게 할 것인가, 언제 개관을 할 것인가 여부가 조신 간에 시끄럽게 오가고, 광해군의 영장일(永葬日)을 앞당길 날자가 없느냐고 인조가 물었다는 전교가 있는 것으로 보아 광해군의 장례를 얼른 치르고 싶었던 모양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