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돼지들에게> 표지실천문학사
최영미는 불행하다. 아니 최영미의 시는 불행하다. 누구도 시를 시로만 읽지 않기 때문이다. 최영미의 시집에는 다분히 어떤 '혐의'가 있다. 심지어 그 혐의는 공공연한 치욕 같은 것이기도 하다. 물론 처음부터 그랬던 것은 아니다.
그의 첫 시집 <서른, 잔치는 끝났다>가 지난 시대에게 보내는 레퀴엠처럼 회자되면서 그의 시는 사라졌다. 시가 사라진 자리엔 '혐의'와 '소문'만이 낡은 지붕 아래 천장의 쥐오줌처럼 얼룩으로 남았다.
<꿈의 페달을 밟고> 이후 7년 만에 나온 이번 시집 <돼지들에게>도 바로 그런 점에서 '최영미답다'고 말할 수 있다. 이미 시집을 둘러 싼 무성한 소문들로 저잣거리는 취했다. 누가 제일 먼저 술잔을 돌렸는지는 아무도 모른다. 저마다 취해서 질러대는 괴성만 들릴 뿐.
<돼지들에게>를 얼핏 읽으면 우화집을 펼쳐 든 것 같은 착각을 하게 된다. 돼지, 여우, 개, 앵무새 등의 동물들이 자주 등장하기 때문이다. '감방에서 한 이십 년 썩은 뒤에'(돼지의 변신), '짐승 중에 가장 인간에 가깝다는 여우가 된'(여우와 진주의 러브 스토리), '돼지(들)'가 최영미 식 우화의 주인공이다. 이들은 모두 단수형이기도 하고 복수형이기도 하다.
최영미가 들려 준 우화의 내용을 거칠게 재구성해 보면 다음과 같다.
감방에서 한 이십 년 썩은 뒤 짐승 중에 가장 인간에 가깝다는 여우가 된 돼지가 있다. 처음엔 워낙 작소 소심했으나 감옥을 나온 뒤 하루가 다르게 키가 커졌다. 그의 머릿속은 온갖 속된 욕망과 계산들로 복잡하지만 카메라 앞에선 우주의 고뇌를 짊어진 듯 심각해질 줄을 안다. 그는, 깊은 산중에서 혼자 지내다 병에 걸려 도시로 나와 하룻밤 잘 곳이 없어 찾아간 친구에게 쫓겨난 진주에게, 우유를 사주고 버스를 타고 교외로 소풍도 다녀온다. 결정적으로 여우는 진주에게 따뜻한 밥 한 끼를 대접했다. 진주의 뺨에서 눈물이 고드름처럼 녹아 흘렀다. 그것은 비극의 시작이었고 진주와 여우는 여러분이 짐작하는 관계가 되었다. 그러나 그는 자신이 돼지가 아니라고 말한다. 그는 스스로 훌륭한 양의 모범이라고 굳게 믿고 있다. 그는 진주를 한 번 보고 싶었을 뿐, 만질 생각은 없었다고 해칠 의도는 더더군다나 없었다고 자신은 오히려 진주를 보호해 왔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그는 결국 돼지가 된다. 그들은 모두 돼지가 되었다. - 시집 1부에 실린 시들의 본문을 이용하여 기자가 재구성 한 것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