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영미의 시는 불행하다?

시집 <돼지들에게>, '혐의'와 '소문'을 넘어 진정한 시의 자리를 찾아서

등록 2005.12.21 15:59수정 2005.12.21 15: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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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다는 건 내게 치욕이다. 시는 그 치욕의 강을 건너는 다리 같은 것. 내가 왜 어떤 항구에도 닻을 내리지 못하는 방랑자가 되었는지, 돌아갈 고향이 없는 나그네처럼 떠돌았던 지난 시절의 이야기들을 나직이 풀어놓을 힘이 내게 남아 있으면 좋겠다. 해변에 엉거주춤 서 있는 저 가엾은 백로들도 훌훌 털고 비상할 때가 있으리라. - 최영미의 시작노트, <1999년 가을, 속초에서> 중에서 (P.47)

<돼지들에게> 표지
<돼지들에게> 표지실천문학사
최영미는 불행하다. 아니 최영미의 시는 불행하다. 누구도 시를 시로만 읽지 않기 때문이다. 최영미의 시집에는 다분히 어떤 '혐의'가 있다. 심지어 그 혐의는 공공연한 치욕 같은 것이기도 하다. 물론 처음부터 그랬던 것은 아니다.


그의 첫 시집 <서른, 잔치는 끝났다>가 지난 시대에게 보내는 레퀴엠처럼 회자되면서 그의 시는 사라졌다. 시가 사라진 자리엔 '혐의'와 '소문'만이 낡은 지붕 아래 천장의 쥐오줌처럼 얼룩으로 남았다.

<꿈의 페달을 밟고> 이후 7년 만에 나온 이번 시집 <돼지들에게>도 바로 그런 점에서 '최영미답다'고 말할 수 있다. 이미 시집을 둘러 싼 무성한 소문들로 저잣거리는 취했다. 누가 제일 먼저 술잔을 돌렸는지는 아무도 모른다. 저마다 취해서 질러대는 괴성만 들릴 뿐.

<돼지들에게>를 얼핏 읽으면 우화집을 펼쳐 든 것 같은 착각을 하게 된다. 돼지, 여우, 개, 앵무새 등의 동물들이 자주 등장하기 때문이다. '감방에서 한 이십 년 썩은 뒤에'(돼지의 변신), '짐승 중에 가장 인간에 가깝다는 여우가 된'(여우와 진주의 러브 스토리), '돼지(들)'가 최영미 식 우화의 주인공이다. 이들은 모두 단수형이기도 하고 복수형이기도 하다.

최영미가 들려 준 우화의 내용을 거칠게 재구성해 보면 다음과 같다.

감방에서 한 이십 년 썩은 뒤 짐승 중에 가장 인간에 가깝다는 여우가 된 돼지가 있다. 처음엔 워낙 작소 소심했으나 감옥을 나온 뒤 하루가 다르게 키가 커졌다. 그의 머릿속은 온갖 속된 욕망과 계산들로 복잡하지만 카메라 앞에선 우주의 고뇌를 짊어진 듯 심각해질 줄을 안다. 그는, 깊은 산중에서 혼자 지내다 병에 걸려 도시로 나와 하룻밤 잘 곳이 없어 찾아간 친구에게 쫓겨난 진주에게, 우유를 사주고 버스를 타고 교외로 소풍도 다녀온다. 결정적으로 여우는 진주에게 따뜻한 밥 한 끼를 대접했다. 진주의 뺨에서 눈물이 고드름처럼 녹아 흘렀다. 그것은 비극의 시작이었고 진주와 여우는 여러분이 짐작하는 관계가 되었다. 그러나 그는 자신이 돼지가 아니라고 말한다. 그는 스스로 훌륭한 양의 모범이라고 굳게 믿고 있다. 그는 진주를 한 번 보고 싶었을 뿐, 만질 생각은 없었다고 해칠 의도는 더더군다나 없었다고 자신은 오히려 진주를 보호해 왔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그는 결국 돼지가 된다. 그들은 모두 돼지가 되었다. - 시집 1부에 실린 시들의 본문을 이용하여 기자가 재구성 한 것임


시집에 실린 최영미 시인의 모습
시집에 실린 최영미 시인의 모습실천문학사
여기에서 돼지(들), 여우, 진주 등이 갖는 상징은 너무 뻔하다. 문제는 그 뻔한 상징 속에 세상의 추한 음모가 도사리고 있고, 그로 인해 최영미의 시는 다시금 '혐의'와 '소문'의 더께를 얹을 수밖에 없다는 데 있다.


사람들은 상징의 의미보다는 그 안에 깃들인 '혐의'를 추론하고 그것을 다시 '소문'으로 재생산하는데 더 큰 흥미를 갖는다. "결국 그렇게 그들은 평생을 연극배우로 살다"(권위란 2) 가면 그만인 것이다. 지금까지의 불문율에 따르면 사람들에겐 누구도 책임을 묻지 않았다. 그들에겐 즐길 권리만 있을 뿐.

그런 의미에서 최영미의 시는 자학을 통한 쾌락(masochism)의 일면을 보여준다고 할 수 있다. '혐의'로 사람들을 불러 모으고 그들이 만들어내는 '소문'을 통해 스스로의 자리를 마련하고 있으니 말이다. 이것은 네거리에 봉분 없는 무덤을 만들어 사람들의 발길에 기꺼이 짓밟히며 영원히 회자되기를 바랐던 황진이의 욕망과 너무 닮았다.


그 많은 '혐의'와 '소문'의 잡귀들을 스스로 불러들이는 무격(巫覡)의 자리에 최영미가 있고 그 무격의 중얼거림이 바로 최영미의 시이다. 그것을 넘어서서 "나그네처럼 떠돌았던 지난 시절의 이야기들을 나직이 풀어놓을 힘"으로 "훌훌 털고 비상"하여 진지하게 그가 새로운 굿판을 차리기를 기다려보는 것도 우리가 이 혼란스런 소문의 시기를 잘 보내는 방법 가운데 하나가 될 수 있을 것이다.

덧붙이는 글 | <돼지들에게>, 최영미 시집, 2005년 11월, 실천문학사, 8000원

덧붙이는 글 <돼지들에게>, 최영미 시집, 2005년 11월, 실천문학사, 8000원

돼지들에게 - 제5회 이수문학상 수상작

최영미 지음,
은행나무, 20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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