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네의 칭찬은 노부를 매우 기쁘게 하는군. 진심으로 받아들이겠네. 허나 이제야 자네 생각을 알게 되었고, 그것은 노부를 너무 바쁘게 만드는 일이라네."
균대위의 수장들 간에 따로 임무를 맡기면서 서로간 자신의 임무가 어떠한 것인지 말하지 말도록 부탁한 그 대상은 바로 균대위의 수장들이었다.
그 사실까지 과노인이란 인물이 알고 있음은 균대위의 수장 중에 저들과 내통하는 자가 있음을 확인해 주는 증거였다. 아주 오래전부터 은밀하게 활동한 세력이라면 균대위에도 스며들지 말라는 법이 없다고 생각했다. 확인하는 게 무엇보다 중요했다.
사실 균대위의 수장들과 만난 것은 수개월에 지나지 않는다. 그들을 완전히 알기엔 턱없이 부족한 시간이다. 우려하던 것이 확인되자 그는 마음이 급해졌다. 하지만 지금 그가 할 수 있는 일은 없었다. 그는 내심 자신이 안배한 또 하나의 계획이 이루어지길 비는 수밖에 없었다. 만약 자신이 안배한 그 인물이 이들과 내통하는 자라면 아마 균대위 수장 모두는 죽는 순간까지도 왜 죽는지 알 수 없을 것이다.
“나 역시 당신 때문에 매우 바빠질 것 같소.”
담천의의 말에 전월헌이 비릿한 조소를 머금으며 입을 열었다.
“자네는 아마 이 이후로 바빠질 일도, 뛰어다닐 필요도 없게 될 테니 걱정할 필요가 없을 것 같군.”
“휴우…!”
담천의는 전월헌의 말에 짐짓 고민스럽다는 듯 한숨을 내쉬었다. 다른 사람들이 보기에는 전월헌의 말이 분명히 이 자리에서 담천의를 죽이겠다는 말이었기 때문에 어떻게 이 위기를 모면할까 고민하는 것으로 비추어졌다. 허나 담천의의 입에서 나온 말은 아주 딴 판이었다.
“사람들은 말이오. 이상하게도 과연 될지 안 될지 모르는 일을 자신만의 생각으로 반드시 된다고 큰소리치는 경향이 있소. 사실 아무리 자신 있는 일도 이루어지는 것보다 이루어지지 않는 경우가 더 많은데도 말이오.”
담천의의 말은 분명 전월헌을 비웃는 말이었다. 하지만 과노인은 자신도 모르게 고개를 끄떡였다. 그의 말대로 자신이 의도했던 일 중에 얼마나 성취해냈는지 생각하면 스스로 부끄러워진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전월헌의 입가에 더욱 진한 미소가 띠워지자 과노인은 고개를 흔들었다.
“자네는 심계 못지않게 언변이 매우 좋은 사람이네. 허나 사람이 의도했던 일 중에 반드시 해야 할 일이 있고, 하지 않아도 괜찮은 일이 있다네. 이번 일은 반드시 해내야 하는 일이지.”
과노인의 말은 전월헌의 결심을 더욱 굳게 하는 충동적인 말이었다. 또한 그것은 자신에 대한 다짐이기도 했다. 보면 볼수록 담천의는 반드시 제거해야 할 인물이었다. 저런 자를 그냥 내버려둔다면 그들의 계획에 막대한 차질을 가져올 것이 분명했다. 더구나 이번 기회를 놓친다면 정말 다시 기회가 올지 장담할 수 없는 일이었다.
“내가 언변이 좋아진 것은 확실히 나의 유능한 조력자 덕분이오. 하지만 그는 지금 이렇게 어려운 순간에도 끝까지 나를 버려두고 있으니 내 얼마나 답답하겠소.”
그 순간이었다. 마차 뒤에서 목소리가 들리며 한 인물이 터덜터덜 걸어 나왔다.
“영주는 끝까지 본인을 물고 늘어지는구려. 조금만 더 시간을 끌어주면 좋았을 텐데…. 너무 일찍 불러 손해를 보지 않을까 걱정이오.”
나타난 인물은 예상대로 우교였다. 그는 몸에 꽉 맞는 검은색 피풍의를 걸쳤는데 덩치가 큰 관계로 매우 우스꽝스럽게 보였다. 허나 장내로 걸어 나오는 우교의 시선은 과노인이나 전월헌도 아닌, 그렇다고 담천의에게 가 있는 것이 아니었다.
그는 상엽 형제의 옆에 서있는 사내에게 고정되어 있었다. 빽빽하게 그어진 상흔이 있는 얼굴에 표정의 변화가 나타날 수 있다는 것은 놀랄 만한 일이었다. 그것은 처음 우교란 이름이 과노인의 입에서 거론될 때부터 시작되었는데 정작 우교가 모습을 보이자 상흔들이 마구 일그러지고 있었다.
“사혼(死魂)! 스스로 목숨을 끊을 테냐? 아니면 본 문주가 손을 써야 하겠느냐?”
사혼은 살천문 잠형각(潛形閣)의 각주(閣主) 잠백(暫魄)과 우교 간 나눈 대화에서 나온 이름. 독접(毒蝶)과 사혼(死魂)을 놓쳤다고 했었고, 우교는 그들을 잡아들이지 말고 쫓기만 하라고 했었다.
우교가 한 말의 내용은 매우 살벌한 것이었지만 목소리는 마치 달래는 듯한 나직하고 친근했다. 하지만 사혼은 그러한 목소리가 마치 저승사자의 영음(靈音)처럼 들렸다.
“나…나는….”
감정과 자신의 살기마저도 절제할 수 있는 인물로 보였던 사혼의 목소리가 미세하게나마 떨려나오자 주위에 있는 사람들은 이상한 느낌이 들었다. 야수와 같은 저런 자도 두려워하는 것이 있는 것일까?
허나 사람들은 곧 이해했다. 죽음조차도 두려워하지 않는 야수의 본성을 가진 인물이라도 한 번 굴종했던 상대라면 그가 어떻게 변하던 막연하게 두려움을 가지게 되는 것이다. 상대 앞에 오체복지(五體伏地)한 채 충성을 맹세했고, 오랜 기간 동안 충성을 한 관계라면 그 관계를 떠났다 하더라도 어쩔 수 없이 굴종하게 되는 것이다. 특별한 계기로 벗어날 수 없다면 말이다.
그는 입술을 깨물고 있었다. 이미 입술 한쪽이 터져 피가 흐르고 있었는데 그는 그 고통이 아니라 마음속에서 막연하게 피어오르는 두려움 때문에 고통을 느끼고 있었다. 그는 몸을 부르르 떨었다. 허나 그것이 효과가 있었는지 그는 일그러진 입술 사이로 음산한 음성을 내밷았다.
“나는 이제 당신의 수하가 아니오!”
첫 말을 하기 어렵다. 사혼은 우교에 대한 막연한 두려움 속에서 벗어나려 애쓰고 있었다. 우교가 고개를 저었다.
“본문에 발을 딛은 사람은 죽어서도 본문을 벗어나지 못한다.”
“살천문은 이미 중원에서 사라졌소. 문주가… 아니 당신이 살아있다 해도 그 사실에는 변함이 없소.”
“배반자는 본문이 영원할 것이란 사실을 모르는 법이지.”
그 때였다. 우교의 말이 끝나기 전에 주위 숲 속에서 비명이 터져 나왔다.
“으악---! 헉---!”
누굴까? 숲 속에서는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 것일까? 그제 서야 우교가 담천의에게 시선을 돌리며 싱긋 웃었다.
“이제야 공평해진 것 같소. 영주께서는 언제 시작하실 거요?”
우교는 살천문의 수하들을 기다렸던 것이다. 주위에 매복되어 있는 상대의 숫자가 적지 않다고 느낀 그는 수하들이 오기를 기다렸던 터. 비명소리는 아마 그것을 확인시켜 주는 분명한 증거였다.
“시작은 내가 한다!”
말과 함께 전월헌의 얼굴에 미소가 걷히며 쾌속하게 담천의를 향해 쏘아왔다. 그의 손에 들린 연검이 마치 독사의 혀처럼 영활하게 움직여 도저히 어디를 노리고 파고드는지 짐작할 수 없게 했다.
그것이 시작이었다. 전월헌과 함께 모습을 보인 좌우산인인 혁잠(爀箴)과 공환(蚣䴉) 두 명과 함께 사혼이 우교를 향해 들어가고, 약속이나 한 듯 상엽을 비롯한 사형제가 백결을 향해 공격해 갔다. 또한 일엽의 얼굴에 미소가 떠오르자 그의 앞을 막아 선 추학은 서서히 쌍수를 가슴께로 끌어 올렸다.
숫자적으로는 분명 절대적으로 유리한 싸움이었지만 장내를 지켜보고 있는 모용수와 과노인의 얼굴에서는 긴장된 기색이 사라지지 않고 있었다. 장내가 아닌 숲 속에서 미지의 인물들의 혈투도 불안감의 요인이었다.
하지만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담천의와 전월헌의 승부였다. 모두 이기더라도 전월헌이 패한다면 모두 진 것과 마찬가지였다. 더구나 자존심이 강한 전월헌은 자신의 싸움에 끼어드는 누구라도 먼저 벨 사람이었기에 아무도 그들 간의 승부에는 끼어들 생각을 하지 못했다.
싸움을 시작한 백결의 전음이 담천의의 고막을 파고 든 것은 바로 그 순간이었다.
‘담제… 이렇게 불러도 좋을지 모르겠군. 나중에 기회가 없을지 몰라 미리 말해 두겠네. 이곳에서 서북쪽으로 능선을 타고 작은 봉우리 두 개를 넘으면 곰이 웅크리고 있는 형상의 산이 보일 걸세. 그 산허리에 낡은 사당이 있는데 그것이 천마곡으로 들어가는 연동의 입구라네.’
담천의나 우교와는 달리 상대를 아는 백결이 상엽 사형제를 얼마나 꺼려하고 있는지 보여주는 말이었다.
(제 8 권 完)
덧붙이는 글 | 단장기를 연재한지 벌써 1년하고도 5개월이 되었습니다. 의외로 많은 독자 분들이 성원해 주시는 바람에 더욱 열심히 쓰려고 최선을 다하고 있습니다. 요사이 부쩍 댓글이 많이 달리는군요. 점점 종국으로 가는 과정이라 그런 모양입니다. 일일이 댓글 달아드리지 못해 죄송합니다. 마음은 그렇지 않은데 시간에 쫓기다보니 어렵습니다. 양해해 주시기 바랍니다.
벌써(?) 아니 이제(?) 8권이 끝났습니다. 써야 할 내용은 많은데 2권으로 압축하기가 쉽지 않습니다. 잘될지는 몰라도 처음 계획했던 대로 10권으로 마치려 노력 중입니다. 그래서 다시 두 권 분량에 대한 골격을 짜고 구상하고 있습니다.
양해 말씀드릴 것은 9권 시작은 신년 1월 2일 시작하겠습니다. 3일치 분량을 싣는 것도 그렇고 새로운 느낌으로 새해를 시작하려고 생각하니... 더구나 좀 쉬고싶다는 제 게으름에 대한 대가로 3일간만 푹 쉬고자 합니다. 너그럽게 봐주시길.....
독자 분들에 대한 제 신년인사는 게시판에 올려놓았습니다. 지루하시거나 섭섭하시면 게시판에 의견을 올리시는 것도 좋을 듯 합니다. 게시판이 있는지 조차 모르는 분들도 상당한 것 같기도 합니다. 게시판은 메인화면에서 단장기를 클릭하시면 단장기 연재회가 나오고 그 하단에 있습니다.(문화면으로 들어가 오른쪽에 있는 연재기사 난에서 단장기를 찾아 클릭하셔도 동일합니다.)
신년에 뵙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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