허준영 경찰청장은 왜 버티나

[정치 톺아보기 112] 대통령의 솔직함? 무책임?

등록 2005.12.28 19:14수정 2005.12.28 19: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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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찰의 과잉진압에 의한 농민사망사건과 관련해 허준영 경찰청장이 27일 대국민사과를 한 뒤 경찰청사 브리핑룸을 나서고 있다. ⓒ 오마이뉴스 남소연


참으로 희한한 일이 벌어졌다.

시위농민을 사망에 이르게 한 공권권의 오남용과 관련해 대통령이 대국민 사과를 하며 국민에게 머리를 숙였는데, 경찰청장은 "거취문제는 내가 결정한다"며 다소 뻗뻗한 자세를 취했다. 일찍이 없던 일이다.

노 대통령은 27일 오후 대국민 사과문을 통해 "국민 여러분께 머리숙여 사죄드린다"며 "정부는 국가인권위원회의 권고에 따라 책임자를 가려내 응분의 책임을 지우고 피해자도 적절한 절차를 거쳐 국가가 배상하도록 하겠다"고 밝혔다.

노 대통령은 그러나 허준영 경찰청장 문책론에 대해서는 "내가 해석하기로는 대통령이 경찰청장을 문책할 수 있는 법적 권한을 가지고 있지 않다"면서 "대통령이 (문책할) 권한을 가지고 있지 않으면 본인이 판단할 수밖에 없다"고 밝혔다. 허 청장이 자진 사퇴하지 않는 한 그에 대한 경질은 검토하기 어렵다는 것이다.

그러나 허 청장은 같은 날 오전 대국민 사과 발표에서 "바로 물러나야 책임을 지는 것이 아니다"면서 "자리에 연연할 생각은 조금도 없지만 임기제 청장으로서 평화적 시위문화 정착을 위해 더욱 노력하는게 저의 소임"이라고 말했다. 요컨대 자기자신이 아닌 경찰조직의 위상보호를 위해 자리를 지키겠다는 것이다.

명분은 '경찰청장 임기제'라는 원칙과 '평화시위문화 정착'이라는 소신이다. 그러나 당장은 물러나지 않겠다는 허 청장과 거취 문제는 본인이 판단할 수밖에 없다는 노 대통령을 지켜보는 일반 국민의 시선은 어리둥절할 뿐이다.

경찰이 말하는 '퇴진 불가' 세가지 이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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농업의 근본적 회생과 고 전용철·홍덕표 농민 사망 사건 대책위는 28일 오후 서울 서대문 경찰청앞에서 '노무현 대통령 기만적 사과 규탄 및 허준영 경찰청장 즉각 파면 촉구 기자회견'을 열었다. 기자회견을 마친 참가자들은 경찰청앞에서 노상단식농성에 돌입했다. ⓒ 오마이뉴스 권우성

허 청장이 이처럼 버티기로 작심을 한 데는 경찰의 오랜 숙원인 검·경 수사권 조정 문제가 막바지에 와 있는 단계에서 사령탑이 바뀌면 죽도 밥도 안된다는 위기의식이 깔려 있다. 따라서 사퇴를 하도라도 재임중에 수사권 조정을 문제를 매듭짓고 나가야 한다는 절박감이 깔려 있는 것이다.

실제로 경찰은 수사권 독립을 대선공약으로 내건 노무현 대통령의 암묵적인 지원 아래 여야를 떠나 국회의원들을 대상으로 전천후 밀착마크를 하면서 대국회 로비를 펼쳐 그 어느 때보다도 수사권 조정의 성공을 목전에 두고 있는 상황이다. 그러니 허 청장이 경찰 수사권 독립의 씨를 뿌린 자로서 그 결실까지 거두고 물러나려는 것은 이해하지 못할 바는 아니다.

허 청장이 버티기로 작심을 한 데는 경찰 총수로서 개인의 명예뿐만 아니라 경찰 조직의 논리도 작용하고 있다. 시위진압 과정에서 우발사고가 발생할 때마다 경찰 총수가 물러나야 한다면 경찰이 이제 더는 시위진압을 할 수가 없다는 주장이 그것이다.

또 다른 측면에서는 연말연시로 예정된 경찰 정기인사를 앞두고 있는 상황에서 허 청장이 물러날 경우 허 청장이 짜놓은 인사구도가 흐트러질 수밖에 없어 조직의 대혼란이 올 수밖에 없다는 현실적인 우려도 한몫을 하고 있다. 새로운 청장 후보가 국회 청문회를 거쳐 임명된 후에 후속 인사를 처음부터 다시 하기까지 경찰조직은 인사 후유증으로 만신창이가 될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실제로 경찰은 이미 인사위원회가 열려 철저한 '지역안배'를 감안한 차기 치안정감 4명의 인사구도를 짜놓은 것으로 알려졌다. 경북 출신인 허 청장은 지난 1월 단행한 치안정감 인사에서도 지역안배 관행을 고수해 ▲이기묵 서울경찰청장(충남 보령) ▲최광식 경찰청 차장(전남 고흥) ▲강영규 경찰대학장(경남 합천) ▲이택순 경기경찰청장(서울)으로 수뇌부를 구성했다.

그런데 이번 정기인사에서 허 청장은 전남지방청장 임기중에 자신을 보좌할 차장으로 끌어올려 '빚'이 있는 최광식 차장을 서울청장으로 전보하고 나머지 3명을 퇴진시키는 인사 구도를 갖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그러나 청와대는 이번 정기인사에서 치안정감 4명을 모두 퇴진시키고 한광택 전남지방청장을 서울청장으로 승진발령해 세대교체를 꾀하려는 인사구도를 갖고 있어 '상당한 조율'이 필요한 것으로 전해진다.

따라서 이런 상황에서 허 청장이 물러날 경우, 양측이 갖고 있는 기존의 인사구도가 모두 흐트러져 복잡해진다는 얘기가 나온다.

특히 경찰은 이미 지난해에도 최초로 임기제가 적용된 최기문 경찰청장이 청와대와의 인사를 둘러싼 불협화음으로 임기를 3개월 앞두고 조기 사퇴한 바 있다. 당시 최기문 청장은 자신의 인사안이 청와대에 의해 받아들여지지 않자 사표를 냈다. 이번에도 중도사퇴할 경우 경찰은 김대중 정부 말기에 시작된 '임기제 경찰청장 원칙'이 한번도 지켜지지 않은 좋지 못한 전례를 떠안게 된다.

일반 국민 입장에서는 이해하기 힘든 상황

그러나 일반국민의 시각에서 보면 수사권 조정 문제와 인사 구도의 혼란, 그리고 임기제 원칙의 훼손 등은 경찰조직의 논리일 뿐이다.

국민의 시각에서 보면, 우선 허 청장의 버티기가 일종의 '항명' 아니냐는 시각이 존재한다. 어제 오전 노 대통령의 대국민 사과발표가 예고된 상황에서 허 청장이 먼저 기자회견을 열어 "거취 문제는 내가 결정한다"고 '선수'를 친 것이 이를 뒷받침한다.

민주노동당은 허 청장의 기자회견에 대해 이미 "고압적이고 뻔뻔하기 그지 없다는 생각이 든다"면서 "사실상 항명 아니냐는 것이 당의 판단이다"고 입장을 정리했다. 민노당은 이어 28일에는 한발 더 나아가 "경찰청장 임기를 채우려다가 대통령 임기를 채우지 못하는 불상사를 맞이할 수 있다"고 경고했다.

임기제 '원칙'을 강조한 노 대통령의 발언도 일반 국민의 시선으로는 도무지 이해할 수 없는 '순진무구'로 들리는 대목이다. 당장 "고위 공직자 임면권이 부여된 대통령에게 경찰청장 인사권이 없다면 도대체 경찰청장 인사권은 누가 가지고 있다는 말이냐"는 볼멘소리가 나오게 되었다.

지난 2003년 12월 개정된 경찰청법은 경찰청장의 임기를 2년으로 하고 대통령이 국회 청문회를 거쳐 임명하도록 했다. 이는 정치권력으로부터 경찰의 정치적 독립을 확보하자는 것이 기본 취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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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무현 대통령이 27일 오후 청와대 춘추관에서 기자회견을 갖고 경찰의 과잉진압에 의한 농민사망사건과 관련, 대국민사과를 했다. ⓒ 오마이뉴스 이종호

하지만 어떤 경우든 임기제를 '방패막이'로 내세워 반드시 임기를 채우도록 의무화한 조항은 아니라는 게 법조계의 일반적인 해석이다. 또 노 대통령이 검찰총장과 경찰청장 등 임기제 공직자들의 사표를 수리한 전례도 여럿 있다.

노 대통령은 이미 대통령에 취임한 지 채 한 달도 안되어 열린 '평검사와의 대화'에서 "솔직히 현재의 검찰 수뇌부를 신임하지 않는다"고 이례적으로 너무 솔직하게 불신감을 표시해 김각영 검찰총장이 취임 4개월 만에 사직서를 내게 만들었다. 노 대통령은 또 최근 강정구 동국대 교수에 대한 법무부 장관의 수사지휘권 파동으로 사의를 표명한 김종빈 검찰총장에 대해서도 사표를 수리해 결과적으로 취임 6개월 만에 중도 하차하게 만들었다.

또 앞에서 이미 지적했지만, 첫 임기제 경찰청장인 최기문 전 청장도 경찰인사를 둘러싸고 청와대와 마찰을 빚자 임기를 3개월 남겨둔 상태에서 지난해 12월 자진 사퇴했다. 청와대가 마음만 먹으면 얼마든지 '자진 사퇴'를 하게 할 수 있다는 얘기이다.

그런데도 노 대통령이 이번에는 "제가 문책인사를 할 수 있는 법적 권한은 없는 것 같다"면서 "이것은 본인이 판단할 수밖에 없다"고 한 발 비껴서는 태도를 취한 것은 지나치게 솔직함을 넘어서 무책임한 국정운영이라는 비판을 받을 소지가 크다.

때마침 국가인권위는 경찰의 과잉진압 책임과 함께 "양심적 병역거부권은 헌법 제19조 양심의 자유의 보호 범위 내에 있다"고 정부에 권고했다.

민노당 "노 대통령은 국정 최고 책임자에서 국정 최고 무책임자로 전락했다"

법률가인 노 대통령은 어쩌면 "대통령이 경찰청장을 문책할 수 있는 법적 권한을 가지고 있지 않다"는 자신의 해석을 양심에 반하는 행동을 강제 당하지 않을 '부작위에 의한 양심실현의 자유'와 동일시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자신에게 솔직한 노 대통령으로서는 허 청장에 대한 퇴진 권고가 자신의 양심에 반하는 행위로 간주할 만도 하다.

그러나 대통령에게는 '부작위에 의한 양심실현의 자유' 못지 않게 '작위적인 양심불량의 의무'도 중요하다. 더욱이 개인의 부작위가 미치는 영향은 미미하지만 대통령의 부작위가 지대한 영향을 미칠 수밖에 없다.

또 3권분립의 권력분담과 역할견제 구도에서 대통령이 법을 내세워 '부작위'를 합리화하면 국회가 나서는 수밖에 없다. 경찰청법은 경찰청장의 임기를 법으로 규정하는 한편으로 "청장이 그 직무집행에 있어서 헌법이나 법률을 위반한 때에는 국회는 탄핵소추를 의결할 수 있다"고 돼 있다. 실제로 심상정 민주노동당 의원은 28일 "이번 일로 노 대통령은 국정 최고 책임자에서 국정 최고 무책임자로 전락했다"면서 "대통령이 못하면 국회가 해야 한다"고 말해 경찰청장 탄핵소추안 공동발의를 각당에 공개 제안했다.

결국 노 대통령의 '부작위'가 낳은 허 청장의 '버티기'가 종래에는 '자진사퇴'냐 아니면 탄핵소추에 의한 '파면사퇴'냐의 갈림길에 선 느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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