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남준 시집 <적막> 겉표지 사진이종암
새해가 되면 우리 나이로 오십이 되는 박남준 시인이 마흔아홉 끝자락에 새 시집 <적막>을 펴냈다. 그는 1957년 전남 법성포에서 태어났고, 1984년 시 전문지 <시인>를 통해 작품 활동을 시작했다. 그동안 그가 펴낸 시집으로는 <세상의 길가에 나무가 되어>(1990), <풀여치의 노래>(1992), <그 숲에 새를 묻지 못한 사람이 있다>(1995), <다만 흘러가는 것들을 듣는다>(2000) 등이 있고, <적막>은 그의 다섯 번째 시집이 된다.
시인 박남준의 거처(居處)는 서울과 같은 번잡한 도시가 아니라 궁벽하고 한적한 산골 마을 흙집이다. 그것도 아무 가족도 없이 혼자서. 그는 전주 근교 모악산의 한 산방에서 오십이 다 되도록 가족도 꾸리지 못하고 십 몇 년을 외톨이로 혼자 살았다. 그곳에서의 외롭고 그리운 삶의 흔적이 3시집과 4시집에 오롯이 담겨져 있다.
시 '이사, 악양'에서 볼 수 있듯 박남준 시인이 오랜 전주 모악산의 삶을 청산하고 지리산 자락 악양벌로 이사를 갔다. 시집 '적막'은 전주 모악산과 경남 하동 악양이라는 두 지역에 걸쳐 있는데, 시의 내용에는 그리 큰 변함이 없다. 혼자 사는 외톨이의 '적막한 삶의 무늬'인 외로움과 그리움이 박남준 시의 속살이다.
그의 어느 산문집을 보고 "그의 글을 읽으면 영혼의 때를 벗는 것 같다"고 한 동료 시인의 말은 이 시집에도 그대로 통용된다. 그의 글(시와 산문)은 하도나 맑아서 그의 시를 통해서 독자인 나는 세속의 때를 다 씻어낼 것만 같다.
논산 훈련소에서 만난 친구가 자대 배치를 받아 떠나기 전 그의 손에 쥐어준 반쪽의 시를 완성해서 되돌려주겠다는 약속을 지키기 위해 시를 쓰게 되었다는 박남준 시인. 그는 외로움과 그리움을 스스로 사는, 그리하여 순도 높은 서정시를 쓰는 우리 시대의 도저한 낭만주의자다. 필자가 그를 가까이에서 본 것은 1999년 전남 순천에서 가진 '영호남작가대회' 다음날, 순천만 겨울 갈대밭에서였다.
이런 저런 이야기를 나누다가 흥얼흥얼 부르는 그의 노랫가락을 들으면서 나는 박남준 시인이 마치 갈대밭 사이로 넘나드는 바람이거나 순천만 허공이 외롭지 않게 이리 저리 날아다니는 겨울새 같다는 생각을 했다. 그것도 아니면 겨울 허공이라는 공책에 시를 써내려가는 흰 갈대라고나 할까.
표제시인 '적막'은 삶의 짝도 없이 외롭게 살아가는, 그렇게 늙어가는 박남준 시인의 현재적 삶이 오롯이 담겨져 있다.
눈 덮인 숲에 있었다
어쩔 수 없구나 겨울을 건너는 몸이 자주 주저 앉는다
대체로 눈에 쌓인 겨울 속에서는
땅을 치고도 돌이킬 수 없는 것들을 묵묵히 견뎌내는 것
어쩌자고 나는 쪽문의 창을 다시 내달았을까
오늘도 안으로 밖으로 잠긴 마음이 작은 창에 머문다
딱새 한 마리가 긴 무료를 뚫고 기웃거렸으며
한쪽 발목이 잘린 고양이가 눈을 마주치며 뒤돌아갔다
한쪽으로만 발자국을 찍으며 나 또한 어느 눈길 속을 떠돈다
흰빛에 갇힌 것들
언제나 길은 세상의 모든 곳으로 이어져왔으나
들끓는 길 밖에 몸을 부린 지 오래
쪽문의 창에 비틀거리듯 해가 지고 있다
- '적막' 전문
지독한 외로움과 그리움에 갇혀 사는 시인 박남준의 현재적 삶은 "처마 끝 풍경 소리, 나 여기 바람부는 문밖 매달려 있다고/징징거린다"는 '겨울 풍경'으로, 또 "그리움이란 저렇게 제 몸의 살을 낱낱이 찢어/ 갈기 세운 채 달려가고 싶은 것이다/ 그대의 품 안 붉은 과녁을 향해 꽂혀 들고 싶은 것이다/ 화살나무 / 온몸이 화살이 되었으나 움직일 수 없는 나무가 있다"는 '화살나무'로, 처절하도록 팽팽하게 제 몸을 당긴 시위의 부동 자세로 서 있는 '왜가리'로, "햇살 아래 녹아내린 투명한 눈물자위를/아 몸을 다 바쳐서 피워내는 사랑이라니/그 빛나는 것이라니"의 '따뜻한 얼음'등 다양하게 변주되고 있다.
그렇다. 박남준의 시는 그의 말처럼 세상의 모든 그리운 것들을 위하여 쓰는 길고 긴 편지다. 이번에 그가 보내준 편지를 읽으면서 나는 왠지 자꾸 가슴이 아려왔다. 박남준 시인 끌어안고 살아가는 고독과 외로움, 그리움이 내게도 건너왔나 보다.
시집 <적막>에는 남파 간첩이었던 외할아버지로 인해 풍비박산이 났던 아픈 가족사, 혈육(아버지)에 대한 그리움, 중국 명사산, 터키 카파도키아 등 외국여행 경험, 도법스님 등과 함께 했던 생명평화 탁발순례 등을 담은 시편들도 실려 있다.
"시를 찾아, 시에 갇혀, 결국 여기까지 왔다."고 말하는 박남준 시인. 살아서는 다 쓰지 못한 자신의 시 한 편 대신 죽어 한 그루 나무의 꽃으로 세상에 전하겠다고 하는 박남준 시인, 그는 너무 착하다. 맑다. 맑은 강물 속의 버들치 눈빛만 같다. "살아 지은 죄 안고 다시 돌아가는 날/한 그루 어린 나무 아래 누워야겠다 생각하네/그 나무의 가지가 되고 푸른 잎이 되어/새들의 노래에 귀기울여야겠네"('삼월 눈 속에 차를 마시다') 라고 적고 있는 그의 시를 보면. 시집 겉표지에 "독자들은 그의 시를 시린 삶의 한가운데 '입춘(立春)'처럼 놓아두고 싶을 것이다."라고 한 천양희 시인의 지적에 나는 전적으로 동감한다.
박남준, 그의 편지(시)가 우리 곁에 있어 우리는 그 만큼 덜 외롭고 덜 쓸쓸하다. 아니 더 외롭고 더 그립다.
적막
박남준 지음,
창비, 20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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