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말에 놀러 가냐고? 부모님 뵈러 가야죠!

잠깐이나마 놀러 갈 생각을 했던 제가 부끄럽습니다

등록 2005.12.30 18:40수정 2005.12.31 18: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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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말이다 보니 한 해 동안 인연이 깊었던 분들과 전화 통화를 많이 한다. 그러면서 꼭 듣는 말이 있으니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라는 말과 함께 "연말에 뭐 하세요? 어디 놀러 안 가세요?"라는 말이다. 처음 한 두 번 들을 때는 그저 의례적으로 하려는 말로 들리기도 하고 해서 별로 대수롭지 않게 생각했는데, 자꾸 들으니 세뇌가 됐나 '어디 가야 되나?'하는 생각이 문득 문득 스치는 것이다.

하긴, 생각해보니 매년 여름휴가 때 빼고는 아내와 아이들을 데리고 가족끼리 어디 여행을 간 기억이 없다. 그것도 시골 부모님 댁에서 휴가를 거의 다 보내고 하루 정도 시간을 내서 놀러 갔으니 굳이 여행이라고 하기도 그렇다. 그래서인지 '눈도 녹은 것 같고 가까운 곳이라도 여행 갔다 올까?'하는 생각이 자꾸만 머리 속에서 맴돌았다.

며칠동안 고민 아닌 고민을 하면서 인터넷을 통해 여행 갈 곳을 찾아보기도 했다. 뭐, 딱히 가겠다고 정한 것은 아니었지만 막상 인터넷을 뒤지다 보니 어느 덧 마음속에서는 여행 가서 신나게 노는 아이들 모습과 오랜만에 온 여행에 행복해 하는 아내의 모습이 상상되었다.

'그래, 그동안 여행 한 번 제대로 못 가고 해돋이 구경 한 번도 못 갔는데 이 참에 해돋이든 온천이든 여행 한 번 갔다 오자!'

어느 덧 나는 연말에 여행 가는 것을 기정사실화 하고, 한 발 더 나가서 미리 멋진 장소를 정해 놓고는 예약이라는 것을 다 마친 후 여행 당일 날 아내와 아이들을 깜짝 놀라게 해 주자는 깜찍한 발상까지 하게 됐다.

다시 컴퓨터 앞에 앉아서 해돋이 명소 등 여행 정보 사이트에서 갈 만한 곳을 검색하기 시작했다. 그런데 아무래도 어린 애들이다 보니 차가운 새벽 공기가 부담스러운지라 온천이 좋지 않을 까 싶어 온천을 찾아보았다.

마침 내 고향과 가까운 곳에 갈 만한 온천여행지가 많이 있었다. 그 중에서도 아이들이 물놀이도 할 수 있는 시설에 예약전화를 해 보니 회원제로 운영돼 숙박은 곤란하다면서, 하지만 인근에 숙박시설이 굉장히 많으니 걱정하지 않아도 된다면서 한껏 시설 자랑을 하는 데 귀가 혹해서 그곳으로 가기로 정했다.

갑자기 연말에 대한 기대감에 행복한 생각이 들었다. 어제는 내가 아내를 보면서 히죽 히죽 웃으니 아내가 '저 사람 왜 저래?'하는 표정으로 나를 바라본다. 순간 '말하면 안돼 안돼!'하면서도 요놈의 입은 벌써 이번 주말에 온천으로 가족여행 갈 거라고 말하고 있었다.

기왕 비밀유지가 힘들어 졌으니 아내의 의향을 물었다. 혹시 다른 곳에 가고 싶을 지도 모르니까. 그런데 신이 나서 팔짝팔짝 뛸 줄 알았던 아내의 말투가 왠지 시큰둥하다. 아내한테 기분 안 좋으냐고 했더니 아내는 "놀러 가면 좋기야 좋은데…"하면서 말꼬리를 흐린다.

무슨 말인가 하고 싶은 얼굴이라 아무 말 없이 아내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한참이 지난 후에 아내가 입을 연다.

"이 다음에, 이 다음에 가자. 지금 쯤 아버님하고 어머님 애들 보고 싶어서 많이 기다리실 텐데. 이번 달에는 눈 때문에 한 번도 못 갔잖아. 그리고 거기 온천이면 시골에서 가까운 곳인데, 아버님 어머님 생각나서 마음도 편하지 않을 것 같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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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쯤 아버지와 어머니는 세린이와 태민이가 많이 보고 싶으실 겁니다. 아마 이번 주말에 가면 정말 좋아하실 겁니다. ⓒ 장희용


아뿔싸! 미처 그 생각을 못했다. 그러고 보니 시골에 갔다 온지도 한 달이 다 되어간다. 여느 때 같으면 2~3번은 갔다 왔을 텐데, 이번 달에는 눈이 하도 많이 온 탓에 한 번도 가지 못했다. 늘 주말이면 세린이하고 태민이 보는 즐거움으로 사시던 분들인데 한 달이 넘게 못 봤으니 얼마나 보고 싶으셨을까?

나는 미처 그 생각을 못했다. 핑계 같지만 하도 사람들이 어디 놀러 안 가냐고 묻는 바람에 그만 시골에 계시는 부모님 생각을 하지 못했다. 아버지와 어머니께서도 더 이상 눈이 안 오고 길도 많이 녹았으니 이번 주말에는 혹시나 올려나 한껏 기대를 하셨을 지도 모르는 일인데.

아니, 분명히 기다리고 계실 것이다. 나도 세린이와 태민이가 하루에도 몇 번씩 보고 싶고, 감기라도 걸리면 걱정이 태산 같은데, 한달이 넘게 자식과 며느리 그리고 그리도 예뻐하시는 손주들을 보지 못했으니 그 그리움이 얼마나 깊을까?

아내한테 고맙다는 말을 했다. 그리 생각해 주는 아내가 진심으로 고마웠다. 그리고 이제는 누군가 연말에 어디 놀러 안 가냐고 물으면 이렇게 말할 거다.

"당연히 놀러 가죠. 부모님 뵈러 시골로 놀러 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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