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무반 '얼차려'가 달 쳐다보기?

군대에서 발견한 희망 한 토막

등록 2005.12.22 15:34수정 2005.12.22 16: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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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권의 문제 또한 어느 정도는 의지의 문제가 아닐까. 자신의 인권을 스스로 지켜내려는 의지, 타인의 인권을 존중하려는 의지, 궁극적으로 우리 사회가 인권을 존중하는 사회로 나아가게 하려는 의지. 그런데 말처럼 쉽지 않다. 의지를 꺾는 요인들이 너무도 많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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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강우근

내무반에도 또래의식이 있다. 말하자면 말년 제대가 얼마 안 남은 병장은 그들끼리 친했고, 이제 막 병장 1호봉을 단 모 병장부터 상병 고참들까지가 서로 친했다. 일병은 일병끼리 친했으며, 이등병은 갓 들어온 신참과 친했다.

아래쪽은 뭘 따질 급수가 안 되니, 대개의 갈등은 위쪽에서 일어났다. 말년 병장들은 말년이라고 짐짓 뒷짐을 지면서도 자신들의 기득권을 조금도 잃지 않으려 했다. 이에 반해 막 세력을 얻어가는 모 병장 1호봉 이하 상병 고참들은 의당 내무실의 질서를 자신들 위주로 잡아가려고 했다.

하지만 결국은 말년병장들의 승리였다. 그것은 군대라는 사회가 철저한 계급 사회이기도 했지만, 말년병장들의 기가 워낙 드셌기 때문이다. 그들은 일석점호 후에는 항상 흔한 말로 군기를 잡았다. 그들의 논리는 아주 간단했다. 자신들은 전 고참에게 당할 만큼 당했는데, 밑에 것들이 그걸 몰라준다는 거였다.

그들은 특히 모 병장을 '갈궜다'. 모 병장부터가 삐딱하니까 밑의 아이들이 죄다 싸가지 없다는 거였다. 일병이던 내가 보기에 그들의 논리는 조금 억지스러웠는데, 모 병장이야말로 선임병들에게 가장 깍듯할 뿐만 아니라, 대내외적으로도 가장 모범적인 사병이었기 때문이다.

그 때문이었을까? 모 병장을 위시로 상병 고참급들은 똘똘 뭉쳤다. 그들은 자신들이 말년 병장이 되면 절대 선임들의 행위를 답습하지 않겠다고 공공연히 피력했다. 자신들이 고참이 되면 군기확립을 빙자한 인권유린 행위가 절대로 없는, 행복한 내무반을 선사하겠다고 우리 졸병들에게 찬란한 어조로 약속하기도 했다.


하지만 몇 개월이 흐르고 모 병장이 최고 고참이 되었을 때, 상황은 전과 그다지 달라지지 않았다. 상병 고참급들이 병장이 되면서, 이전의 고참들과 매우 똑같은 방식으로 군기를 확립해 나가려고 했다.

이때, 그들의 행동 방식에 제동을 건 사람이 바로 모 병장이었다. 모 병장은 새내기 병장들의 군기확립 행위를 사사건건 막았다. 나아가 화를 내고 야단을 치기도 했다. "우리가 고참들에게 당했던 것과 졸병들에게 약속한 것을 깡그리 잊고 있다"는 것이었다. 후임 병장들은 이에 항변하면서, "모 병장님이 싸고 도니까 밑엔 놈들이 더 버릇없어진다"고 붉으락푸르락했다. 그들은 오랫동안 논쟁했다.


결론은 새내기 병장들이 모 병장을 왕따하는 것으로 났다. 같이 고생했으면서 혼자 옳은 척, 잘난 척한다는 거였다.

하지만 이후로도 모 병장은 변하지 않았다. 그는 병장임에도 자신의 관물대를 스스로 청소했고, 휴일에는 이등병까지 전부 TV시청을 하도록 했으며, 일이등병에게 전투화 닦기도 맡기지 않았다. 이 모든 것이 우리 부대에서는 파격적인 일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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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강우근

특히 그가 군기를 잡는 것은 볼 만했다. 소연병장으로 내보내 달을 쳐다보고 묵상하는 시간을 갖게 하는 거였다. 당시의 얼차려 기준으로 보면 파격적이다 못해 괴이한 얼차려였다. 나도 모 병장 덕분에 달을 참 여러 번 보았는데, 그렇게 달을 자세히 오랫동안 바라본 적은 전에도 없었고 아마 이후에도 없을 것이다.

그는 유다르게 행동한 대가로 왕따를 넘어, 무능력한 병장이라는 소리까지 듣게 되었다. 심지어 그가 제대하는 날, 새내기 병장들은 의례적인 내무반 전역 이벤트도 해주지 않았다. 싸구려 선물조차 없었다. 내가 본 대대 전역병 중 가장 초라한 전역이었다.

하지만 그는 내가 아는 한 전역병들 중에서 가장 많은 것을 남기고 갔다. 그것은 내무반에서 서로 존중하는 법이었다. 그리고 변화였다. 내 세대가 최고참 병장급이 되었을 때, 우리는 약속이나 한 듯이 모 병장의 행동 방식을 따랐다.

우리 내무반은 대대에서 가장 군기 빠진 내무실로 온 대대에 소문이 났지만, 그래도 우리는 "우리 내무반이 대대에서 분위기가 제일로 좋다"고 자부하며 희희낙락했다. 모 병장은 자신의 세대는 변화시키지 못했지만, 그 다음 세대인 우리를 변화시켰던 것이다.

만약 그 때 모 병장이 왕따가 두려워, 인정받지 못하고, 대접받지 못하는 게 두려워 자신의 의지를 꺾었다면 그 결과는 어땠을까?

나는 그 모 병장을, 수많은 요인들에 맞서, 자신의 인권을 스스로 지켜 내려는 의지를, 타인의 인권을 존중하려는 의지를 꿋꿋하게 발휘했던 청년으로 기억한다. 나는 그런 사람들 때문에 우리 사회가 그나마 인권이 존중되는 사회로 나아가려는 의지를 포기하지 않고 있는 것이라 믿는다.

덧붙이는 글 | 이 글은 국가인권위원회가 발간하는 월간 <인권>에 실려 있습니다.

덧붙이는 글 이 글은 국가인권위원회가 발간하는 월간 <인권>에 실려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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