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른다섯 마리의 해를 날려 보냈습니다

내가 아이들을 포기하지 않는 이유

등록 2006.01.01 18:13수정 2006.01.01 18: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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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 해돋이

해돋이 ⓒ 안준철

새해 첫날, 눈을 뜨자마자 거실로 나가 먼저 시계를 보았습니다. 6시 4분전. 여느 때처럼 잠깐 소파에 엎드려 기도를 하고 다시 시계를 보니 6시가 조금 지났습니다. 거실 문을 열고 베란다에 나가 하늘을 올려다보았습니다. 반갑게도 별이 총총 떠 있습니다. 조금 늦지 않았을까 걱정이 되면서도 저는 서둘러 옷을 입었습니다. 새벽공기가 찰지 몰라 평소의 등산복에 외투를 하나 더 껴입고 집을 나섰습니다.

산길은 아직 어둑했습니다. 발에 돌부리라도 닿으면 넘어질 수도 있는 상황이어서 랜턴을 가져오지 못한 것이 아쉽기만 했습니다. 저는 꾀를 내어 앞서 가는 두 사람을 바짝 따라 붙었습니다. 불빛이 발등을 바로 비추지 않고 두어 발짝 건너를 비추고 있었기에 발밑은 여전히 조심스러웠지만 그런대로 따라 갈만했습니다. 그렇게 바짝 불빛을 따라가다가 문득 아이들 생각이 났습니다. 나는 아이들에게 어떤 불빛이었을까? 아니, 불빛이기나 했을까?

잠시 그런 생각에 빠져 있다가 문득 앞에서 비춰주던 불빛이 온데간데없이 사라져버린 것을 뒤늦게야 알았습니다. 졸지에 불빛을 놓쳐버린 저는 어쩔 수 없이 눈을 크게 뜨고 스스로 길을 더듬어 산을 올라가야만했습니다. 차츰 어둑한 산길에 익숙해질 무렵, 저는 다시금 아이들 생각에 빠져 있었습니다. 언젠가는 아이들도 스스로 제 길을 더듬어 가야할 것이 아닌가. 행여 다칠세라 서둘러 불을 비춰주는 식의 조급한 사랑이 스스로 어둠을 밝히는 능력을 퇴화시킬 수도 있지 않겠는가.

a 해돋이

해돋이 ⓒ 안준철

산 정상에 가까워지면서 날은 조금씩 환해지고 있었습니다. 해돋이를 놓쳐버린 것은 아닌가하고 마음을 졸이다가 먼저 와 있는 사람들의 표정을 보고서야 안심을 했습니다. 무언가를 기다리는 사람의 표정은 아름답습니다. 그 기다림의 시간이 길어지면서 더러는 실망하는 빛을 보이기도 했습니다. 조금 더 시간이 지나자 아예 산을 내려가는 사람도 생겼습니다. 그분들을 망연히 바라보다가 문득 이런 생각을 했습니다.

'저 너머에 이미 해는 떠 있으리라. 그러니 어떤 모습으로든 해는 꼭 우리 앞에 나타나리라.'

제가 해돋이 구경을 포기하지 않은 것과 아이들을 포기하지 않은 것은 그 이치가 비슷합니다. 지금 제 눈에 보이지는 않지만, 아니 아이 스스로조차 인식하지 못하는 어떤 변화의 조짐이 분명 있으리라는, 아니 있을 수밖에 없다는 굳건한 믿음이 저에게는 있습니다. 그런 믿음이 저의 낙천적인 성격 때문이다? 그렇지 않습니다. 그것은 그동안 저와 인연을 맺은 수많은 제자들이 보여준 실증적인 사실입니다.

인간은 진실과 사랑에 약하다는 케케묵은 고전적인 진리를 저는 한 번도 의심해본 적이 없습니다. 사람에 따라서는 터무니없어 보이기도 할 그런 인간에 대한 무지막지한(?) 확신은 저를 교사로서 살아남게 합니다. 고백하자면, 저는 교사로서 부족한 점이 한두 가지가 아닙니다. 특히 학생들을 통제하고 관리하는 능력은 거의 무능교사에 가깝습니다. 하지만 저에게는 한 가지 중요한 기술이 있습니다. 그것은 멍청해 보일만큼 사람을 믿고 기다릴 줄 아는 기술입니다. 어쩌면 그것 하나로 지금까지 버텨오고 있는 지도 모릅니다.


a 해돋이-멀리 해의 싹이 보인다

해돋이-멀리 해의 싹이 보인다 ⓒ 안준철

올해도 예외는 아니었습니다. 아니, 올해처럼 누군가를 오래 기다려본 적도 없습니다. 이만하면 돌아올 때가 되었는데, 이제 싹이 보일 때도 되었는데, 하며 보낸 시간들이 참 많았습니다. 그러면서 아직도 턱없이 부족한 저의 내공을 키운 한 해였다는 생각이 들기도 합니다. 그런 생각을 하면 아이들이 하나도 밉지 않습니다. 돈을 주고 받아야할 연수를 아이들이 해준 셈이니까요.

어제 방학선언식을 했는데 떡과 과자와 음료를 앞에 놓고 쫑파티를 하면서 두 아이가 저 때문에 말다툼을 하는 것을 보았습니다. 이런 식이었습니다.


"선생님, 내년에도 우리 반 담임 해주세요."
"너 죽을래? 샘, 내년에는 담임 하지 마!"

평소에도 제 담임을 친구처럼 생각하는지 말을 놓기 일쑤인 녀석은 한 해 내내 저를 힘들게 했습니다. 딴에는 그것이 마음에 걸렸는지 내년에는 담임을 하지 말라는 것이지요. 저는 그 말을 듣고 웃고 말았지만 속으로는 얼마나 기뻤는지 모릅니다. 방학하는 날 학교를 빼먹지 않고 제 자리를 지키고 앉아 그런 말을 할 수 있는 아이라면 안심할만하다는 생각을 했던 것이지요.

긴 겨울방학이 끝나면 아이들은 진급을 하여 3학년이 됩니다. 그 사이 제가 담임으로서 아이들을 만날 수 있는 기간은 딱 3일뿐입니다. 종례를 마치기 전에 저는 일일이 아이들과 악수를 나누었습니다. 그런데 한 아이가 제 손이 따뜻하다고 놓아주질 않았습니다. 저는 퉁명스럽게 놓으라고 말은 했지만 속으로는 참 기분이 좋았습니다. 저도 오랫동안 놓고 싶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이제 아이들을 놓아주어야합니다. 그것이 사랑이라고 해도 이제는 제 스스로 날아갈 수 있도록 말입니다.

a 해돋이

해돋이 ⓒ 안준철

"어, 저기 뜨네. 아, 예쁘다!"
또 잠깐 딴 생각을 하는 사이, 막 해가 떠오르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제 눈에 그것은 해라기보다는 하나의 싹이었습니다. 아주 작은, 거의 점에 가까운. 하지만 해는 점점 제 모습을 드러내기 시작했고 순식간에 완전한 원을 그려보였습니다. 우리 아이들도 그럴 수 있으리라는 믿음을 갖고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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ㄹ교사이자 시인으로 제자들의 생일때마다 써준 시들을 모아 첫 시집 '너의 이름을 부르는 것 만으로'를 출간하면서 작품활동 시작. 이후 '다시 졸고 있는 아이들에게' '세상 조촐한 것들이' '별에 쏘이다'를 펴냈고 교육에세이 '넌 아름다워, 누가 뭐라 말하든', '오늘 교단을 밟을 당신에게' '아들과 함께 하는 인생' 등을 펴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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