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재소설]정통무협 단장기 333회

등록 2005.12.22 08:17수정 2005.12.22 08: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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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80 장 동문서답(東問西答)

충격이었다. 옻칠을 해 꽤 고급스럽게 보이는 여섯 개의 흑관(黑棺)이 전달되어 왔다. 그 관들은 철혈보의 보주 독고문의 거처 바로 앞에 놓여졌는데 그 안에 든 시신들이 누구인지 확인하게 되자 제마척사맹의 군웅들은 큰 충격에 빠졌다.


냉혈도(冷血刀) 반당(班堂)이 누군가? 비록 무림에 모습을 보인 일은 별로 많지 않았지만 살아있는 전설로 불리던 불패의 승부사가 아니었던가? 거기에다 원월만도(圓月彎刀) 좌승(佐承)과 그 수하들의 시신이라니…. 누가 이들을 죽일 수 있단 말인가? 상대에 대한 막연한 두려움이 군웅들의 등골을 서늘하게 만들었다.

하지만 정작 가장 큰 충격을 받은 인물은 철혈보의 보주 독고문이었다. 시신은 때로 많은 것을 가르쳐 준다. 독고문은 반당과 좌승의 시신을 보면서 더욱 큰 충격에 빠질 수밖에 없었다. 반당의 시신은 분명히 말하고 있었다.

정당한 승부를 했고, 패했노라고. 최선을 다해 싸웠지만 시신으로 누울 수밖에 없었노라고…. 상처의 흔적은 독고문이 아는 한 섭장천의 성하구구검에 당한 것이었다. 중원에 존재하는 무학 중 반당을 쓰러뜨릴 검은 겨우 세 손가락을 꼽을 수 있을 정도일 것이다. 그것마저도 반당을 쓰러뜨릴 수 있을지 장담할 수 없는 것이었다.

헌데 분명 반당은 성하구구검에 당했고, 더욱 분명한 것은 상대가 왼손을 쓰는 좌수검이었다는 사실이었다. 섭장천 본인에게 당한 것일까?

하지만 의문은 남았다. 자신이 지금까지 알기로 성하구구검에는 반당의 시신에 나타난 치명적인 검흔은 존재하지 않았다. 무엇일까? 반당의 몸에 나타난 저 여덟 개의 검흔 중 다섯 개는 정말 이해가 되지 않는 검흔이었다. 섭장천은 그 동안 성하구구검을 더욱 발전시켜 더욱 가공한 검초로 승화시킨 것일까?


하지만 모든 것에는 원류가 있고, 색깔이 있다. 다섯 개의 검흔은 본래의 것과 색깔이 달랐다. 그 본질적인 부분이 달랐다. 갑작스런 외부의 충격으로 인성(人性)이 달라진다면 저렇듯 다른 색깔을 가질 수도 있지만 분명 아니었다. 그렇다면 도대체 누구일까?

원월만도 좌승과 그 수하들의 시신들에 나타난 상흔 역시 몇 가지 의문이 남았다. 그들과 상대한 인물들은 모두 일곱으로 추정되었다. 좌승과 그 수하들보다 두 명이 더 많았지만 그리 불리한 숫자는 아니었다. 하지만 그들이 가지고 있는 병기가 무엇인지 추측하기 매우 어려웠다.


검과 도인 것 같기도 하고 봉(棒)인 것 같기도 했다. 창(槍)이었을까? 도대체 베고 때리고 찌를 수 있는 무기가 무엇일까? 베인 상처를 보면 분명 창은 아니었다. 그렇다고 맞은 흔적을 보면 검이나 도로 볼 수 없었다. 상대가 일곱이니 각기 다른 병기를 사용했다고 추정하면 간단해 진다.

하지만 그것도 아니었다. 좌승과 수하들의 몸에 있는 상처는 거의 엇비슷했다. 일곱 명이 단 한명을 상대하는 차륜전을 벌렸다거나 아니면 그러한 효과를 가진 진을 구축해 싸웠다면 가능하다. 그럼에도 그렇게 생각하기에는 무리가 있었다. 결론은 단 한가지였다. 상대 일곱은 분명 자신이 알지 못하는 기형병기를 가진 인물들이었다. 도와 창의 이점을 최대한 살리는 기형병기.

“……!”

이미 주위에서 웅성거리던 군웅들을 물리치고 혼자서 시신들을 본 것도 반 시진. 독고문은 그들 시신을 두고 천막 안으로 들어갈 수 없었다.

반당은 형제처럼 지내 온 사이였다. 타협을 모르고 오직 외골수로 철혈보에 헌신한 사람이었다. 말은 별로 하지 않아도 누구보다 보를 걱정하고 보를 위해 전력을 쏟았던 사람이었다. 누구보다 믿을 수 있는 사람이었다. 헌데 그 반당이 싸늘한 시신이 되어 자신의 앞에 누워있는 것이다.

이백년 간 중원의 패자로 군림했던 철혈보의 한 귀퉁이가, 그 상징이었던 철혈각의 한 기둥이 무너져 내리고 있는 환영이 보였다. 지금까지 완벽하다고 생각했던 모든 것이 어느 순간부터 커다란 허점을 보이고 있는 것 같았다.

산다는 것과 죽는 것은 무슨 차이일까? 갑자기 끝이 보이지 않는 황무지에 홀로 서 있는 듯한 외로움이 밀려들었다. 독고문은 반당의 시신 앞에 무릎을 꿇었다. 보주의 신분으로 수하의 시신 앞에 무릎을 꿇는 것은 흔치 않은 일이다. 하지만 반당이 죽은 것이 마치 자신의 잘못인 양 자책했다.

(미안하네. 그리고 부끄럽네.)

독고문의 지그시 감은 눈에 물기가 흘러나왔다. 사내의 눈물이란, 더구나 철혈보 보주의 눈물이란 있을 수 없는 일이다. 하지만 그 눈물이 얼마나 값비싼 것인지 아는 사람은 많지 않다. 진정한 사내의 눈물은 반드시 그에 상응하는 대가를 치러야 한다. 이제 상대는 사내의 눈물이 얼마나 값비싼 것인지 똑똑히 알게 될 것이다.

얼마나 그렇게 미동도 하지 않은 채 있었을까? 이미 지그시 감은 눈으로 배어 나왔던 물기가 모두 말라붙을 즈음 그의 입에서 나직한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보았나?”

독고문의 뒤에는 언제부터 와 있었는지 구양휘가 서 있었다. 그의 오른쪽 어깨에는 술독이 메어져 있었는데, 그러고 보니 왼손에는 두개의 잔이 들려있었다.

“술을 드시고 싶어 하실 것 같아 가지고 왔소.”

“무서운 검이네. 자네의 검과는 다른 아주 음습한 무형의 검이라 생각되네.”

“안주는 없소. 그렇다고 품속에 언제 넣어두었는지 모를 육포는 냄새가 많이 날거요.”

“섭장천 본인은 분명 아니네….”

“낙화생(落花生)이라도 있으면 좋으련만….”

동문서답(東問西答)이었다. 누가 보면 분명 대화를 나누는 것처럼 생각하겠지만 이것도 대화라 할 수 있을까? 물론 모든 대화가 질문하고 답하는 형식이 될 수는 없지만 이 두 사람 간의 대화는 공통점이 전혀 없었다. 더구나 한 사람은 등을 보이고 있고, 또 한 사람은 등에 대고 말하고 있다.

“섭장천이 아니라면 도대체 누굴까? 어떤 인물이 이 정도의 경지에 오른 것일까?”

“이 술독은 매우 무겁소, 받아주시지 않는다면 떨어뜨릴지도 모르오.”

“반당을 죽인 상대와 자네의 검이 마주치면 어떻게 될까?”

“이 술은 장원홍으로 매우 귀한 것이오. 아직 술 마개도 따지 않은 것이란 말이오.”

처음으로 독고문이 몸을 일으키며 뒤로 돌았다. 그러자 두 사람의 입에서 동시에 말이 나왔다.

“후배는 자신할 수 없소.”
“나는 그 술독이 깨지지 않길 바라네.”

대답은 엇갈렸다. 처음으로 상대가 한 말에 대해 대답한 것이지만 역시 대화가 되지 않았다. 하지만 그것으로 이미 모든 것을 대답했고, 두 사람은 충분히 대화한 것이다.

“보주께서는….”
“자네는….”

또 다시 말이 엇갈렸다. 그러자 문득 두 사람은 입가에 희미한 미소를 머금었다. 독고문이 말없이 구양휘에게 다가와 술독을 받아 들었다. 그리고는 천천히 술 마개를 벗겨내기 시작했다.

“자네 말대로 매우 좋은 술이군.”

주향이 코로 스며들고는 주위로 퍼지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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