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녀심판("Examination of a Witch" Thompkins H. Matteson, 1853)
0. 난리굿
난리다. 난리. 많은 사람들이 '황우석 사태'를 '한 지식인의 전 세계에 대한 사기극'으로 규정짓고 있으며, 사회적으로 매장당할 뻔한 < PD수첩 >과 MBC는 난데없이 국민의 영웅으로 탈바꿈했다. 사태가 전복된 것이다. 영웅은 사기꾼이 되고, 천의 매국노는 영웅이 되었다.
한 순간에 영웅을 죽이는 사람도 시민들이고, 매국노를 영웅으로 만드는 것 역시 우리 시민들이다. 갑자기 원시부족의 신화적 제의가 생각난다. 부족의 영웅을 만들고, 부족 사회 유지를 위해 영웅을 희생시키는 신화적 의식.
1. 애국자와 매국노의 차이
사실 난 황우석 교수가 국민적 영웅으로 칭송을 받던 때에도, 그의 논문이 조작적 사기라는 어제 오늘의 뉴스를 보면서도 아무렇지 않았다. 별 감흥이 없었다는 말이다. 대중들의 논리에 따르면, 내가 애국자가 아니었을 수도 있다. 그리고 내가 사태에 관심이 없는 한량이기 때문이었을 수도 있다.
그렇다면, 나는 이렇게 묻는다: 국민적 영웅 생산에 열을 올리는 것이 진정한 의미에서 민족의 '의식'을 고양시키는 애국적인 행동인가? 그렇지 않은 사람들은 모두 매국노인가? 내가 이렇게 삐딱하게 생각하는 걸 보면, 난 아마도 '그들(정치인, 기업, 학계, 정부, 시민 등이 너무나 복잡하게 얽히고설켜 있기 때문에, 난 '그들'이라고 호명할 수밖에 없다)'의 논리로 보자면, 난 매국노이고, 좌파고, 무식한 지식인이며, 의식없는 시민이다. 존재론적 실체 보다, 시뮬라크르가 더욱 인정받고 주목을 끄는 사회인데 그렇게 규정되는 건 전혀 이상하지 않다.
2. 여러 가면들_persona
< PD수첩 >의 진행자 가족들이 생명의 위협을 느끼고 있을 때, 난 <오마이뉴스>에 "'황우석 논란'에서 나타난 현대판 마녀 사냥(11월 28일)"이라는 제목의 기사를 올렸다. 그 때 이 기사에 대한 20건 이상의 감정적 반응들을 접하면서 난 한국 사회 시민의식의 부재를 경험했다.
물론, 이질적이고 잡다한 계층의 사람들의 속생각을 알 수도 없으며 여러 표본 집단들을 통해 추출된 경험이 아니었기 때문에, 시민의식의 '건전성'에 대한 희망의 실마리를 잡고 있었다.
그러나 조선, 동아, 중앙으로 대표되는 거대 언론권력이 조장해내는 분위기를 내 주위 사람들을 포함한 국민들 대다수가 받아들이는 것처럼 보였던 것은 나만의 착각이었을까? < PD수첩 >에 대한 광고를 취소시켜버리는 이 땅의 많은 몰지각한 기업가들은 대체 취업생들의 면접에서 '기업윤리'에 대해 왜 질문하고 있는 것일까? 그럼 이번에는 조선, 동아, 중앙일보에 대한 광고를 취소할 것인가?
대권주자들은 저마다 황 교수와의 친분을 과시하고자 기자들을 불러댔다. 왜 지식인을 가만히 놓지 못하는가? 지식인이 언로를 통해 조금만 유명세를 타기 시작하면, 정치인들은 그 사람을 놓지 않으려 한다. 연구실에 엉덩이 딱 붙이고 연구할 수 없게 만드는 게 현실이다. 하기야 자본이 없으면 '학문'이 없는 현실인데, 지식인 입장에서도 천재일우의 좋은 기회일 수도 있겠다.
반면, 줄기차게 의심을 놓지 않고 있던 <프레시안> 강양구 기자 같은 사람들도 많이 있었다. 하지만 물증은 없었다. 당연히 물증은 나올 수가 없는 구조였다. 물증을 잡을 수 없었던 기자들의 상황은 설명하지 않아도 이미 주지의 사실이다.
3. 굿판의 전개 : 또 하나의 이율배반
한국의 많은 시민들이 해당 언론을 죽이지 못해 허둥대던 모습과, 언제 그랬냐는 듯이 그 언론을 영웅시하는 모습은 너무나 이율배반적이지 않은가! 몇몇 정보에 혹해왔던 시민들의 무비판적 태도가 이러한 이율배반의 구조를 양산했다.
< PD수첩 >은 취재윤리를 무시했다. 그건 명백한 잘못이기에 MBC가 공개적으로 사과방송을 내보내지 않았던가? 하지만 정당한 지적을 했다. 그건 언론의 의무이자 사명이다. 잘못은 잘못이고, 해명은 해명이며, 진실은 진실인 것이다. 갑은 갑이고, 을은 을이고, 병은 병인 것이다.
이번 굿판은 이렇게 정리된다 :
0) 언론은 건전한 비판정신을 되새긴다(접신接神).
1) 진실 추구에 대한 특정 언론의 노력을 통해 '진실'이 밝혀진다(방언方言의 등장).
2) 1번을 통해 '대'한민국이라는 커다란 부족사회의 영웅은 부족적 기능을 상실한다(영웅의 출현와 부재).
3) 굿판의 구경꾼들은 2번을 막기 위해 1번을 방해하고 음해한다(굿판의 해산).
4) 언론은 다시금 0번으로 돌아간다(재접신).
5) 상황은 다시 2번으로 회귀하고 이 사이클은 계속 반복된다. 하지만, 점점 3번 과정의 힘은 약해진다.
결국, 우리는 굿판이 전개되는 추이를 살펴보아야한다. 그러나 사실(factum)로서 인정된 것들은 인정해야 한다. 벌써 사이버상에서는 한 달 전에 황 교수의 논문 조작이 우리나라 대학원생들을 통해 밝혀졌다. 황 교수는 지식인으로서의 윤리를 저버린 셈이다.
무엇이 그를 그렇게 압박했을까? 아마도 상아탑에서 외롭게 연구하면 아무도 돌아보지 않는 너무나 '현실적인' 사회적 제도 때문일 것이고, 바로 이 땅의 많은 무비판적 추종자들 때문일 것이다. 입맛(taste)에 맞지 않아 관심(interest)이 생기지 않으면, 단 돈 1원도 투자(interest)하지 않는 세상이니까.
4. 자극-반응
이 땅의 많은 시민들은 이번 굿판을 지켜보고 스스로 참여하면서 너무나 감정적으로 대응해왔다. 물론, 그럴 수밖에 없었던 게 한국의 현실이다. 공론영역에서 건전한 담론이 생성되기엔 너무나 거대한 권력들이 방해하고 있으며, 부익부 빈익빈의 극단적 괴리감이 국민정서를 날카롭게 만들었으며, 무얼 해도 잘 풀리지 않는 문제들 속에서 금융 권력은 6개의 숫자만 잡으면 '만고땡'이라는 의식을 심어주기만 했으니까.
시민들이 감정적으로 변한 것은 이해가 된다. 하지만 우린 보다 냉정하게 반응해야 한다. 입안에 '땡초'가 들어오기만 하면 해당 음식점 주인에게 길길이 날뛰며 이성을 잃는 모습들은 이제 과거로 돌려보내자. 우리는 인내와 관용의 정신으로, 그리고 무엇보다 조상 대대로 내려온 그 겸손함으로 물 한 잔 들이키며 음식점 주인과 웃으면서 헤어질 수 있는 능력이 있다.
우리는 논문 사기를 감행한 황 교수 죽이기로 가서도, 일방적 MBC 찬양론으로만 기울여서도 안 된다. MBC 역시 광고 취소 등으로 인하여 적자를 보았다고 해서 황 교수에 대한 보복성 보도를 일삼아서도 안 된다. 물론, 논문사기를 감행한 황우석에 대해서는 법적으로 '사기죄'가 적용될 것이다. 법의 영역에 맡기자.
우린 이 사태가 발생하게 된 한국사회의 구조적 결함을 분석하여 더 이상 하자가 발생하지 않도록 고민하는 데에 힘을 쏟아야 한다. 맹목적인 비난과 마녀사냥식 태도는 건전한 시민의식 함양에 도움이 되지 않는다는 것을 명심하자. 지금 세계가 우리를 바라보고 있다.
덧붙이는 글 | <오마이뉴스> "'황우석 죽이기'로 가선 안됩니다(이인배 기자)"의 기사 꼬리에 달린 바람직하지 않은 답글들을 보면서 다시 한 번 말문을 열게 되었다. 이인배 기자의 말처럼, 우린 모두 차분히 제 자리를 찾아야 한다. 하지만 우리가 서 있어야 할 곳은 어디인가? 여전히 애매모호한 이 의문은 사회의 공적 이성이 합리성을 찾는 노력 속에서 해소되어 갈 것으로 믿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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