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아~ 웃고 있어도 짜증이 난다

2005년 한국 코미디가 남긴 것

등록 2005.12.23 15:14수정 2005.12.23 15:13
0
원고료로 응원
2005년 초 코미디를 사랑하는 시청자들은 행복했다. 최근 몇 년 새 KBS의 <개그 콘서트>를 필두로 시작된 코미디 부활 조짐에 후발주자인 SBS <웃찾사>가 바짝 따라붙으면서 치열한 2파전의 양상을 보이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게다가 MBC 역시 과거의 영광을 재현하고자 70~80년대 코미디의 대명사 <웃으면 복이 와요>를 내걸고 자존심 회복을 선언하면서 바야흐로 '코미디 전성시대'가 예고되는 듯했다.


하지만 1년이 마무리되는 지금 시점에서 되돌아보면 아쉽기 그지없다. 말장난 대신 풍자를 보여주길 바랐던 거창한 기대는 둘째 치고, 그나마 신선하던 '개그'들조차 시들해졌기 때문이다. 내적, 외적으로 바람 잘 날 없었던 2005년의 코미디계의 발자취를 따라가 보자.

후배 폭행, 단체행동으로 얼룩진 2005년 코미디계

a 한 때 많은 인기를 끌었던 <개그콘서트>의 '깜빡홈쇼핑'.

한 때 많은 인기를 끌었던 <개그콘서트>의 '깜빡홈쇼핑'. ⓒ KBS

연초 <웃찾사>는 '리마리오'를 필두로 '만사마' 등 기발한 캐릭터를 앞세우며 한 때 30%의 시청률에 가까이 다가섰다. 여기에 과거 '코미디 왕국'의 자존심을 회복하려는 MBC <웃으면 복이 와요>가 가세하면서 코미디는 3파전의 양상을 띠기 시작했다.

<웃으면...>은 일상의 짜증나는 상황을 익살맞게 그려낸 코너 '오! 짜장'과 복고 정통 코미디를 재현하겠다는 '이것이 슬랩스틱이다' 등의 코너들을 앞세우며 잠시 호응을 받는 듯했다. 하지만 이미 빠른 호흡과 톡톡 튀는 캐릭터에 익숙해진 관객들의 입맛을 사로잡는 데는 실패했다.

이어 지난 5월에는 충격적인 두 사건이 개그계를 강타했다. KBS의 한 개그맨이 군기를 잡는다며 자신의 형뻘인 후배를 폭행한 '개그계 선후배 폭행사건'에 이어 SBS <웃찾사>에 출연하는 핵심 멤버 14명이 "노예 계약의 희생양"이라며 기획사와 힘겨루기에 들어간 것.


두 사건에 싸늘해진 시청자들의 외면은 곧바로 시청률의 하락을 가져왔고 이런 분위기는 현재까지도 이어지고 있다. 특히 단체 행동에까지 나섰다가 어설픈 화해 제스처로 봉합해 버린 <웃찾사>는 돌이킬 수 없는 자충수를 놓아 버린 격이 됐다.

돌아온 컬투, 그때그때 달라야죠?


a <웃찾사> 구원투수로 나섰던 '그때 그때 달라요2', 하지만 <웃찾사>를 구하진 못했다.

<웃찾사> 구원투수로 나섰던 '그때 그때 달라요2', 하지만 <웃찾사>를 구하진 못했다. ⓒ SBS

결국 방송은 '구관이 명관'이라는 해묵은 대책을 강구했다. 바로 해결사 '컬투(정찬우, 김태균)'의 등장. 컬투가 누군가. 죽기 살기로 영어에 매달리는 우리나라의 현실을 풍자한 '그때그때 달라요'로 감각적인 젊은층에게 크게 어필하며 공전의 히트를 기록한 사람들이 아닌가. 스토리보다는 빠른 호흡을 바탕으로 순간적인 재치가 번뜩이는 컬투의 스탠딩 코미디는 <웃찾사>라는 프로그램의 색깔과 잘 어울렸고 컬투는 순식간에 <웃찾사>의 대표 얼굴이 됐다.

지난 4월 중순 "재충전과 아이디어 계발을 위해" 하차했던 컬투가 SBS의 11월 가을 개편에 맞추어 구원투수로 등장한다고 했을 때 시청자들의 기대는 높았다. 하지만 형님들의 귀환은 정말 '생뚱' 맞았다. 물론 반년이라는 시간이 재충전에 충분하다는 것은 아니지만 돌아온 컬투가 선택한 방식은 '과거 복제'인 '그때그때 달라요2'.

영어 대신 오염된 한국어를 택한 것만 빼면 이전의 '그때그때 달라요'와 달라진 점을 느낄 수 없었다. 한글 파괴의 심각성을 알린다는 취지였다고는 하지만 코미디의 기본은 '재미'이다. 이미 식상해진 관습을 반복하는 컬투에게서 시청자들은 고개를 돌렸다. 다행히 그런 반응을 감안해, 1달여만에 막을 내렸다고 하니 그 최소한의 '감'에 감사할 뿐이다.

그들은 엄격한 심의에 대한 비판을 담은, 예의 없는 동요를 '예의 있게' 각색하는 '4가지 합창단'을 준비 중이라고 한다. 과거의 명성에 매달리지 않고 '그때그때 달라요'가 사람들에게 획기적으로 다가왔던 그때의 그 마음을 잊지 않았으면 한다.

"봉숭아 학당, 공부는 안하고 장기자랑만?"

a 신인들의 장기자랑 대회가 되어버린 <개그콘서트>의 '봉숭아학당'

신인들의 장기자랑 대회가 되어버린 <개그콘서트>의 '봉숭아학당' ⓒ KBS

<웃찾사>가 우여곡절을 겪는 사이 KBS는 20%대의 꾸준한 시청률을 유지하며 <개그콘서트>를 코미디 프로그램의 대명사로 만들었다. 비교적 탄탄하게 자리를 잡은 각 코너들을 바탕으로 올 한 해 안어벙(안상태), 출산드라(김현숙)에 이어 육봉달(박휘순) 등의 캐릭터를 연달아 히트 시켰다.

그러나 너무 과도한 자신감 때문일까. 언제부터인가 <개그콘서트>의 대표 코너인 '2005 복숭아 학당'은 극의 스토리와는 상관없는 인기 있는 캐릭터들의 집합소가 되어 버렸다. 개그맨들이 자신만의 장기를 선보이는 장기 자랑판이 되어 버린 것. 그렇다고 해서 개인기가 나쁘다는 건 아니다. 봉숭아학당 또한 과거 90년대 초반 맹구(이창훈 분)라는 걸출한, 한국 코미디의 대표 캐릭터를 낳은 바 있다.

원래 '봉숭아 학당'은 한 가지 주제를 제시하면 그것을 자신만의 방법으로 해석해 웃음을 주는 코너였다. 하지만 지금은 '학당'이라는 이름이 무색할 정도가 되어 버렸다. 실제 지난 17일 방송만 봐도 칠판에는 '겨울방학계획'이라는 주제가 엄연히 적혀 있었지만 출연자들은 매주 반복하는 자신들의 개인기를 선보이기에만 바빴다.

'봉숭아 학당'은 <개그콘서트>를 이끌어 왔고 오늘의 자리가 있게 한 대표 코너였다. 스탠딩 코미디에 주력했던 <웃찾사>마저도 한때 '비둘기 합창단'이라는 코너로 봉숭아 학당에 맞불을 놓으려 했고 최근에는 '랄랄라 극장'을 신설했다.

하지만 프로그램을 총망라하는 대형 대표 코너라면 그에 걸맞은 내용도 함께 따라와야 하지 않을까. 포장만 요란하고 뜯어보면 정작 먹을 것은 변변치 않은 종합선물세트를 받아들여야 하는 시청자의 입장을 다시 한 번 생각해 보길. 왜냐하면 시청자들은 전후 맥락 없이 말초적인 웃음만을 지어주는 '파블로프의 개'가 아니기 때문이다.

"누구냐? 너" "신인입니다!"

a <개그콘서트>의 출산드라(왼쪽)와 육봉달(오른쪽)

<개그콘서트>의 출산드라(왼쪽)와 육봉달(오른쪽) ⓒ KBS

코미디 팬으로서 올 한해 그나마 행복했던 것은 재기발랄한 신인들이 기대하지 않았던 웃음을 툭툭 던져줄 때였다. '기름쟁~이' 리마리오(이상훈)가 밟는 스텝에 허리를 휘청대며 웃음 짓던 관객들은 '칼라 파워!' 복학생(유세윤)을 보고 다시 한 번 배꼽을 부여잡았다.

'마데 홈쇼핑'의 안어벙이 '매진'을 기록하며 사라진 다음에는 출산드라가 '마른 죄인'들을 벌했고, 마지막에는 육봉달이 '떡볶이를 철근 같이 씹어 먹으며' 각종 포털 사이트 검색 순위를 점령하고 있다.

이들의 강점은 무엇보다 신선하다는 것. 그러나 단지 '얼굴이 많이 팔리지 않은' 젊은 피이기 때문에 신선했던 것은 아니었다. 이들 캐릭터에는 삶의 페이소스가 진하게 배어 있고 그것이 코미디와 결합하면서 유쾌한 패러디의 힘을 발휘한다.

아직도 여전히 만날 수 있는 복학생이 그랬고 외모 지상주의 사회를 풍자한 출산드라 역시 그렇다. 또한 "그까이꺼 대~충"을 연발하는 경비 아저씨(장동민) 또한 주위에서 흔히 볼 수 있는 구수한 이웃집 아저씨의 모습을 그려내 많은 박수를 받았다. 때문에 이들은 시청자들의 공감을 이끌어내며 많은 사랑을 받을 수 있었다. 물론 연기보다는 '강하고 센' 캐릭터 개발에만 골몰하는 신인들도 있었지만 그런 캐릭터들은 시청자들에 의해 자연스럽게 정리될 것이다.

삶의 페이소스가 배어 있는 코미디를 기대하며

몇몇 사람들은 상황 묘사보다는 타인에 대한 일방적인 '깎아내리기' 때문에 코미디가 재미없다고 말한다. "못 생긴 게 어딜 감히..."하는 식의 개그는 순간의 웃음을 유발할지는 몰라도 결국 인간에 대한 배려라는 측면에서 보면 씁쓸함을 던져준다.

시청률에 대한 강박관념을 이해하지 못하는 건 아니지만 '과연 저렇게까지 해서...'라는 아쉬움을 줬던 몇몇 코미디 코너를 되짚어 보면 2005년 한국 코미디에 대한 아쉬움이 남을 수밖에 없다. 블랑카(정철규)를 통해 '이주노동자' 문제라는 우리 사회의 아픈 자화상을 들여다보듯 웃음 이후에 다시 한 번 삶의 진정성을 생각해 보는 코미디를 바라는 건 너무 욕심일까.

어쨌건 2005년 한 해, 한국 코미디여 수고 많았다. 한 번의 웃음을 만들기 위해 머리 쥐어짜며 괴로워했을 그 노고를 모르는 바 아니지만 새해에는 부디 '잔머리'가 아닌 '가슴'으로 웃음을 주었으면 좋겠다.
댓글
이 기사가 마음에 드시나요? 좋은기사 원고료로 응원하세요
원고료로 응원하기

AD

AD

AD

인기기사

  1. 1 "난리도 아닙니다" 농민들이 올해 벼 빨리 베는 이유 "난리도 아닙니다" 농민들이 올해 벼 빨리 베는 이유
  2. 2 이러다가 대한민국이 세계지도에서 사라질지도 모른다 이러다가 대한민국이 세계지도에서 사라질지도 모른다
  3. 3 "자기들 돈이라면 매년 수억 원 강물에 처박았을까" "자기들 돈이라면 매년 수억 원 강물에 처박았을까"
  4. 4 지금도 소름... 설악산에 밤새 머문 그가 목격한 것 지금도 소름... 설악산에 밤새 머문 그가 목격한 것
  5. 5 "X은 저거가 싸고 거제 보고 치우라?" 쓰레기 천지 앞 주민들 울분 "X은 저거가 싸고 거제 보고 치우라?" 쓰레기 천지 앞 주민들 울분
연도별 콘텐츠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